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속을 알 수 없는 남자
“덕분에 살았네. 솔직히 널 믿어도 될지 의심했었어. 만약 내가 너였다면··· 난 장 씨라면 이를 갈았을 것 같거든.”
장은우는 잠시 말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한참을 말이 없던 그녀는 대단한 고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한숨과 함께 조용히 읊조렸다.
“고마워.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런데 어떻게 알았던 거야.”
오히려 내가 묻고 싶었다.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냐고.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그런 짓을 했냐고.
세상 부러울 것 없이 모든 걸 가진 사람이 주변에서 말리는 사람도 하나 없었냐고.
장은우의 안일한 질문을 통해 그녀의 삶이 얼마나 안전한 세계 속에서 보호받아 왔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속에 품고 있는 마음을 장은우에게 밝히지 않았다.
도박도, 주식 사기에 올라탄 것도.
결과적으로 장은우의 실책은 나에겐 새로운 선택지를 준 셈이니까.
이민욱 기자는 내가 던져준 떡밥을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게 풀어내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신랄한 기사가 올라오자 주식 종토방은 그야말로 미친 듯이 불타올랐다.
- 이러니 한국에서 기업을 못 하지요. 정영목 대표님 힘내세요!
- 기름 한 방울 안 나오는 나라에서 미래 자원 사업을 해보겠다는 포부를 이렇게 깎아내리네.
- 명불허전, 기레기!
- 테슬라도 처음 시작할 때는 사람들이 다 비웃었었죠? 5년 뒤에 두고 봅시다.
이것들이 그나마 온건한 언어들로 쓰인 댓글들.
영광 산업개발과 운명을 함께하는 이들은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욕설로 그 회사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증명해 보였다.
하지만 그 믿음이 얼마나 나약한지 증명되는 데는 채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 7%··· -13%···
연일 음봉의 길이가 길어져 갔고, 기사가 나온 지 닷새 만에 영광 산업개발은 하한가를 맞아버렸다.
사이버렉카들은 이때가 기회다 싶어 영광 산업개발을 저격하는 영상들을 쏟아내었다.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아마 어느 집에서는 주말 내내 살림살이들이 모두 박살이 났을 것이다.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는 낙폭이었다.
이대로라면 1년 동안 꾸준히 올려온 주가가 고작 한 달이면 원상복구 될 것만 같았다.
주주들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정영목 대표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해명 영상을 하나 올린 것이 전부였다.
그는 삼십 분 가깝게 쉬지 않고 말을 떠들었지만, 그 말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었다.
모든 것은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세력의 모함이라는 내용이 전부인 감정적이고 조잡한 해명.
그것은 정영목의 행보와 영광 산업개발의 신기루 같은 허상에 대해 팩트로 칼질을 한 기사에 비하면 아무런 설득력이 없는 것이었다.
급기야는 저 영상 자체도 예전에 찍어놓은 것이고, 정영목은 이미 어디론가 잠적을 했다는 흉흉한 소문마저 돌기 시작했다.
장은우는 나의 말을 따랐기에 저 개미지옥에서 간발의 차이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분명히 생면부지 사생아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데 그녀의 자존심이 많이 구겨졌으리라.
다행이랄까, 장은우는 그 자존심 때문에 괜한 오기를 부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는 않았다.
영광 산업개발이 하한가를 찍던 날이었다.
장은우는 한번 얼굴 좀 보자며 나에게 먼저 연락을 해왔다.
만남은 첫 만남과 같은 장소에서였다.
이번에도 최화란은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었다.
하지만 날 향한 장은우의 태도는 처음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여전히 경계의 끈을 놓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놓고 하악질은 하지 않는 고양이 같달까.
한결 풀어진 얼굴로 장은우는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로 첫마디를 열었다.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채권자로서 채무자가 영 안 좋은 일을 당하는 걸 두 눈 뜨고 볼 수는 없었던 것뿐이니까요.”
