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망치와 못
장은수의 손가락이 건반을 두들기면, 피아노는 아름다운 음률로 손가락의 움직임에 보답을 했다.
이윽고 건반 위에서 손가락의 동작이 멎고, 자신의 머릿속 악보의 마지막을 완성한 장은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누가 들어도 손뼉을 칠 만한 훌륭한 연주였다.
사실 취미라고 해도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이 악기를 다룬 경력이 무려 30년이니,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장은수에게서 어떤 거장의 풍모가 보인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으리라.
여기는 장은수가 자주 가는 바.
그가 방문했을 때 항상 그랬듯이, 오늘도 손님이라곤 장은수뿐이었다.
장은수가 방문을 예고하자 사장은 진작부터 간판에 불을 꺼놓은 참이었다.
뭐, 누가 이곳을 들어오려고 해도 입구에서 장은수의 경호원들에게 바로 제지를 당했겠지만.
짝짝짝━
이 무대의 유일한 관객이었던 바텐더는 연주가 끝나자 큰 박수로써 자신의 감상을 장은수에게 열렬하게 전했다.
장은수는 피아노 앞에서 일어나 바 테이블을 향해 느리게 발걸음을 옮겼다.
“조율이 잘 되어 있군.”
“감사합니다. 회장님.”
장은수에게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는 남자는 이 가게의 사장이기도 했다.
보통 가게에 진열된 물건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저 피아노 역시 아무런 관리를 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거나, 이 손님, 저 손님의 손을 탔을 것이다.
그런 피아노가 장은수의 칭찬을 끌어냈다는 건 바텐더가 세심히 저 건반 악기를 보살폈다는 뜻이며, 그가 음악에 진심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쇼팽 녹턴 OP. 9 군요.”
“맞아. 2번째 곡이지. 피아노는 정말 좋은 악기지. 인류는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에게 큰 빚을 지고 있어.”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제가 한번 여쭤봐도 될까요.”
이곳의 바텐더는 자연스럽게 손님의 대화를 끌어내는 비상한 재주가 있었다.
그것은 장은수가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편안하게 말을 할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물론 바텐더의 칵테일 솜씨도 일품이긴 했지만.
“누구나 배울 수 있지만, 마스터하기까지는 굉장히 시간이 오래 걸리지. 그 점이 매력적이야. 마스터의 가게에 있는 저 피아노처럼 조율이 잘된 녀석은 내 손가락 움직임을 정직하게 표현해준다는 것도 마음에 들고.”
“정직하게 표현해준다라··· 피아노 연주 실력만큼이나 말씀도 참 좋습니다. 마치 하늘이 내신 분 같습니다. 회장님은.”
순간, 장은수의 눈가가 씰룩거렸다.
은은한 조명 아래서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장은수의 표정에 바텐더는 자기 말에 실례가 있었는지 곰곰이 되짚어 보아야만 했다.
물론 바텐더의 말에 실수가 있었을 리 없다.
직업적으로 상대하는 것을 떠나서 바텐더는 자신의 작은 가게를 사랑해주는 대한민국 최고 재벌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고로, 장은수에게 전하는 바텐더의 말은 단순한 아첨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방금 자신의 연주에 만족하며 관조적인 기분에 한껏 젖어있던 장은수.
그의 기분이 와장창 깨져버린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바텐더의 말에 어떤 남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한영수.
장은수는 오늘 놀라운 뉴스를 전해 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뉴스는 놀라움보다는 분노에 가까운 불쾌함을 유발했다.
카타르 도하에 파견된 고왕 건설의 직원이 자신들이 묵고 있던 호텔의 붕괴 전조를 발견, 거의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던 커다란 재앙을 막았다는 지랄 같은 소식이었다.
“전조 증상과 건물에 맞지 않는 시공법이 사용된 것을 보고 확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전에 인명 피해를 막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왕 건설의 직원은 한국어로 겸손하게 현지 방송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영리하게도 그 겸손함 속에는 고왕 건설에 대한 홍보가 은근슬쩍 섞여 있었다.
카타르의 총리는 호텔의 설계를 맡은 건설사와 시공사 측에 엄정히 책임을 묻겠다는 성명을 발표하는 한편, 한국에서 온 영웅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는 뜻을 전했다.
그들이 그 호텔에 숙박하고 있었던 것은 모두 신의 뜻이었다며.
