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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억을 상속받았다-144화 (138/200)

144. 너는 아빠와 닮았어. 하지만···

누구나 살면서 단 한 번쯤이라도 이런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유난히 말이 잘 터지는 날이 있어 모두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그런 날이면 나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가 포말처럼 퍼져 공간을 가득 채우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지고, 누구든 웃기고자 하면 웃기고, 울리고자 하면 울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샘 솟는다.

나에겐 지금이 그런 순간이었다.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며 꼿꼿한 자세를 하고 있던 김지수 검사의 팔짱이 서서히 풀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고백을 받은 것처럼 그의 입이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오히려 제가 밑지는 장사 아닌가요? 저보다 검사님이 잘 아시겠지요. 우리 형법은 속인주의를 채택하고 있다는 걸. 내국인이 외국에서 범죄를 저질러도 우리 법으로 처벌을 하는··· 일단 이걸로 정영목을 잡아놓고, 여죄를 터시지요. 영광 산업개발 수사요.”

하하하━

김지수 검사는 호탕하게 웃었다.

입을 어찌나 크게 벌렸는지 목젖이 다 보일 지경이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고, 공자 앞에서 문자쓰는 짓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김지수 검사는 나의 당돌한 발언을 결코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좋습니다. 이걸 못 받아먹으면 검사질 때려치워야지. 딜 봅시다. 어디 있습니까. 정영목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밥상을 다 차려줬는데 당연히 숟가락을 들어야지.

일의 방향이 가닥이 잡히자 안도를 했는지, 내 옆에서 장은우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쿨 거래 좋습니다. 그런데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저는 더 드릴 게 있는걸요. 이건 흔쾌히 제 제안을 받아주신 것에 대한 보너스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돈이라는 것은 어찌나 힘이 세던지.

정영목을 쫓으며 나는 그 돈의 힘을 빌려 아주 편안하게 탐정 놀이를 즐길 수 있었다.

내가 알아본바, 원래 정영목은 평범한 한국인 유학생에 불과했다.

그랬던 그가 어쩌다 지금의 이런 모습이 되었을까?

거기에는 계기가 있었다.

물가가 만만치 않은 일본에서 생활비라도 벌어보겠다며 네트워크 마케팅, 소위 말하는 다단계에 빠지게 된 것이 그 단초였다.

어려서부터 말재주가 보통이 아니었던 정영목은 제법 물건들을 잘 팔아치웠다.

평범한 직장인들 한 달 월급 이상을 일주일 만에 버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말빨로 물건을 팔아치우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회사에서는 자꾸만 물건을 넘기는데, 팔지 못한 재고는 방 한 쪽에 계속 쌓여만 갔다.

빚이 자꾸만 늘어났다.

그렇게 몇 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영목은 도저히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부채를 떠안고 있었다.

정영목을 모기 피 빨 듯 쪽쪽 빨아먹은 다단계 회사는 어느 날인가 말 그대로 증발을 해버렸다.

보통의 피해자라면 이 상황까지 왔을 때 의지가 있다면 가족을 비롯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우선일 것이다.

아니면 회생 절차와 같이 구제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거나.

반대로 의지가 없는 자라면 아예 삶을 포기해 버릴 것이고.

하지만 정영목은 그 보통의 피해자들과는 조금 달랐다.

자신이 네트워크 마케팅에 몸담으면서 지켜본 노하우들을 토대로 이 피라미드 사기 행각을 직접 하기 시작했다.

‘동방 물산’이라는 유령회사나 다름없는 회사를 하나 차리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한국인 커뮤니티가 활성화되지 않은 지역을 거점으로 잡고, 정영목은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미야베 카즈히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냈다.

“일본 현지에서는 카리스마 카즈히로라고 꽤 유명했던 모양입니다. 당시 일반 회원들은 정영목의 얼굴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다이아 급 이상의 상위 회원들에게만 얼굴을 내비쳤던 모양이에요. 근데 사람들을 장악하는 능력이 보통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이 사진을 제공한 사람은 미야베 카즈히로··· 그러니까 정영목을 아직도 철저하게 신봉하고 있더라고요.”

일본에서 크게 한탕 땡긴 정영목은 그 자금을 바탕으로 한국에 들어와 작전 세력들과 결탁하게 된다.