“누가 그 핏줄 아니랄까 봐 너도 말 예쁘게 하는 솜씨는 없구나?”
“핏줄이라. 사장님의 입에서 그런 소리를 들으니 정겹기까지 하네요. 저의 존재에 대해서 인정 못 하시는 것 아니었나요?”
의표를 찔렸는지 장은우는 슬쩍 내 눈을 피했다.
“··· 너에 대해서 좀 알아봤어. 짧은 시간 동안 사고를 많이도 쳐놨던데. 도대체 너 정체가 뭐니?”
“사장님이 알고 계신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다만 남들보다 조금 삶을 빡세게 산 사람일 뿐이죠.”
빨리도 알아보셨군.
솔직히 고백을 하나 해야겠다.
나는 장은우를 더 진창에 빠트리고 싶다는 충동과의 싸움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녀를 완전히 무너트리지는 못하더라도,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을 정도로.
따지고 보면 장은우가 나에게 무슨 잘못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를 미워해야 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는 소리다.
내 어두운 감정이 향하고 있는 것은 장은우가 아니었다.
이제는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이를 향해 나는 칼끝을 겨눈 것이다.
복수.
어쩌면 장영복 회장에게 복수 같은 것이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자, 보라.
당신이 내버린 아이가 이렇게 당신이 남긴 것을 망가트리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저열한 욕망을 이성으로 간신히 억눌렀다.
그리고 구덩이에 빠진 장은우에게 사다리를 내려주었다.
내 손으로 알아서 들어온, 미래에 훌륭하게 역할을 할 패를 구겨서 버릴 수는 없었기에.
“저도 하나 물어봅시다. 누굽니까. 장 사장님이 도박을 했다는 걸 아는 사람.”
“넌 도대체··· 그건 또 어떻게···.”
“이 새끼나, 저 새끼나··· 라고 말했었죠. 분명.”
나는 손가락을 들어 스스로를 가리켰다.
“이 새끼는 저를 말하는 것 같고, 그렇다면 저 새끼도 어딘가 있겠죠. 협박이라도 당하고 있는 겁니까?”
“협박은 무슨!”
발끈하는 말투와는 달리 장은우의 표정은 솔직했다.
누굴까.
태상 공주님에 얼굴을 저리도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은.
검찰과 경찰, 그리고 이름 모를 어느 협잡꾼까지.
하지만 나의 머리에 가장 크게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 혹시 장은수 회장님입니까?”
크게 열리는 장은우의 동공.
굳이 그녀의 입으로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이미 눈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으니.
나한테도 꼬리를 붙이더니, 자기 친동생에게도 똑같은 짓을 했단 말인가.
장은수의 음험함에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은수 회장님이라서. 사장님의 가족이잖아요. 대한민국에서 최고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힘이 있는 사람이고. 일이 잘못되어도 사장님을 당연히 어떻게든 보호해 주겠지요.”
나는 일부러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그 목적이야 당연히 장은우를 한번 떠보기 위함이었다.
“··· 보호?”
아니나 다를까.
장은우는 내 말에 모르는 소리 말라는 듯 피식 콧방귀를 뀌었다.
“능청 떨지 마. 너 다 알고 있잖아. 태상 건설에서 쫓겨난 임원들, 네가 다 거둬들였다며.”
“그거야 별개의 문제이지요. 저는 그저 일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마침 그들이 있었고.”
장은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날 너무 띄엄띄엄 보는걸. 그 사람들이 어떻게 회사에서 쫓겨났는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
“그분들에게는 조금 죄송한 말이지만, 그래도 그들과 장 사장님은 입장이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나는 더 하지. 없는 죄도 만들어서 사람 쳐내는데, 나는···”
차마 자신의 과오를 제 입으로 말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장은우는 가만히 말을 삼켰다.
“아무튼, 오빠에게는 가족이라고 예외를 둘 사람이 아니야. 너도 조심하는 게 좋을걸. 목을 내놓고 재산싸움 할 거 아니면 어디 가서 우리 아버지 자식이라는 소리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절 걱정이라도 해 주시는 겁니까? 고맙네요.”
