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이야기
사법 거래.
어떤 사건을 해결하는데 정보나 증언을 해주면 그 대가로 형량을 낮춰주거나, 사면해주는 행위.
우리 나라에서 사법 거래가 판례가 있다거나 관례화된 것은 아니지만, 수사 기관에서는 흔하지는 않더라도 실무적으로 종종 사용된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김지수 검사의 면전에 대놓고 사법 거래를 하자고 제안하는 것은 어쩌면 그의 직업적인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우리가 초면이라면.
타고난 성품이 그런 것일까, 아니면 옛 연인이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일까.
김지수로서는 충분히 불쾌할 수 있는 상황이리라.
영화 속의 상투적인 한 장면처럼 그가 주먹으로 식탁을 내려치며 지금 현직 검사 앞에서 뭘 하는 거냐며 대사를 내뱉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지수 검사는 내 예상보다 침착한 반응을 보였다.
마치 자신은 그 조잡한 삼류 영화의 한 배역을 맡을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이.
“은우야 미안하다. 먼저 일어날게.”
김지수 검사는 장은우에게 눈인사를 하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한영수 회장님. 이거 실망인데요. 사람 잘못 찾으셨습니다. 저, 검사로서 알량한 자존심만은 지키고 살았습니다.”
김지수 검사는 속에 있는 감정을 억누르기라도 하듯, 굵은 목소리로 단어 하나하나를 꾹꾹 눌러 말했다.
내 입으로 말하긴 조금 부끄럽다만 장은우는 말할 것도 없고, 나 역시도 세상 사람 누구나 아는 제법 큰 사업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우리 둘을 앞에 두고 당당히 자신의 소신을 말하는 김지수 검사에게 박수라도 보내고 싶었다.
과연 태상의 공주님이 반할 만한 남자라 이건가.
물론, 지금 그는 다른 방향으로 아주 큰 오해를 하는 것 같지만.
“검사님. 잠시만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습니까?”
김지수는 자리에 선 채로 나를 한번, 그리고 안타깝다는 눈으로 장은우를 한번 바라보았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끝까지 들어보시고 일어나도 나쁘지 않을 이야기입니다.”
후━
“··· 선배. 나도 부탁할게. 선배가 생각하는 것처럼 천박한 이야기는 없을 테니까. 알잖아, 나 선배 앞에서 그런 이야기 할 자격 없는 사람인 거.”
장은우가 한 번 더 청을 하고 나서야 김지수 검사는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털썩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짜식··· 죽어도 예전처럼 오빠라고는 안 하는구나. 그래. 이 사람보다는 선배가 듣기는 낫다.”
자, 장은우와 김지수의 첫사랑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이제부터는 나의 무대.
“검사님. 저는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을 곧잘 찾아내는 재주가 있습니다.”
갑자기?
김지수의 표정은 이렇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 재주 덕분에 저는 장은우 사장님과 거래를 하나 할 수 있었습니다. 장 사장님의 도박 건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조건으로.”
“...”
김지수 검사는 팔짱을 낀 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의 말속에서 참과 거짓을 구분해왔을 베테랑 검사의 귀만은 예민하게 열려 있으리라.
“검사 한 분만을 수배해달라고 장 사장님에게 말한 건 저였습니다. 이런 말, 듣기 거북하시겠지만 검찰 쪽에서 움직여줄 사람이 하나 필요했습니다.”
“근데 왜 하필 나를···”
김지수 검사의 눈은 장은우를 향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 눈빛에서 원망의 기색은 읽을 수 없었다.
“당연히 능력도 있으시겠지만··· 무엇보다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장 사장님은 생각하셨겠지요. 개인적으로 저도 장은우 사장님의 선택이 아주 탁월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장은우의 입을 대신해서 김지수에게 말했다.
내 말을 듣더니 그는 잠시 멋쩍게 웃곤, 괜히 넥타이를 손으로 고쳐 매었다.
“이제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셋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이야기를요.”
