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48화 (142/200)

148. 전초전을 앞두고

한 남자가 불안한 눈으로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의 끝에는 앨런 오닐이 있었다.

남자는 체구는 몹시나 건장했다.

하지만 정돈되지 못한 시선 처리는 그 덩칫값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남자의 이름은 오동식.

40대 중반을 넘어서 이제 50을 향해가고 있는 그는 ‘시큐캅’이라는 한 보안 업체의 대표였다.

시설관리와 특수경비, 호송 등 경호 서비스업과 주차장 운영, 소방 기구의 제조를 병행하고 있는 시큐캅은 직원 수가 천 오백 명 정도의 코스피 상장 회사였다.

“사실, 우리 회사의 COO로서 저는 시큐캅의 M&A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입니다. 한국에서는 지금 같은 상황에 대해 뭐라고 말을 하던데··· 그래, 떨어지는 칼날은 잡지 말라고 하지요? 정말 좋은 격언입니다.”

누가 봐도 초조해 보이는 오동식과 달리 다리를 꼬고 몸을 편안하게 소파에 기대고 있는 앨런 오닐에게서는 여유가 넘쳐흘렀다.

오만방자한 성격과 거리가 있는 앨런이 이런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눈앞에,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가 주눅이 들길 원했다.

사무실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일부러 자신의 화려한 이력들이 커다란 활자로 찍어있는 출력물을 액자에 걸어놓은 것도 같은 취지.

유치하다면 유치한 방법이었지만, 효과는 제법 쏠쏠했다.

상대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앨런.

그리고 그 시선을 피해 연신 눈동자를 굴리는 오동식.

오동식 대표가 이리도 위축이 되어 있는 데는 사실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최근 계속해서 내림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시큐캅의 주가가 단단히 한몫한 것이다.

외인들로부터 시작된 급작스러운 습격.

가뜩이나 좋지 않은 장에, 공매도가 거세게 회사를 때려대니 시큐캅의 주가는 시퍼렇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참다못한 개미들의 이탈이 시작할 때쯤, 시큐캅 앞에 BH 인베스트먼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보안 업체를 인수하겠다는 대표님의 의지가 어찌나 강하신지··· 저야 salaried worker에 불과한데, 별 수 있겠습니까. 일단 돈 이야기부터 하시죠. 제가 제시한 금액이라면 프리미엄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지금 시큐캅의 주가를 생각하면 더욱더 말이죠.”

“··· 하지만 저는 회사를 다른 사람의 손에 넘길 생각이 없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아니요.”

앨런은 단호하게 오동식의 말을 끊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대표님이 지금 저를 만날 일도 없었겠지요. 삽시간 만에 주가가 반토막 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 증권사 리포트들도 시큐캅에 대해 전부 매도하라고 소리치고 있지 않습니까. 침몰이 시간문제입니다. 구명선 타셔야죠. 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대기업인 고왕의 우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살길입니다.”

오동식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이런 자리에서 입을 꾹 다물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그는 앨런의 말에 대해 반박할 수 있는 그 어떤 논리도 찾지 못했다.

“간판에 이름이 좀 바뀐다고 회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대주주의 위치가 바뀌는 것이니 제약이야 생기겠지만, 업종의 특수성을 고려해 기존의 경영권에 대해서는 가능한 최대한도로 보호해드리겠습니다. 제가 괜한 허언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영수 대표의 뜻입니다.”

후━

오동식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제안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결정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고민 좀 해보겠습니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하나만 더 이야기해야겠습니다.”

둥근 안경 뒤로 앨런의 눈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뿜어져 나왔다.

“우리가 시큐캅에 이렇게까지 온건한 스탠스를 취하는 것은 대표님이 건실한 경영자이고, 시큐캅이 내실 있는 회사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또 이 BH 인베스트먼트 대표께서 인수과정에서 불협화음이 없길 바라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제안에 협상의 여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앨런의 얼굴은 석상처럼 딱딱했다.

