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첫 대면
태상, 한영, SMM, LK, 그리고 현산까지.
항상 재계 순위 다섯 손가락의 고정멤버들이자, 세계 무대에서 자신들만의 무기로 승부를 보고 있는 기업들.
시대가 많이 변했다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에서는 저 회사에 다니는 것을 성공한 직장인의 기준으로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비교하자면 다소 초라한, 고왕이라는 이름의 기업이 오늘 같은 무대에 서게 되었다.
장소는 태상의 호텔 브랜드인 더 코지 본점.
오대 기업의 회장 중 장은수만이 아직 이곳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를 제외한 회장들과 나는 대통령과 회담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아메드 빈 알리 왕자와의 만남을 위해 그가 묵고 있는 바로 아래층 객실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모양새가 우습기도 했다.
고작 서른도 안 된 이역만리 타국의 왕자를 만나겠다고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간다는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
천외천.
하늘 위에는 또 하늘이 있다는 것이 딱 들어맞는 이야기였다.
이 객실 안에서 나는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총수들은 나에게 예의상 웃는 얼굴로 인사 몇 마디를 건네긴 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재계 순위 20위권에도 간신히 턱걸이하는 기업이 도대체 여길 왜 왔냐는 듯, 철저하게 나를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
결코 내 자격지심에 저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들은 나를 배제한 채 자기들만의 한담을 나누느라 바빴다.
어차피 상관은 없었다.
오늘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은 이들이 아니라 아메드 빈 알리 왕자였으니까.
어차피 왕자의 눈에는 태상 정도나 예외일까, 나머지 기업들은 다 고만고만하게 보일 터.
그런데 유일하게 나에게 남다른 관심을 보인 사람이 하나 있긴 했다.
그는 LK 그룹의 김윤제 회장이었다.
“반갑습니다. LK 김윤제입니다.”
“아··· 처음 뵙겠습니다. 한영수라고 합니다.”
김 회장은 스스럼없이 나에게 먼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김윤제 회장은 LK의 2대 총수였다.
LK는 전자 산업 부분에 강점이 있는 기업으로 최근에는 AI 기술에 총력을 쏟고 있었다.
비슷한 연배의 다른 총수들이 재벌 3세라는 걸 고려할 때, LK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그들보다 짧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직 스마트폰이 대중화되지 못하여 다른 기업에서는 기껏해야 모양새나 따라 한 터치식 피처폰을 찍어내고 있을 때, LK는 빠르게 이 신사업의 놀라운 가능성을 캐치해냈다.
결과적으로 누가 옳았는지는 이미 역사가 증명했으니 굳이 입 아프게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도 세계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1위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그들은, 그때의 경험을 양분 삼아 진취적인 경영방식을 추구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복희 할머니가 물려주신 선재 장학회는 LK 전자와 LK 물산의 지분을 적게나마 가지고 있기도 했다.
김윤제 회장은 LK의 기업풍토에 걸맞게 유연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부하 직원들에게 자신을 회장이라는 호칭이 아닌 YJ, 혹은 김윤제 치프라고 부르라고 지시했다는 것이 언론에서 잠시 회자되기도 했다.
“사석에서 뵐 기회가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사실 정말 궁금했거든요. 고왕 그룹의 백기사가 도대체 누구인지.”
“쟁쟁하신 회장님들에 비하면 정말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경력뿐입니다. 궁금해하셨다니 제가 민망스럽습니다.”
“어떻게 안 궁금할 수가 있겠습니까.”
김윤제 회장은 싱긋 웃더니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렇게 욕심 많은 윤일중 회장의 입을 다물게 만든 사람이, 그것도 아직 33살밖에 안 되었다면 호기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그는 남들의 주의를 딱 끌지 않을 그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여하튼.”
다시 몸을 제자리로 돌린 김윤제 회장은 자신의 슈트 깃을 양손으로 매만졌다.
“앞으로 한경회에서 뵐 수 있겠군요.”
“한국경제인연합회 말씀이십니까? 글쎄요. 윤일중 회장님은 한경회 회원이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에게는 어디서도 연락이 없었습니다.”
“그래요···”
김윤제 회장은 잠시 턱을 매만졌다.
“동종업계의 상인들이 모이는 것은 매우 드물지만, 모였다 하면 음모를 꾸민다.”
“예?”
그의 말뜻을 헤아릴 수 없었던 내가 반문을 했다.
김윤제는 씩 웃으며 나에게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한 말입니다. 음모를 좋아하신다면 함께 하시죠. 제가 다음 회기 때 한 회장님의 가입을 위해 안건을 내보겠습니다.”
감사하다고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을 때, 김윤제 회장은 고개를 몇 번 끄덕여 보이곤 총수들의 무리로 섞여들었다.
그렇게 누군가가 와서 시간이 되었다고 말해주길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었을 때였다.
그저 멍하게 시간만 보내고 있기가 아쉬웠기에 머릿속으로 준비했던 것들을 정리해보았다.
제기랄.
쉽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정신을 한곳에 모으려 노력할수록 마음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흩어지기만 했다.
하기야 이렇게 긴장을 해본 적이 언제인지.
수능시험을 보던 날?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고백하던 때?
아니면, 구직에 대한 간절함으로 면접관의 입만을 바라보던 취준생 시절?
내가 살아온 그 어느 시절을 돌이켜봐도 지금처럼 거대한 계획을 앞에 둔 적은 없었다.
두렵고 떨리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리라.
문득 고윤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 눈을 감고 천천히 호흡을 해보시겠습니까. 잠깐이라도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들숨과 날숨에만 집중하시는 겁니다.