“둘도 아니고 셋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다니··· 그런 답안지가 있습니까?”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을 찾는데 능합니다.”
김지수 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그렇게 자신이 있으면 한번 떠들어 봐라.
일단 들어나 보겠다는 태도였다.
“우선 장은우 사장님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솔직히 여쭤보고 싶습니다. 장은우 사장님이 기소된다고 칩시다. 그럼 의미 있는 징벌이 있을까요?”
명약관화.
답조차 필요 없는 질문이었다.
장은우가 보통 사람인가.
상습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도박죄는 기껏해야 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불과하다.
거기에 태상의 이름 높은 변호사들이 잔뜩 달라붙는다면 벌금?
애초에 불기소로 재판까지 가지 않을 확률이 높고, 재판으로 간다고 해도 십중팔구는 집행유예로 끝나고 말 것이다.
김지수 검사 역시 그걸 모를 리가 없기에 슬쩍 돌려서 말을 했다.
“내 말이 그 말입니다. 왜 일을 어렵게 갑니까. 보아하니 아직 인지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설령 조사를 받게 된다고 해도··· 은우가 이 정도 일로 법의 처벌을 두려워할 입장은 아니지 않습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장은우 사장님에게는 법의 처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대중들은 장 사장님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겁니다. 사람들의 사랑을 먹고 살던 장은우 사장님에게는 치명적인 불행이 되겠지요. 어쩌면 법에 정해진 것보다 더 독한 벌을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김지수 검사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장은우 사장님을 옹호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지금 장 사장님을 돕는 건 순전히 제 이익 때문이니까요. 하지만 검사님은 조금 다르실 것 같은데요. 검사님은 장은우 사장님이 그런 식으로 불행해지는 걸 원치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 언변이 보통이 아니군요.”
“말로 때울 생각은 없습니다. 검사님이 이 정도에 넘어오실 분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아까 저는 분명히 사법‘거래’라고 말했습니다. 훨씬 더 큰 거 잡게 해드리겠습니다. 대신 장은우 사장님이 영양가 없는 사건 때문에 검찰청의 포토라인에 서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왜 영양가가 없습니까. 제가 재벌들에 대해 좋은 감정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좋아했던 사람이 재벌 집의 딸이라는 이유로 실연의 아픔을 겪었어야 했는데요. 그때, 참 많이 아팠습니다. 가진 게 없는 나 자신이 너무 싫었고요.”
순간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그가 말하는 실연의 아픔에 대해서는 나는 물론이요, 장은우도 어떠한 변명을 할 수 없었다.
유치하다면 유치한 이유지만, 그 유치한 것들이 때로는 사람을 독하게 만들곤 한다.
만약 저 말이 김지수 검사의 진심이라면 오늘 이 일은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말리라.
하하하━
그때, 김지수 검사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은우, 너는 나이를 먹어도 하나도 변하게 없구나. 강한 척은 다 하면서,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은 혼자 숨기고.”
김 검사의 말처럼 장은우는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무엇이 그녀를 슬프게 했을까?
김지수 검사의 도움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아니, 내 생각에는 김 검사의 마지막 말이 그녀의 눈물샘을 건드린 것 같았다.
그때는 참 많이 아팠다는 그의 말이.
“··· 그럴 때마다 선배는 나한테 괜찮다고 말해줬었고.”
장은우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김지수 검사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은우야. 괜찮아.”
김지수 검사는 팔을 들더니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 일 이야기 합시다. 진짜 큰 건이면, 거래 못 할 것도 없지요. 그 전에 은우야. 너 나랑 약속 하나 해야겠는데?”
장은우가 물기가 촉촉한 눈을 들어 김 검사를 바라보았다.
“너, 다시는 이런 소리가 내 귀에 들어오면 안 돼. 너에 대해서는 훌륭한 사업가이자 멋진 여성이라는 소리만 듣고 싶다.”
“어차피 나 이제 딴생각은 하지도 못해. 날 지켜보는 눈이 있다고··· 그리고 만약 또 허튼짓할 거였으면 이 자리에 선배를 부르지도 않았을 거야.”