“걱정은 무슨···”
뚫어져라 그녀의 눈을 바라보자 장은우는 또 한 번 내 시선을 피했다.
문득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 한편이 떠올랐다.
세찬 바람과 태양이 나그네의 겉옷을 벗기기 위해 내기를 했다는 유명한 이야기.
그 이야기의 결말이 주는 교훈은 굳이 말을 안 해도 모두가 알 것이다.
장은수가 바람이라면 나는 태양이 되리라.
“좋습니다.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도박 문제까지 제가 해결해 드리면 사장님에게 좀 도움이 될까요?”
“네가?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
여지까지도 다 계획에 있던 일.
그것을 위한 준비까지도 이미 다 끝내놓은 참이다.
“이미 벌어진 일이야 당연히 되돌릴 수 없죠. 하지만 최대한 수습지야 못하겠습니까. 방법은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장은우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대신 그냥은 없습니다. 이것도 엄연히 거래의 연장선이니까요.”
“도대체 원하는 게 뭔데.”
나는 미간을 찌푸리는 그녀를 향해 손가락 2개를 펴 보였다.
“제가 원하는 건 2개입니다. 첫째, 언젠가 단 한 번, 제 편이 되어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추상적으로 말하면 내가 응할 거라고 생각해?”
“장담하건대 제 편이 된다고 해서 사장님이 잃을 것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두 번째는 좀 더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에게 빌린 돈, 태상 백화점 지분으로 돌려받고 싶습니다.”
“너··· 지금 무슨 소리인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이번에 살린 돈을 빼면 남은 빚은 480억 정도군요. 그 정도 액수라면 사장님의 경영권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설령 그렇다고 해도 저는 백화점 경영은 관심이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장은우 사장님과 저 사이에 연결고리 정도라고만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그 뜻이 아니야. 태상 백화점은 태상 그룹과 순환출자로 복잡하게 엮여있다고. 네가 지분을 잠식하고 들어오면 과연 오빠가 그걸 모를까? 오빠의 눈을 피하고 싶어 한 건 누구보다도 너 아니야?”
설마하니 그 사실을 내가 모를까.
하지만 이건 혹시 모를 언젠가를 대비한 덫이다.
장은수 회장을 향한 덫.
“당연히 제 명의로 들어가지 않을 겁니다. 최화란 사장이 이름을 빌려줄 겁니다.”
“마찬가지야. 오빠가 너와 최 사장과의 관계를 알아내는 데는 하루도 걸리지 않을걸?”
“그것도 생각이 있습니다. ··· 만약 나중에라도 추궁받게 된다면 대비책은 드리겠습니다.”
장은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정말 별종이다. 도대체 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 건지··· 그런데 참 이상하지.”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뭐가요?”
“··· 아니야.”
대화의 맥이 끊기고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장은우 쪽이었다.
“그래. 좋아. 우리 지금 거래하고 있는 거잖아. 어떻게 정리할 건데 도박 건은?”
나는 양쪽 입술을 비죽이 올렸다.
“그래요. 일단 그걸 먼저 정리하는 게 먼저죠.”
장은우의 눈은 내 입에 꼼짝없이 고정되어 있었다.
“사장님. 자수합시다.”
“··· 뭐?”
장은우는 차마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이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지금··· 나랑 장난치는 거야···?”
분노로 그녀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장은우의 그런 반응은 내 예상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최화란 사장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을 하셨다면서요. 검찰을 들먹이면서. 뭐, 뻥카는 아니었을 거로 생각합니다. 당연히 장은우 사장님 정도라면 지체 높은 검찰청의 사람들 몇쯤은 알고 계시겠지요.”
“그래서.”
“한 명만 섭외해주세요. 이왕이면 가장 끗발 좋은 사람으로. 저랑 같이 셋이서 만나는 겁니다. 그 자리에서 제가 다 정리할 테니.”
사법 거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