150. 대담 (1)
수행원의 안내를 받아 동시통역기 기능을 하는 이어폰을 끼고 왕자가 묵고 있는 객실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가는 회장 무리의 선두는 장은수였고, 꼬리가 나였다.
그리고 입장한 순서 그대로 중동의 왕자와 가까운 자리가 배정되었다.
“여러분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아메드 빈 알리 왕자는 두 팔을 크게 벌려 일행을 환영했다.
왕자는 중동 특유의 진한 이목구비에 푸른 눈을 가진 미남이었다.
구레나룻부터 턱까지 길게 이어진 친 커튼 형태의 수염 탓에 실제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긴 했지만, 우리 나이로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남자.
그리고 그 나이에 비해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에메랄드 시티 프로젝트에 시동을 거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세계에 알린 카타르의 2 왕자는, 계속해서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슬람 근본주의인 ‘와하비즘’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보여 서방세계를 놀라게 했으며,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유명 구단을 인수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물론 저것이 그의 진심인지 정치적인 선전인지, 그 속내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메드 빈 알리 왕자가 대단한 야심가라는 사실만은 틀림이 없었다.
자기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회장들을 상대로 보여주는 여유와 관록.
그의 그런 모습을 보자 문득 물 위에서 부유하는 백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도 우아해 보이는 백조는 수면 아래에서 쉼 없이 발을 움직인다고 하지 않는가.
카타르에는 수많은 왕자들이 있다고 한다.
아메드 빈 알리 왕자가 저 여유로움을 가지고 이곳에 오기까지 자기 형제들과 얼마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해왔을까?
그에 비해 내가 상대해야 할 사람은 단 한 명이니, 왕자보다 내 쪽이 처지가 낫다는 조금은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미스터 장, 이렇게 또 서울에서 보게 되니 너무 반갑습니다.”
“왕자님의 방한을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환영합니다. 부디 한국에 머무는 동안 편안한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국의 발전된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특히 서울은 정말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이제 에메랄드 시티가 서울보다, 아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이름처럼 말입니다.”
와하하━
왕자는 장은수의 말에 고개를 젖히며 크게 웃었다.
기분 좋은 웃음을 보인 아메드 빈 알리 왕자는 장은수와 뺨을 맞대며 인사를 마무리했다.
지금 저들의 인사는 이슬람의 예법상 가까운 집안사람이나 친구 간에만 허락되는 것.
왕자가 장은수 회장을 특별하게 여긴다는 것은 다른 회장들과 그저 평범한 악수를 했다는 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돌아왔다.
“오, 한국에도 이렇게 젊은 경영인이 있군요.”
그렇게 왕자가 잠시 나와 눈 맞춤을 한 뒤 나를 향해 손을 들어 올릴 때였다.
수행원 중 한 명이 급히 다가와 왕자에게 조용히 귀엣말을 했다.
그러자 왕자는 가지런하고 하얀 치아를 드러내곤 양손을 뻗어 내 어깨를 잡았다.
“··· 고왕!”
아메드 빈 알리 왕자는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으로 우리 회사의 사명을 말했다.
“인자하고 자애로운 알라께서 고왕을 축복하실 겁니다.”
순간 왕자가 내 쪽으로 훅 다가오는 것 같더니, 볼에서 잠시 꺼슬꺼슬한 감촉이 느껴졌다.
“큰 재앙을 막아주셨습니다.”
“모든 것이 신의 뜻이겠지요. 저는 고왕 그룹의 대표 한영수라고 합니다.”
내가 ‘인샬라’를 말하자, 왕자는 푸른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가면을 쓴 듯 웃고 있는 회장들 사이에서 장은수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적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얼굴로.
듣기에 장은수는 굉장히 정치적인 인물이라고 했다.
당연히 그는 표정을 숨기는 데 아주 능숙할 것이다.
그런데도 날 향해 저리도 솔직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마음속에 뿌리가 깊은 미움이 자리하고 있다는 의미이리라.
당신은 도대체 왜 날 그렇게까지 미워하는 거지?
당신은 적통이요, 나는 천출이기 때문인가?
감히 내가 당신과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것이 그리도 못마땅한가?
나는 장은수에게 묻고 싶어졌다.
당신이 위대하게나 훌륭한 일을 해서 장영복의 첫째 아들이 된 것이 아니듯이, 나 역시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태어난 것이 아니다.
당신은 내 삶을 부정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나와 장은수는 그렇게 또 한 번 눈의 대화를 나누었다.
왕자와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돌아가 앉자, 비로소 객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호성 차관은 왕자의 방한을 위해 수행원들이 전용기에 짐을 실어 미리 국내에 들어와 있었다고 했다.
그 준비과정이 얼마나 요란하고 대단했을지는 이 스위트룸이 증명을 해주고 있었다.
바닥에 깔린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장식된 커다란 카펫은 잘 모르는 내가 봐도 굉장한 가격을 자랑할 것 같았다.
아주 먼 옛날부터 ‘페르시아 융단’이라 불리며 중동의 카펫들은 최고품으로 인정받았다던데, 그 역사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 같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방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유리 공예품과 기하학적 무늬를 표현한 그림들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도무지 이곳이 대한민국 서울의 한복판인지, 어느 이슬람의 궁전 속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아메드 빈 알리 왕자의 방한 일정은 단 1박 2일.
그것을 위해 이렇게까지 호텔 룸을 싹 갈아엎을 정도로 준비를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왕자가 우리에게 내어준 시간은 단 한 시간.
그 시간의 촉박함은 모두를 감질나게 만들기 충분했다.
형식적인 인사말이 오가는 동안에도 회장들은 눈동자를 굴리며 눈치를 보았다.