“그래. 그리고 이제 좋은 사람 만나서 시집도 가고. 설마하니 아직도 날 못 잊어서 그런 건 아니겠지?”
“선배는 진짜···”
김지수 검사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장은우가 내게 말했던 것처럼 아이처럼 순수한 웃음이었다.
“자··· 한 회장님. 그럼 이제 어디 던져보세요. 받을지 말지는 들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아마 마음에 쏙 드실 겁니다. 검사님. 영광 산업개발이라고 들어보셨을 겁니다.”
“영광 산업개발. 예, 뭐 들어는 봤습니다.”
“그 정도가 아닐 텐데요. 최근에 검찰청 앞으로 진정이니 고소니, 엄청나게 접수가 되었을 걸요. 공정거래법,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사기··· 붙일 수 있는 모든 죄가 붙어서요.”
“잘 알고 계시네요. 그럼 더더욱 아셔야 할 텐데요. 이미 제가 알고 있는 아이템이라면 매력이 확 떨어질 거라는 걸. 고작 그걸로 사법 거래가 되겠습니까.”
“아직 정영목 대표에 대한 소환 절차도 시작 안 한 거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 내사가 시작도 되지 않았습니다. 주가조작 혐의라는 게 며칠 사이에 뚝딱 나오는 게 아니니까요.”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요. 그러면 늦습니다.”
“무슨 근거일까요. 설마하니 대한민국의 수사 기관보다 기업인인 한 회장님의 발이 빠르다고 말씀하시는 건 아닐 테지요.”
“이번만큼은 제가 더 빠른 게 맞는 거 같습니다. 사실, 최근에 영광 산업개발에 관해 기사가 크게 났었지요. 그거 제보자가 바로 저입니다. 그리고 김 검사님에게 언론에 풀지 않았던 진짜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허.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는지, 김지수 검사가 작게 탄식을 했다.
“그 정영목이가 한 회장님과 무슨 원수라도 졌습니까?”
“설마요. 다만 저에게 가족 같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때문에 영광 산업개발에 개인적으로 흥미가 좀 생겼습니다.”
나는 슬쩍 장은우를 바라보았다.
가족 같은 사람이라는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가족은 아니지만 그래도 피는 통하고 있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너무나도 잘 아는 장은우는 얼굴을 붉히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김지수 검사를 바라보았다.
“주가조작을 증명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구요? 그럼 일단 정영목의 확실한 죄 하나를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나는 휴대전화에서 미리 캡처해두었던 사진 한 장을 김지수에게 보여주었다.
정영목의 사진이었다.
족히 수백 명은 될 것 같은 사람들 앞에서 정영목이 마이크를 들고 있는 사진.
“정영목의 뒤를 쫓다 보니, 2년 전에 일본에서 입국한 기록이 있더군요. 거기서부터 시작했습니다. 비록 작은 회사이긴 해도 도대체 그가 무슨 돈으로 영광 산업개발을 인수했을까 궁금했는데, 정영목이 일본에서 뭘 했는지 알게 되자 의문이 풀렸습니다.”
김지수 검사는 눈이 다음 말을 재촉했다.
“미야베 카즈히로. 정영목이 일본에서 썼던 가명입니다. 네트워크 마케팅으로 총합 10억 엔의 사기를 치고 한국으로 도주한 범죄자이기도 하고요. 지금 정영목은 또 해외로 도주를 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정영목에게는 따로 제가 사람을 붙여놨습니다. 지금 아니면 못 잡아요.”
“너··· 날 돕겠다고 이렇게까지 준비했다고···?”
장은우에게는 일의 디테일에 대해서는 미리 언급하지 않았었다.
내가 가진 승부 패는 마지막까지 최대한 숨기고 있는 것이 승리의 방정식 아니던가.
일의 전말을 김 검사만큼이나 모르고 있던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구미가 당기십니까?”
꿀꺽━
김지수 검사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너는 아빠와 닮았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