정영목은 자신의 특기를 살려 수많은 사람을 현혹했고, 그의 밑에 바람잡이들은 지역을 나눠 전국 방방곡곡에서 투자 설명회를 열었다.

그 와중에서도 작전 세력들은 차명 계좌로 주식을 분산시켜 언제든지 처분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영광 산업개발에 대해 의심하던 개미들까지 전부 달라붙어 거래량이 폭발적으로 터질 그 날만을.

그 과정에서 정영목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재계의 인사들과 끈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인맥을 만들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 노력은 실제로 유효했으며, 일개 사기꾼을 혁신가 혹은 건실한 청년 사업가로 만들어 주었다.

“제가 더 큰 거 잡게 해드리겠다고 했죠? 이것 좀 보시지요. 정영목이 끝이 아닙니다. 이게 검사님에게 드리는 진짜 선물입니다.”

나는 필름으로 인화된 사진 몇 장을 꺼내 김지수 검사에게 건넸다.

사진을 넘겨보던 김 검사의 동공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익숙한 얼굴이 몇 보이시나 봅니다. 정영목이 여기저기 약을 많이 쳤더라고요. 뭐 당연히 저 사람들이야 정영목과의 관계를 철저히 부정하겠지만, 어떻게 엮는지는 검사님의 솜씨 아니겠습니까?”

김지수 검사는 사진을 자신의 슈트 상의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렇게까지 판을 다 짜서 왔다니···”

“저희가 약속한 거래를 떠나, 그냥 이렇게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돈으로 사람들 피눈물 흘리게 만드는 놈을 더 돈 많은 놈이 재미 삼아 혼내주는 거라고.”

“사실··· 고왕 건설 윤일중 회장이 자기 자리를 맥없이 넘겼을 때 한 회장님이 무슨 협박 동영상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돌았었는데··· 이제야 수긍이 됩니다.”

“이제 잡으러 가시죠. 지금 인천 쪽에 숨어있습니다. 중국으로 가는 밀항선을 탈 모양이에요. 주소는 찍어드리겠습니다.”

* * *

김지수 검사는 양해를 구하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촌각을 다투는 일이다.

상부에 보고도 해야 할 테고 인천 쪽에 공조도 요청해야 할 테니.

기왕에 식사가 남았으니 나와 장은우는 조금 더 눌러앉아 있기로 했다.

“미안해. 널 ‘이 새끼’라고 말한 것. 넌 확실히 ‘저 새끼’랑은 좀 다르네.”

저 새끼가 누구를 말하는지는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그 이름을 내뱉지는 않았다.

“다시는 바보 같은 짓 하지 마세요. 몇 번이고 말했지만 아쉬울 것 하나 없는 분 아닙니까.”

“인정해. 아쉬운 게 하나도 없으니까, 소중한 것도 몰랐던 거지.”

“말이 나왔으니 하는 소리지만, 그래도 오늘 장은우 사장님에게도 아쉽고 소중한 게 하나 있다는 걸 봤어요. 인상 깊었습니다.”

“선배···”

“추억은 추억일 때 아름다운 거랍니다. 그냥 남겨두는 걸로 만족하세요.”

“저 사람. 가정이 있어. 내가 어떻게 다른 생각을 하겠어.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장은우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선배가 우리 집에 찾아왔던 날 말이야. 고작 가난한 대학생에 불과한 그가 대한민국 최고 재벌의 집 앞까지 찾아오기까지 얼마나 무서웠을까. 사실 아까 이야기하지 않은 게 있어. 선배 경비들한테 개처럼 질질 끌려서 쫓겨났어. 그러면서도 계속 소리를 질렀어. 유학 가지 말라고, 자기 옆에 있어 달라고··· 아마 어디 골목에 끌려가서 입 다물라고 흠씬 두들겨 맞았을지도 몰라.”

“...”

“그날 저녁이었어. 아빠가 날 불러 물었어.”

- 유학 가기 싫으냐?

장은우는 허공을 훑으며 장영복 회장의 말을 따라 했다.

“아빠가 무슨 뜻으로 그 말을 했는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그때 내가 조금 용기를 냈더라면··· 난 지레 겁을 먹고 아무 대답도 못 했어. 혹여라도 말 한마디 실수하면 내가 가진, 그리고 가지게 될 것을 조금이라도 잃어버리게 될까 봐··· 그랬던 내가 무슨 염치로 추억을 아름답게 이야기 할 수 있겠어.”

