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40화 (134/200)

140. 이민욱 기자

“반갑습니다. 어서 오세요. 제가 한영수입니다.”

허━

내 앞의 남자는 뜻 모를 탄식을 한번 뱉고선 내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이거, 전설 속의 용처럼 소문만 무성했던 분을 직접 보게 되다니···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요.”

남자의 말투는 시니컬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국내 주요 일간지 중의 하나인 K 일보의 이민욱 기자였다.

조금 더 덧붙여 말하자면 예전에 내가 철로에 떨어진 남자를 구했을 때 그걸 기사로 내보냈던 바로 그 기자.

“일단 앉으시죠.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며칠 전이었다.

나는 그에게 한번 만났으면 한다는 의사를 전했었다.

“나를요? 왜요?”

이민욱은 결코 사교적이라고 할 수 없는 말투를 무기로 나의 초대에 경계를 드러냈다.

오히려 좋아.

나는 모난 돌 같은 이 남자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교분을 트고 있는 기자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들의 습성에 대해 내가 잘 알 리 없다.

그래도 일단 나는 명색이 대기업의 오너가 아닌가.

일반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과 만남, 그것도 독대의 기회가 생긴다면 누구라도 일단 반색하지 않을까?

더욱이 나에 관해 우호적인 기사를 다만 몇 줄이라도 쓴 사람이라면 무슨 떡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퉁명스럽게 나온다는 것은 이민욱의 심지가 보통은 아니라는 방증이었다.

내가 사람을 제대로 찍었구나.

여하튼 꼭 뵙고 싶다고 한 번 더 정중하게 말하자, 이민욱은 일단은 알겠다며 날짜와 장소를 말해보라고 했다.

그렇게 오늘, 고왕 건설의 회장실에서 그를 만나게 된 것이다.

“앉으시죠.”

이민욱은 악수를 풀고 자리에 앉으면서도 나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이왕에 내 계획 속에 들어와 있는 사람.

이민욱에 대해서는 따로 뒷조사 아닌 뒷조사로 검증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소위 기자들 세계의 쓰이는 은어라는 ‘도꾸다이’를 무수히 터트린 사회부 1진 기자 출신.

그는 데스크의 눈치를 보지 않는 꼴통 기질로 소문이 자자하다고 한다.

그렇다고 마냥 막가파는 아닌 것이, 손에 쥔 펜의 날카로움만은 보통이 아니라 ‘협객’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고.

과연 날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여간 예사롭지 않았다.

날 것 그대로의 펄떡거림과 집요함이 느껴진달까.

“눈이 참 좋으시군요. 그렇게 저 겁주실 필요 없습니다.”

“사람 만나는 걸로 입에 풀칠을 하다 보니, 얼굴부터 뜯어 보는 게 버릇이 되었습니다. 딱히 나쁜 뜻을 가지고 그러는 건 아니니 기분 나쁘게 생각은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양쪽 입꼬리를 슬쩍 올려 웃었다.

“그래서, 이 기자님의 눈에는 제가 어떻게 보이십니까.”

“젊군요. 인물 좋다는 소문이야 들었습니다만, 실제로 보니 그 이상이시네요. 좋으시겠습니다.”

“아니요. 제 생김새를 여쭤본 게 아닙니다.”

고개를 좌우로 한번 저은 뒤 계속 입을 열었다.

“그런 날카로운 눈을 가지신 분이라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지 않았을까 싶어서요.”

“...”

이민욱 기자는 어쩐 일인지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왔다.

“한 회장님을 취재하겠다고 열성이었던 매체들이 많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네. 방송국, 신문사··· 심지어 여성잡지도 있었죠. 놀라운 일이더군요. 세상이 저에게 그렇게 관심을 가진다는 게.”

“자기를 알리지 못해 안달인 것이 요즘 세상 아닙니까. 거기에 정면으로 역행을 하고 있으니 외려 한 회장님이 신기해 보일지도요.”

말이 나왔으니 하는 소리지만 사실 진작부터 그에게 묻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그래서 신기합니다. 이 기자님이 쓰신 그 기사 말이에요. 제가 사람을 구한. 이 기자님은 어떻게 그게 저인 줄 알았습니까? 제가 그때 이름표를 달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말이죠.”

이민욱은 끙 소리를 한번 내더니 아무 말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그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신중하게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 사실, 한 회장님에 대해 다른 제보가 있었습니다. 하필이면 그게 저한테 떨어졌었고요. 동영상을 보게 된 건 거기에 순전히 우연이 겹친 일이었습니다.”