종교가 없는 장은수였기에 신의 뜻 따위야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하필 그 시간, 그 장소에 한영수의 고왕 건설이 나타났단 말인가.
‘그 사생아 새끼야말로 하늘이 돕지 못해 안달이라도 난 것 같잖아.’
한영수의 행보를 보자면 단순히 운이 계속되었다는 걸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내쫓은 자들을 고왕 건설에 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남들 앞에서 차마 내색할 수 없었지만, 경악을 금치 못했다.
결국 장은수는 아버지의 측근을 내모는 데 성공했다는 만족감에 취해 안일하게 굴었던 자신을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왕 버렸으면 쓰레기통까지 깨끗하게 비웠어야 했는데···’
자신의 출생을 비밀을 알고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놈을 보며 아주 멍청하거나, 굉장히 똑똑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던 장은수였다.
그런데 이게 웬걸.
한영수는 장은수가 예측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몸을 움직였다.
장은수는 그 불확실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장은수의 입장에서 한영수는 아름다운 조화를 해치는 툭 튀어나온 존재였다.
장은수가 고왕 건설 직원들이 카타르에 체류하고 있던 이유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한영수, 네가 감히 이 판에 숟가락을 올리겠다고?’
그래. 한영수.
네 놈이 튀어나온 못이라면 나는 망치다.
네가 용을 쓰면 쓸수록 오히려 내 눈에 더 잘 보일 뿐이다.
못은 절대 망치를 이기지 못한다.
그게 세상에 의해 정해진 쓸모이니까.
그때였다.
바텐더의 눈이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회장님, 사장님께서 오셨습니다.”
출입문을 열고 바 테이블을 향해 또각또각 다가오는 사람의 얼굴을 알아본 바텐더가 장은수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빠.”
장은우였다.
장은수는 여전히 시선을 정면에 둔 채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여동생에 대한 인사를 대신했다.
“사장님.”
바텐더는 원하는 것이 있으면 뭐든지 들어줄 수 있다는 눈으로 장은우를 바라보았다.
그에겐 조금 아쉽게도, 장은우는 바텐더에게 원하는 것이 없었다.
“난 괜찮아요.”
장은우는 바텐더에게 손바닥을 들어 올려 보였다.
눈치가 빠른 바텐더는 두 사람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곤, 자리를 비켜주었다.
장은수가 장은우를 호출한 것에는 늘 그랬듯이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직도 장은수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과 아주 깊은 관련이 있었다.
“태상 백화점. 지분을 팔아넘겼더구나.”
‘··· 벌써?’
장은우는 오빠의 기민한 행보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이 인간은 잠도 안 자나?’
인정할 건 인정할 수밖에.
제 회사도 운영하면서 태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빠삭한 장은수에게는 분명 커다란 무리의 우두머리가 될 소양이 있었다.
비록 그 소양의 뿌리가 어둠과 음모에 가깝다는 결함이 있기는 했지만.
“최화란이라는 사람. 종로에서 유명한 사채업자더군. 부끄러운 줄 알아라. 지저분한 돈 만지는 사람을 가업에 끌어들여?”
“돈은 그냥 돈이지, 깨끗하고 더러운 게 어딨어. 그리고 아빠도 사채업자랑 남매처럼 지냈다는 걸 잊은 모양이네. 그 명동의 차 여사 말이야.”
차 여사의 이름을 듣자 장은수는 또 속이 쓰려왔다.
자신이 놓친 것을 전부 받아먹고 있는 한영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은우의 태도가 조금 이상했다.
얼마 전만 해도 장은수 앞에서 꼼짝 못 하던 그녀가 아니었다.
잠시 언더락 잔을 돌리던 장은수는 동생의 돌변에 대한 이유를 쉽게 짐작해냈다.
“··· 도박 건을 어떻게 네 선에서 해결했나 보구나.”
“그래. 뒤탈 없도록 조용히 정리했어.”
“어깨가 아주 하늘 끝까지라도 솟겠군. 어디 스폰서 검사라도 하나 구했나? 돈으로 사람 사는 거 편할지는 모르겠지만, 쉬운 일은 아니야. 그런 족속들은 언제 입 쓱 닦고 자기 살겠다고 내뺄지 모르니까.”
“말투가 어쩐지 뭔가 아쉬워하는 눈치네. 왜? 설마하니 여동생 약점이라도 하나 잡아놓고 싶었어?”