“살면서 선택에 아쉬움이 있는 게 어디 사장님뿐이겠습니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만약 당시에 유학을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면 장영복 회장은 아마도 김지수 검사와의 교제를 허락하지 않았을까?

아니, 허락해야만 한다.

적어도 그가 나의 어머니를 끔찍하게 사랑했다는 것이 진심이라면 자기 자식의 사랑 역시 막아서는 안 된다.

너무나 한 여자를 사랑해서 아무 죄 없는 핏덩이가 끔찍하게 미웠다는 그가 그래서는 안 된다.

“염치없는 건 너한테도 마찬가지야.”

나의 생부, 장영복 회장 생각에 실없이 반찬만 뒤적이고 있을 때였다.

장은우는 갑자기 내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아주 힘들게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날 누나로 불러달라고 하는 건··· 낯부끄러운 소리겠지.”

날 닮은 눈을 가진 여자가 내뱉는 말에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치받쳐 올라왔다.

악바리같이 살아왔다고 자부하지만 역시나 가족을 연상시키는 말은 언제나 나의 마음을 뒤흔들곤 했다.

은호 형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 하지만 아직은.

뚜렷하게 동지 의식을 공유하는 은호 형과는 달리, 아직 장은우 사장과는 끈끈함이 없다.

그녀는 이제 겨우 조금 자기 민낯을 나에게 보여준 것에 불과하다.

장은우 사장 역시 저 말을 순간적인 감정으로 뱉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일시적인 감정은 작은 이해 앞에서도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래. 아직은 아니다.

“제가 도와드린 것에 대해 부채감을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자청한 겁니다. 대신 사장님은 언젠가 저를 한 번만 도와주시면 됩니다.”

내가 누나라는 말 대신 사장님으로 호칭하자, 장은우는 잠시 씁쓸하게 웃으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래. 약속은 지켜. 그런데 도대체 내가 뭘 도우면 되는데.”

“그건 말해드릴 수 없습니다.”

“날 못 믿는 거지?”

“아니요. 믿음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총수 자리를 놓고 벌어질 태상의 지분싸움.

장은우 사장을 이쪽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면, 장은수 회장과도 한번 붙어볼 만은 하리라.

물론 힘의 균형추야 여전히 기울어져 있겠지만.

물론 이 일 하나만으로 장은우 사장이 내 편이 되어주리라는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 간의 약속이라는 것이 이해득실 앞에서 쉽게 무너진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나는 순진하지 않다.

장은수 쪽에서도 틀림없이 장은우 사장에게 달콤한 제안을 약속했을 것이고.

··· 그런데, 나는 뭘 위해 이 비정하고 지저분한 싸움에 끼어들라고 하는 것일까?

장은수가 윤아를 직장에서 쫓아냈기 때문에?

은호 형이 태상의 총수가 되는 것을 돕고 싶어서?

그런 이유로 이렇게까지 한다고?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자라고 있는 어떤 욕망을 눈치채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 닮았어.”

“예?”

순간 생각에 잠겨 장은우의 말을 놓친 내가 그녀에게 반문했다.

“닮았다고. 너. 아빠랑.”

은호 형도 장은우 사장과 똑같은 말을 했었다.

“저는 그분을 모릅니다.”

“우리 아빠를 모르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단 한 명도 없어.”

“지금 사장님이 절 더러 회장님과 닮았다고 말하는 부분은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아는 회장님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닐 텐데요. 그런 점에서 저는 장영복 회장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 모든 것을 다 머릿속으로 짜놓고 사람들을 꼼짝 못 하게 하는 것. 오늘 네가 보여준 것처럼 말이야. 그게 내가 어려서부터 봐왔던 아빠의 모습이야. 하지만···”

장은우는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그 안에서 무언가 반드시 찾아내기라도 하겠다는 듯.

“네가 아빠랑 다른 점이 확실히 하나는 있구나. 아빠는 사람들이 찍소리도 못하도록 입을 다물게 했어. 그건 자식들에게도 마찬가지였지. 그런데 너를 보면 참 이상해. 자꾸만 입을 열게 돼. 저절로 속마음을 말하게 된다고.”

장은우는 들릴 듯 말 듯 조용히 혼잣말했다.

“··· 어찌 보면 네가 아빠보다도 더 무서운 사람이구나.”

인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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