처음 만난 날, 고윤아는 나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을 전해주었었다.
이제는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된 그녀는 진실의 무게에 힘들어하는 나에게 잠시라도 머릿속을 전부 비워보라며 다정하게 말을 했었다.
고윤아가 그때 내게 해주었던 말처럼 눈을 감고 몸의 긴장을 풀었다.
내 몸을 드나드는 호흡의 흐름을 느끼며.
그러자 비로소 풍선처럼 높게 떠 올랐던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장은수 회장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일까.
혹시라도 이 자리에 참석 못 할 다급한 일정이라도 생긴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이 자리가 간절하고 중요했던 것은 나 뿐만이 아니었을 테니까.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장은수 회장이 고윤아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수도 있다.
애초에 이렇게 세상에 내 이름을 알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던 나다.
그 작은 계기가 인생의 방향을 급격히 틀어버린 것이다.
결국 오늘 우리의 만남은 장은수 회장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객실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젠가는 꼭 한번 마주치겠구나 싶었던 남자.
그가 신발을 벗고 천천히 들어오는 모습이 마치 슬로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같았다.
장은수 회장.
그가 드디어 나타난 것이었다.
길게 찢어져 날카로운 눈.
굳게 다물어져 있는 가는 입술.
이미 얼굴쯤이야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확실히 선이 굵은 은호 형과는 전혀 다른 인상이었다.
장은수의 눈이 입구에서 가장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던 나를 향했다.
그 역시 나를 바로 알아보았을 것이다.
우리의 시선이 교차한 것은 아주 잠시였지만, 영원처럼 느껴졌다.
‘당신이군요.’
‘너구나.’
서로를 향해 인사는 없었다.
장은수는 나를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장 회장! 어서 오시게.”
대한민국 재계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남자가 도착하자 회장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나에게 말이라도 몇 마디 더 붙였던 김윤제 회장도 다르지 않았다.
“회장님, 오랜만입니다. 얼굴이 더 좋아지셨네요.”
“좋아지기는··· 김 회장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는 버릇은 여전하네.”
“티 납니까? 하하하.”
장은수 회장과 김윤제 회장은 친숙하게 악수를 나눴다.
“그나저나 어제 야구 보셨습니까?”
“야구? 무슨 야구.”
“LK 브루어스와 태상 로열스 경기요. 우리가 태상을 8 대 2로 아주 혼을 내주었는데.”
김윤제 회장이 흐흐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깟 공놀이··· 그렇지 않아도 성적도 안 나오는 야구단, 사겠다는 사람만 있으면 넘겨버렸으면 좋겠어.”
“아이고, 프로 스포츠의 꽃인데요. 그 태상 그룹이 야구단 하나 없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이 웃습니다.”
“웃으라지! 난 세상 사람들에게 박수받겠다고 기업을 하는 것이 아니니까.”
속마음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내뱉는 장은수를 보니 그의 오만함에 가까운 강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어느새 회장들의 중심에는 장은수가 서 있었다.
퍽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다른 회장들도 보통이 아닌 걸물들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가신들에게 둘러싸인 황제처럼 장은수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직 나만이 태양계에서 가장 먼 해왕성처럼 외따로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만 있었을 때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장은수 회장이 이곳에 나타나자 문득 오기가 생겼다.
나는 무리를 향해 발을 옮겼다.
갑자기 자신들의 거리 안으로 내가 불쑥 들어오자, 회장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 시선에는 장은수의 것도 섞여 있었다.
“장은수 회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한영수라고 합니다.”
나는 장은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는 몇 초간 묵묵히 내 손을 바라보기만 했다.
“반갑소. 장은수요.”
민망할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장은수 회장은 나의 손을 잡았다.
나머지 회장들의 눈이 나와 장은수의 손에 몰렸다.
우리 둘 사이의 사정을 전혀 알리 업는 그들은 ‘그래도 저 젊은 놈이 태상의 회장에게는 먼저 인사를 하는구나’라는 표정이었다.
“한 회장에 대한 말은 내가 많이 들었소. 정말로.”
그는 정말이라는 단어에 유난히 힘을 주어 발음했다.
“저도 오늘 회장님과는 초면이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알았던 분을 만나는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래전이라···”
장은수 회장의 한쪽 입술이 비죽이 올라갔다.
차가운 인상을 더욱더 냉소적으로 만드는 웃음이었다.
“그나저나, 오늘 자리가 한 회장에게는 좀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텐데.”
당연하지만 날 걱정해주는 어조가 아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네까짓 게 끼어들은 것이냐.
이것이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장은수의 본마음이었을 것이다.
나는 장은수 회장의 말을 태연하게 받아쳤다.
“예. 맞는 말씀입니다. 쟁쟁하신 회장님들에 비하면 저야 뭐··· 하지만, 한국 재계의 거목들을 이리 직접 뵙고 귀동냥이라도 하면 많이 배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입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타오르는 불을 품고 장은수 회장을 바라보았다.
“비록 저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우리 회사의 직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카타르의 왕자를 만나기 위해 이 자리에 다들 모이신 것 아닙니까? 카타르에서 최근에 가장 크게 이름을 알린 것은 바로 고왕입니다.”
허.
장은수는 나의 말에 짧은 탄식으로 반응했을 뿐이다.
그와의 기 싸움은 새로운 인물의 등장으로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객실 문이 열리고 하얀색 구트라를 쓴 왕자의 스텝이 모습을 보였다.
“Gentlemen, I'm sorry. The prince is all set. Please move with me. (왕자님이 모든 준비가 끝나셨습니다. 같이 이동하시겠습니다.)”
대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