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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억을 상속받았다-142화 (136/200)

142. 사법 거래

서울 모처에 있는 고급 한정식집의 밀실.

어디 가서 어깨 좀 펴고 다닌다는 사람들조차 부담스러운 가격표를 달고 있는 이곳의 음식들은 요리라기보다는 예술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뚜렷하게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차마, 입으로 먹는 것이 ‘죄송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안녕하십니까. 서울 지검 김지수라고 합니다.”

나는 지금 장은우, 그리고 검사 한 명과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어떻게 아는 검사입니까?”

“··· 친분이 있는 사람이야.”

이곳에 오기 전 김지수 검사에 관해 묻자 장은우는 딱 잘라서 말했다.

내 눈을 피하고 대답하는 장은우의 얼굴에는 어쩐지 쓸쓸함이 묻어 있었다.

“어떤 친분인지 물어도 될까요.”

“내가 꼭 대답해야 하는 거야?”

“할 수 있는 대답이라면. 그래야 계산이 서니까요.”

“대학교 선배였어. 전공을 달랐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장은우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적어도 나에게 해를 끼칠 사람은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에서 상대방에 대한 강한 믿음이 드러났다.

허━

나는 내가 눈을 잘못 뜬 줄 알았다.

순간 추억을 더듬는 듯한 장은우의 얼굴이 마치 소녀의 그것처럼 보였으니.

보아하니 단순한 선후배 사이는 아니었겠군.

그러고 보니 오늘 장은우의 복장과 화장도 예사롭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오늘 그녀는 수수하고, 단아했다.

“오빠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검사들이랑은 라인이 달라. 너 대한민국에서 오빠의 입김이 닿지도 않으면서 능력까지 있는 검사를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니?”

장은우는 내 얼굴을 흘낏 훔치더니 쓸데없는 오해를 하지 말라는 듯 사족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군요.”

두 사람의 과거에 대한 궁금증은 장은우를 향한 김지수 검사의 첫인사에 바로 풀려버렸다.

“야, 장은우. 이게 얼마 만이야··· 그런데 이분은 누구시지? 혹시 나한테 청첩장이라도 주려고? 만약 그런 거라면 축하는 하겠지만, 나 조금 서운한걸.”

김지수 검사는 친근하게 장은우를 부르며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가 있었음을 충분히 암시할 수 있는 말을 능글맞게 뱉었다.

만약 정말 내가 장은우의 배우자가 될 사람이라면 대단한 실례가 될 수도 있는 말.

머리카락 한 올 빠지지 않고 포마드로 정갈하게 넘기고, 넥타이가 조금도 삐뚤어지지 않은 반듯한 옷차림의 이 남자.

그런데 김지수 검사는 묘하게도 상대방에게 허술해 보인다는 인상을 주어 마음을 안심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물론, 속이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 알지 못하고 저 허술함마저도 방심을 끌어내기 위한 연기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게 내가 본 김지수 검사의 첫인상이었다.

“무슨 헛소리야. 이쪽은 고왕 건설의 한영수 회장.”

“아···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아주 젊은 분이 고왕 건설의 새 오너가 되셨다고. 난 또··· 인물이 워낙 좋으시기에. 은우가 워낙에 잘생긴 남자들만 옆에 두지 않습니까. 하하!”

“자꾸 이상한 소리 할래? 낮술 했니?”

“술? 나 이제 술 잘 안 마셔. 정말 중요한 자리 아니면. 있잖아, 실컷 아부해야 하는 그런 자리··· 그리고 이상한 소리는 무슨. 너 잘생긴 사람 좋아하는 거 맞잖아. 그래서 예전에···”

장은우는 황급히 김지수 검사의 입을 틀어막았다.

“설마 본인 이야기? 웃기고 있어. 365일 모자를 눌러쓰고 군복 바지 같은 거나 입고 다니던 남자를 내가 왜 그랬었는지··· 그땐 진짜 철이 없었어.”

장은우는 이제는 내가 옆에 있음에도 김지수 검사가 자신의 추억 속 연인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그녀의 얼굴이 슬며시 붉어진 것이 홍조마저 떠 있었다.

얼마간 호탕하게 웃던 김지수 검사는 시선을 나에게로 옮겼다.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훑던 그는 나와 장은우, 두 사람 모두가 뜨끔할 소리를 했다.