“만약 창구를 그대로 닫아버리신다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저는 더 쉬운 길을 알고 있습니다. 그때는 더 이상 오동식 대표님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오동식의 겨드랑이와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시큐캅과는 규모 면에서 비교도 할 수 없는 그 고왕 건설조차 깔끔하게 먹어 치운 BH 인베스트먼트 아닌가.

만약 저들이 작정하고 탐욕스럽게 나온다면 오동식과 시큐캅은 도저히 버텨낼 도리가 없으리라.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보겠습니다.”

“부디 긍정적인 방향이길 바랍니다. 앞으로 자주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앨런은 자리에서 일어나 오동식에게 악수를 청했다.

오동식은 앨런과 악수를 한 뒤 힘없이 걸어 나갔다.

곰 같은 덩치의 남자는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이 앞서 들긴 했지만,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앨런 오닐은 일이 자기 뜻대로 되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수많은 경험 속에서 체득하게 된 예지 같은 것이랄까.

한영수는 BH 인베스트먼트의 이름으로 보안 회사를 하나 인수해주길 원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한 전권을 앨런 오닐에게 맡겼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경계 없이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던 그가 대한민국이라는 좁은 땅덩이에 묶여 있다니.

더욱이 글로벌 기업들만을 상대하던 앨런 오닐이 시가총액 3천억짜리 회사 대표와 기 싸움이나 하고 있다는 게 더더욱 그랬다.

단지 자신과 피부색이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앨런 오닐에게 갑자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생겼을 리가 없다.

애초에 동아시아 지부에서 제법 긴 시간 동안 일해온 그가 아닌가.

처음에 앨런은 자신을 괴롭혔던 오해에서 벗어난 해방감이 이 땅에 머물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어머니의 넋을 얼마간이라도 위로해드리는 것이 자신이 할 도리라고 여겼다.

은인과도 같은 한영수가 고왕 건설을 완전하게 차지하게 될 때까지.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딱 그때까지만 한국에 머물자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고왕 건설 건이 완전히 정리되었음에도 앨런은 여전히 BH 인베스트먼트에서 짐을 싸지 않았다.

앨런은 그제야 알게 되었다.

자신이 한국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에는 한영수가 있다는 걸.

그는 한영수에게 반해있었다.

조금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의심한 적이 없으니, 앨런이 한영수에게 가진 마음은 성(性)적인 것과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정일까?

아니.

앨런이 느끼기에 이것은 일반적인 우정과도 달랐다.

할 수만 있다면 앨런 오닐은 한영수의 속을 뒤집어서 보고 싶었다.

불가능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낼 것 같은 저 젊은 남자의 속 안에 뭐가 웅크리고 있을지 너무나 궁금했다.

이것은 얼마 전의 일.

한영수는 앨런 오닐과 이야기를 하다가 그로서는 도저히 생각하지도 못했을, 놀라운 소리를 했다.

“미스터 한. 정영목이 구속이 되었군요. 실상 이건 대한민국 수사기관이 아니라 미스터 한이 잡아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검찰이 영광 산업개발의 정영목을 긴급체포했다는 기사를 보고 앨런이 화제를 꺼냈다.

그의 말을 듣고도 왜인지 한영수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의 공적이 언론에 오르내리면 우쭐한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영수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혹여라도 ‘별일 아니었다.’라는 식의 겸양이라도 보여주려나 싶었지만, 잠시 후 한영수의 입에서 나온 말에 앨런 오닐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 앨런, 영광 산업개발 말입니다.”

무슨 말을 하려기에 저렇게 뜸을 들이나 싶을 때,

“셰일 가스 아이템 자체는 좋지 않습니까? 만약 정말 실현 가능하다면···”

허.

앨런 오닐은 절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 편의 사기극에 불과한 사건 속에서도 취할 것을 찾는단 말인가?

앨런이 입을 벌리고 차마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도 한영수의 구상은 계속되었다.

마치 꿈꾸는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선.

“확인해보니 수단 공화국이라는 나라에 셰일 가스가 다량 매장되어 있는 건 진짜더군요. 고왕에도 플랜트 사업부가 있습니다. 만약 에메랄드 시티 수주가 성공적으로 성사되면, 그쪽으로 힘을 기울여 보는 것도···”

앨런은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물론, 가능하지요.’라고 말할 뻔했다.