“설마.”
장은수는 피식 웃었다.
“그보다, 조심성 없는 너야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최화란이, 사생아 놈이 데리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거는 알고 있는 거야?”
“··· 알아.”
장은수 입가에 간신히 떠올랐던 미소가 순식간에 지워져 버렸다.
“알면서도 지분을 넘겨줬다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장은수의 눈.
저 눈이야말로 장은수의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장은우는 목으로 침을 꿀꺽 넘겼다.
“난 한영수, 그 애한테 아무런 관심이 없어. 최화란이랑은 그저 개인적으로 거래를 조금 한 것이고··· 그리고 오빠는 세상일은 다 아는 것처럼 말하면서 헛똑똑이네.”
장은수는 동생을 향해 턱 끝을 치켜들었다.
어디 더 말해보라는 무언의 제스처.
“나도 최화란한테 들은 거야. 자기가 한영수와 같이 일을 했었다고. 그런데, 최화란 말이야. 한영수랑 영 좋지 못하게 헤어졌던데?”
“··· 좋지 못하다.”
“그래. 한영수, 그 애가 투자 회사 차릴 때 최화란에게 돈을 받아 썼나 봐. 그리고 오빠도 알다시피 고왕 건설 인수로 크게 이득을 보았고. 그리고선 최화란에게 푼돈 조금 쥐여주고 내쫓아 버렸다던 걸.”
톡, 톡, 톡━
장은수는 바 테이블을 손가락을 두들겼다.
그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동생도, 최화란이라는 자도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다.
그러고 보니 최근 BH 인베스트먼트의 이사 명단에서 최화란이 빠진 것은 그도 확인했던 터다.
“손절이라. 왜 그랬을까.”
“그 이유야 누구보다도 오빠가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가만 보니까 그 애, 오빠랑 닮았네. 걔도 지저분한 돈 쥐고 있는 게 싫었나 보지.”
하하━
장은우의 말을 듣고 장은수는 짧게 웃었다.
“··· 제 놈도 장영복의 자식이 맞다 이건가.”
‘한영수에게 내침을 당한 사채업자라. 나중에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겠어.’
마치 이종현을 비롯해 장은수가 내친 자들을 한영수가 받아들였듯이.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장은수는 기분이 다소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오빠도 참 지독하다. 겨우 이 이야기하자고 날 보자고 한 거야? 어쨌든 태상 백화점의 오너는 나야. 설령 오빠가 태상의 총수가 된다고 해도 백화점 가지고는 날 아랫사람처럼 대할 수는 없어.”
“은우, 네가 나를 걱정시키니까.”
“어머, 총수가 아니라 아빠 흉내를 내는 거였네.”
뼈가 있는 말에도 장은수는 그저 한번 웃고 말았다.
그리고 장은우는 오빠의 태도가 변한 것을 보며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실, 그녀는 한영수가 말해준 것을 그대로 읊었을 뿐이다.
과연 한영수의 예측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어 평소라면 집요하게 지분권 변동에 대해 물고 늘어졌을 장은수가 그에 대해 더 입을 열지 않았다.
‘한영수가 말하길 오빠가 최화란을 한번 만나고 싶어 할 거라고 했지. 어디 한번 보자.’
“회장님. 말씀 다 하셨으면 저는 그만 일어나봐도 될까요?”
자신의 클러치 백을 집어 들며 장은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우야.”
장은수는 잘 가라는 말 대신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장은우는 선 채로 강퍅한 얼굴의 장은수를 바라보았다.
“넌 내 편이 맞지?”
“오빠.”
장은우, 그녀는 힘을 주어 말했다.
“나도 아빠의 자식이야. 내가 모든 걸 가질 수 없다면 승자의 편이 되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겠지.”
장은우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비록 한영수와의 약속이 있었지만, 호텔 체인을 넘겨주겠다는 장은수의 제안도 아직 유효했으니.
“승자의 편이라··· 그것 참 믿음직스럽고 확실한 대답이군.”
그렇게 장은우가 뒤를 돌아 밖으로 빠져나가야 할 때였다.
장은수는 한 번 더 자기 동생을 불러 그녀를 멈춰 세웠다.
“그 최화란이라는 사람. 언제 기회가 되면 나도 좀 봤으면 하는데.”
순간 장은우의 팔뚝에는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혼자 걷지 말고, 함께 걸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