“··· 그런데, 한 회장님. 왠지 은우랑 외모가 좀 닮은 것 같은데요.”

이런, 눈썰미는 있다는 소린가.

나는 슬쩍 말을 돌렸다.

“오늘 검사님을 뵙자고 한 건 다른 이유이지만, 혹시 큰 실례가 아니라면 두 분의 이야기를 좀 들어봐도 될까요? 인연이 보통이 아니신 것 같은데.”

실컷 운을 띄우던 김지수 검사는 막상 내가 멍석을 깔아주자 어깨를 으쓱하곤 장은우 쪽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잠깐 만났었어. 나 스무 살 때. 저 사람은 복학생 선배였고.”

“자식. 저 사람이 뭐야··· 그래도 내가 너 첫사랑 아니었어? 저 사람은 너무 했다.”

김지수 검사는 예의 능글맞게 말했지만, 어쩐 일인지 장은우는 아무 말이 없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하하하! 우리 둘 다 어렸을 때 이야기에요. 사실 제가 아주 호되게 장은우 사장에게 차였었거든요. 하기야, 그때만 해도 내가 개털이었는데 감히 태상의 딸을 넘보다니 참 주제넘은 짓이였지 뭡니까. 그래도 덕분에 정신 차리고 코피 터지게 공부를 해서 검사가 되었으니, 은우에게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 그만하자. 이제 이 이야기는.”

장은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였다.

좌식 식탁 위에 올려놓은 김지수 검사의 휴대전화가 진동을 울리기 시작했다.

“아, 잠깐 실례 좀 하겠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전화가 걸려 와서.”

자리에서 일어난 김지수 검사는 미닫이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응. 아빠야. 아빠 지금 저녁 먹지···

방 밖에서 전화를 받은 김지수 검사의 목소리가 멀어져 갔다.

“저기···”

나는 장은우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물잔을 들어 물을 마시고 있었는데, 가면이라도 쓴 듯 무표정했지만, 물잔을 쥔 그녀의 손가락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오늘 좋은 이야기만 할 수 없는 거 알죠? 괜찮겠어요?”

“내가 반년 넘게 저 사람을 졸졸 따라다녔어. 날 만나달라고.”

장은우 사장은 내 대답 대신 다른 이야기를 했다.

“웃는 모습이 정말 아이처럼 순수했거든. 처음 봤을 때부터 그 웃음에 마음을 뺏겼었어. 그런데 절대 안 된다고. 너랑 나는 어울리지도 않고, 어울려서도 안 되는 사람들이라고 그렇게 거절을 하더라.”

그녀는 지금 나에게 말을 하는 것일까?

아니.

장은우는 지금 혼잣말을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마흔을 훌쩍 넘어 옛사랑을 만난 그녀는 내가 아니라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아무라도 붙잡고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며 지금처럼 똑같이 말할 것만 같았다.

“결국에는 사귀게 되었지. 아버지가 알면 큰일이 날 게 분명했기에 몰래 연애를 했어. 저 사람. 찢어지게라는 표현이 딱 맞을 만큼 정말 가난했거든. 머리는 정말 뛰어난데 집에서 아무런 도움을 못 받았어. 당장 생계를 걱정해야하는 처지였으니 사법고시도 번번이 물 먹었었고··· 한번은 돈이라면 내가 도와줄 수 있다고 하니까, 그렇게 화를 내더라. 항상 날 보면 웃어주기만 하던 사람이.”

“...”

나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내가 상상하지도 못한 장은우의 일면이었다.

하기야, 세상의 어느 사람이 사연과 사랑이 한 번쯤 없었겠는가.

그저 장은우를 오만한 공주님으로 단정을 지은 것은 나의 편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가 알게 되었고, 난 반강제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어. 아직도 기억나. 내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겁도 없이 우리 집 앞에 와서 울면서 내 이름을 부르던 저 사람의 모습이. 그리고 몇 년이 지나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날 만날 때와 똑같이 웃으면서 잘 지냈냐고 말을 하더라. 그때는 정말 마음이 아팠어.”

“··· 정말로 많이 좋아하셨군요.”

“그래. 난 더벅머리의 그 남자애를 정말 많이 좋아했었어.”