아무리 커다란 회사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있고 사회적으로 명성을 누린다고 한들, 그들의 뿌리는 장사꾼이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것이 기업인의 사명이라고 아무리 입으로 떠들어봤자, 그것은 그저 허울 좋은 농담일 뿐.
극한의 수익 추구.
그것이야말로 저들의 진정한 사명 아니겠는가.
그래서 카타르에서 흘러나오는 부의 향기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달콤하게 느껴지리라.
아메드 빈 알리 왕자가 어디 보통 사람인가.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국왕을 제외하면, 현시점에서 그 카타르의 부와 권력의 가장 핵심부에 있는 이가 바로 저 왕자라는 걸.
이 자리가 수십조, 아니 그 이상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엘도라도를 꿈꾸며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한영 그룹의 신대현 회장이었다.
“귀국과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 것에 대해 크나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한영 그룹은 카타르와 한국 간에 경제교류의 교두보가 되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한영 그룹은 국내 조선업계의 최강자.
그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게 한영은 최근 오늘 초대받지 못한 몇몇 회사와 합작하여 카타르 국영 석유 회사와 무려 150억 달러 규모의 LNG 운반선 수주 계약을 따낸 참이었다.
그야말로 작은 나라 하나쯤은 살 수 있을 법한 천문학적인 액수.
“LNG 운반선 발주를 계획할 때 최우선으로 고려한 나라는 당연히 한국이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조선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까.”
왕자의 말에 신대현 회장은 흐뭇하게 웃었다.
“우리는 앞으로 액화천연가스를 계속 증산할 생각입니다. 운반선이 더 필요할 겁니다. 귀사와 계속 발전적인 대화를 진행해보고 싶습니다.”
아마 신 회장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지 않았을까.
이걸로 몇 년간 농사는 다 지었다는 기분일 것이다.
신 회장의 발언은 하나의 신호탄이 되었다.
회장들은 각자의 회사를 홍보하는데 열을 올렸다.
아메드 빈 알리 왕자는 긍정적이지만, 확실한 것은 없는 모호한 말로 그들을 달랬다.
이런 분위기 속에 입을 다물고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는 두 사람이 있었다.
바로 나와 장은수 회장.
휘몰아치던 대화의 폭풍이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 때, 왕자의 눈이 장은수를 향했다.
“··· 역시나 지금 제 최고의 관심사는 에메랄드 시티입니다. 우리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에메랄드 시티는 무슬림들만을 위한 도시가 아닙니다. 세계의 수도가 될 것입니다. 특히나 알라께서 그런 위대한 사업을 저에게 맡기셨다는 것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웃음기를 잃지 않던 왕자의 얼굴이 대단히 진지해졌다.
자신이 이 프로젝트에 가지고 있는 열정을 그대로 보여주듯.
“그 사업에 세계 최고 기업 중의 하나인 태상의 협력을 몹시나 기대하고 있습니다.”
왕자의 말을 듣고도 장은수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아주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보라, 너희들이 아무리 번식 철의 공작들처럼 화려한 깃털을 뽐내도 결국 나에게는 미치지 못한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장은수의 여유는 오히려 그의 존재감을 더 빛나게 만들었다.
“건설뿐만 아니라 태상은 모든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합니다. 왕자께서 꿈꾸는 도시는 단순히 건물을 올리는 것이 아니지요. 모두가 상상만 했던 미래의 도시입니다.”
아메드 빈 알리 왕자는 장은수의 말에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상이 가진 모든 역량을 동원하겠습니다. 물론 그 바탕에는 도시 인프라 구축이 우선이겠지요. 태상은 합리적인 비용에 최선의 효과를 약속할 수 있습니다. 그게 다른 곳과 차별화된 태상의 기술입니다.”
왕자가 원하는 핵심만 노리는 담백한 말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머리를 숙이지 않는 의연함도 있었다.
짧은 말 몇 마디만으로도 장은수 회장이 단순히 야심만으로 가득 찬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기야, 그랬다면 진작에 은호 형이 장은수 회장을 뛰어넘었을 테지.
그렇다고 내가 주눅이 들어 기가 죽었을 리가.
나는 장은수가 그랬듯 차분하게 나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결코 들러리나 서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시간이 다가왔다.
왕자가 약속했던 한 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아메드 빈 알리 왕자는 시계를 한번 흘낏 보더니 여태껏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내게 말을 걸었다.
“미스터 한도 한 말씀 하시지요. 저처럼 젊은 분이라 왠지 대화가 통할 것 같은데요.”
“이거, 어려운 자리라 고왕의 회장님이 긴장을 많이 하신 모양입니다. 하하! 회사 경영은 처음이시니··· 한 회장님이야말로 오늘 제일 큰 걸 얻어가시네요. 경험 말입니다.”
누군가가 조롱을 감추고 있는 농담을 꺼내자 연이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장은수는 대놓고 크게 웃지는 않았지만, 한쪽 입술을 비죽이 말아 올렸다.
글쎄.
나는 당신들과 전략이 다르다.
자기 앞에서 누군가가 앞다투어 공을 자랑하는 것은 중동의 왕자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일일 것이다.
누군가의 기억에 오래 남기 위해서는 익숙함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왕자가 먼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발언을 내가 가져가기 위해.
확신이 있는 계산이었다.
고왕이라는 회사에 얼마라도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을 왕자가 내 이야기 한 번 들어보지도 않고 이 자리를 끝내지 않을 거라는 계산이.
“··· 저희 회사의 주력은 건설 부분입니다. 당연히 저 역시 에메랄드 시티 프로젝트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치 장은수가 조금 전 그랬던 것처럼.
대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