그는 간신히 이성을 되찾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 어떤 나라도 자국의 자원을 사기업에 쉽게 넘기는 법은 없습니다. 더욱이 셰일 가스는 생산원가가 배럴당 36달러입니다. 원유의 세 배가 넘지요. 셰일 가스업계를 독점하다시피 하는 미국의 기업들이야 규모의 경제가 가능하지만, 고왕이 어디 그들과 같습니까.”

“그렇군요. 그래도 미래가치를 생각하면 사업성은 충분히 있다고 보는데··· 그것 또한 사람의 일 아니겠습니까. 고민하다 보면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한영수는 그런 인간이었다.

몽상가의 허풍 조차도 현실로 만들 것 같은 인간.

앨런 오닐은 한영수의 그런 점에 강한 끌림을 느끼고 있었다.

한영수가 자신에게 맞긴 소임을 다하기 위해 앨런은 한국의 보안 업체들을 깐깐하게 살펴보았다.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영업이익이 먹음직스러운 회사들은 애초부터 대기업의 계열사로 출발했거나, 그들에게 인수당한 후였다.

그렇다고 중소기업들 위주로 살펴보자니 너무나 영세하기만 했다.

직원 수가 채 100명도 되지 않는.

그런 회사들은 인수해봐야 크게 재미 볼 것이 없다.

그러다 그의 레이더에 걸려든 것이 시큐캅.

가히 중견기업이라고 부를 만했고, 부채 비율도 적절했다.

소폭이나마 매년 매출도 꾸준히 늘고 있었다.

문제는 이렇게 정상적으로 잘 돌아가고 있는 회사를 어떻게 손안에 넣을 것 인가였다.

시큐캅을 강제로라도 위기 상황에 몰아 넣어야 했다.

앨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시큐캅은 코스피에 상장되어있었다.

그리고 앨런은 시큐캅을 흔들기 위해 지저분한 작전을 하나 동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국의 주식 장을 흔히 기울어진 운동장에 비유하곤 한다.

이 불공평한 경쟁을 만드는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공매도.

아무리 순기능이 있다지만, 외국인과 기관에만 허용된 공매도는 개미 투자자라면 누구나 이를 갈 수밖에 없다.

앨런은 그 점을 이용했다.

자신과 연줄이 있는 외국인 투자자들을 아주 은밀하게 동원했다.

앨런과 함께라면 언제 공매도 포지션을 정리해야 할지 정확히 알 수 있는 그들은 주저 없이 시큐캅의 공격에 나섰다.

앨런 오닐이 시키지 않아도 그들은 알아서 악재에 가까운 뉴스들을 퍼트렸다.

그리고 시큐캅이 폭삭 주저앉기 일보 직전에 앨런은 시큐캅의 오동식 대표와 접촉을 시작했다.

앨런이 오동식 대표에게 제시한 금액은 아무리 프리미엄을 단단히 쳐준다고 해도 정상적으로 회사가 돌아갔을 때의 인수 예상 가격에는 턱없이 못 미치는 것이었다.

만약 한영수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시큐캅의 인수에 극구 반대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앨런은 모종의 음모에 대해서는 한영수에게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어쩌랴.

돈의 싸움에서는 상식과 정의만이 정답을 아닌 것을.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앨런 오닐이었다.

그래도 가능하다면 한영수는 자갈이 잔뜩 섞여 있는 흙길을 맨발로 밟지 않았으면 하는 게 앨런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내일이구나.’

내일은 한영수가 고왕의 대표로 카타르의 왕자를 접견하는 날이었다.

그야말로 에메랄트 시티 프로젝트의 전초전.

‘이번에도 틀림없이 놀라운 결과를 얻어서 돌아오겠지. 미스터 한이라면.’

앨런은 자신의 집무 책상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라도 한영수에게 전해 줄 정보가 하나라도 더 있을까 찾아보기 위해서.

첫 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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