“그렇다면 왜 다시 시작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검사가 되었다면··· 그래도 훌륭한 배우자감 아닙니까?”

“검사? 태상에게 있어서 검사라는 존재는 그저 악어와 악어새 같은 관계에 지나지 않아. 그리고··· 이미 다시 만났을 때는 난 더이상 그를 사랑하던 그 때의 내가 아니었으니까.”

드르륵━

“아, 이거 정말 미안합니다.”

장은우의 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지수 검사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자리에 앉은 그는 잠시 나와 장은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뭡니까? 이거 분위기가 왜 이렇게 다운되어 있어.”

우리 둘이 아무 말이 없자, 김지수 검사는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 풋사랑을 추억하기에는 너나 나나 이미 너무 나이를 많이 먹었고, 여기 한 회장님도 그런 이야기나 듣자고 같이 만난 것은 아닐 테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우선 두 분은 무슨 관계십니까. 은우 너한테 묻자. 오라버니가 대한민국 최고 건설사의 회장인데, 은우 네가 굳이 고왕 건설과 연을 맺을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검사는 검사.

김지수는 날카로운 눈으로 장은우를 바라보았다.

“제가···”

“내가 말할게.”

내가 대신해 말을 하려고 할 때, 장은우가 내 말을 잘랐다.

“한 회장에게 돈을 빌렸어. 내가.”

김지수 검사는 갑작스러운 장은우의 고백에 당황스럽다는 표정이 되었다.

“돈을 빌렸다고? 네가?”

장은우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그였지만, 그의 말속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속뜻이 담겨 있었다.

장은우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옛 연인을 몇 초간 바라보았다.

많은 감정이 담겨 있는 것 같은 그 눈은 이윽고 다시 아래를 향했다.

“도박을 했거든 내가. 이곳저곳 다니면서. 그래서 조용히 쓸 돈이 필요했어.”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이다.

빌드업 없는 그녀의 급발진에 나조차도 깜짝 놀랐다.

나도 모르게 장은우의 손목을 덥석 잡을 정도였으니.

감상에 젖은 장은우는 김지수 검사가 자신을 미워하고 혼내주길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장은우의 돌발 발언으로 나는 머릿속으로 내가 해야 할 말을 몇 가지 조정해야만 했다.

“너···”

김지수 검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처음으로 그에게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밀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얼마입니까?”

차마 장은우를 추궁하지 못하겠는지 김지수 검사는 나에게 물었다.

“액수가 큽니다. 아마 검사님이 생각하는 것 이상일 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얼마냐고 여쭤보는 겁니다.”

“500억 이상입니다.”

하━

김지수 검사는 이마를 손으로 쓸며 한숨을 내쉬었다.

“은우야, 너 얼마나 된 거야. 해외로 나갔어?”

“두세 달 되었어.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는데, 나중에는 자제할 수가 없었어.”

“··· 두세 달. 그나마 다행이네.”

법에서는 액수만큼이나 횟수도 중요한지, 김지수 검사는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했다.

“검사님.”

나는 김지수 검사를 불렀다.

시작이 조금 틀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이곳에 해야 할 일을 하러 온 것이다.

“검사님이 장은우 사장님을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장은우 사장님에게 들었습니다. 동기들 중에 가장 먼저 차장검사를 다셨다고요? 여러모로 직장에서 인정받고 계신다는 증거겠군요. 윗엣분들과도 이야기가 통하시겠어요.”

“안 됩니다.”

김지수 검사는 딱 잘라 말했다.

“물론 은우가 이 자리에서 자수하는 거라면, 정상참작을 받을 수 있게 도와줄 수는 있습니다. 만약 양심의 가책이 찔려서 생각 없이 털어놓은 거라면··· 그래요. 옛 추억을 생각해서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한 톤 낮아진 목소리.

“없던 일로는 절대 할 수 없습니다.”

“검사님. 훌륭한 분이시군요.”

나는 김지수의 뜻을 이해한다는 듯이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장은우 사장님을 돕고 싶을 뿐입니다. 제가 두 분의 인연을 가만히 들어보니 검사님도 저와 같은 마음일 거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절대 할 수 없다고는 말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손바닥을 깍지 껴 턱에 대고 김지수 검사를 바라보았다.

“··· 검사님에게 제안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일종의 사법 거래를요.”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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