“저에 대한 제보라. 흥미롭네요. 어떤 제보를 말씀하시는 걸까요.”

입가에서 미소를 거두진 않았지만, 나는 눈에 힘을 주고 이민욱을 바라보았다.

“그걸 묻는다고 순진하게 말할 정도로 아마추어는 아닙니다. 어쨌든 지금은 끝난 이야기입니다. 뭐라 물어도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말을 안 해준다고 상상까지 못 할까.

이민욱 기자의 말은 분명 모호했지만 거기서 몇 가지를 추려내기에는 충분했다.

이민욱이 말하기를 꺼리는 것으로 보아 분명 악의적인 의도를 가진 제보였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자면 그 기사가 나왔을 때가 언제인가.

고왕 건설을 놓고 윤일중 회장과 대립의 촉을 거칠게 세우던 시절이다.

이 기자가 밝히기를 꺼리는 그 제보는 틀림없이 나의 적에게서 나왔을 테니 윤 회장 측에서 물타기를 위해 수작을 부렸으리라는 것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윤 회장에게 정보가 있었을까?

나를 흔들고, 깎아내릴 수 있을 만큼의?

아니.

그랬다면 번거롭게 언론을 이용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나를 직접 공격하고 말지.

게다가 그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봐, 한영수 이사장. 태상이 나를 돕기로 했어. 어디 한번 해보자고.”

윤일중 회장은 그 당시에 나에게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했었다.

태상이 자신을 돕기로 했다라.

그렇다면···

역시나 장은수 쪽에서 나온 소스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어찌 되었건, 그만큼 나에 대해 치밀하게 알고 있는 자는 없을 테니.

나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래.

어차피 이민욱의 말처럼 이미 끝난 이야기다.

지금은 내 눈앞에 있는 남자에 집중하자.

머릿속 생각이 정리되니 새삼 이민욱이 다르게 보였다.

그 태상으로부터 청탁을 받았음에도 그걸 쳐내고 나에 관해 미담 기사를 썼다는 것 아닌가.

“어쨌든, 저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써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은 꼭 드려야겠군요. 덕분에 박수 좀 받았습니다.”

“그게··· 좀 궁금하더이다.”

순간 이민욱의 눈가가 슬쩍 부드러워졌다.

“이제 막 커다란 회사를 먹은 사람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목숨을 걸고 철로에 뛰어들었을까.”

뭐, 좋은 일을 한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이민욱은 중얼거리듯 흐린 목소리로 뒷말을 붙였다.

“그 일을 가지고 사례를 하겠다는 구실로 기자 하나 포섭할 생각이라면 관둬요. 딴 사람 알아보십쇼. 조금만 눈알을 굴려봐도 좋다고 꼬리 흔들 인간들이 한 트럭이니까.”

“제가 그렇게까지 얄팍한 인간은 아닙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이야기해봅시다. 저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셨습니까? 정말로 물어보고 싶은 건 따로 있을 것 같은데요.”

이민욱은 고개를 들어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 고아원 출신에 별 볼 일 없었던 사람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말입니다.”

나는 이민욱이 장은호로부터 대략적인 나의 정보를 넘겨받았을 거라는 가정을 전제로 말했다.

그리고 내 촉은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돌발 발언을 듣고도 이민욱은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이미 나의 이력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아직 어딘가에 썰을 풀지 않았다?

오케이.

입도 충분히 무겁고.

“··· 알고 싶다면 알려줄 겁니까?”

“언젠가.”

나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때가 되어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날이 오면 반드시 이 기자님을 찾겠습니다. 아마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겁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날이 아닌 것 같군요. 기자님을 보자고 한 것은 조금 다른 이유입니다.”

나는 주머니에서 USB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뭡니까, 이건?”

“공익 제보랄까요.”

이민욱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이 기자님은 정의감이 유달리 투철하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디서 그런 허풍 같은 소리를 들으셨는지. 뒤를 파기라도 한 거요?”

“이 기자님만 저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그건 반칙이죠. 저도 그 정도쯤은 해야 서로 공평하지 않겠어요?”

하하하━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이민욱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당돌한 내 말이 오히려 그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 입에서 이어 나온 말에 이민욱은 기민하게 반응했다.

“··· 영광 산업개발이라고 들어보셨겠지요. 때마침 지금 산업부에 계시니.”

공익 제보와 영광 산업개발.

이 둘 사이의 연결고리를 빠르게 캐치했는지, 이민욱의 눈이 또 한 번 변했다.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의 그것처럼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 이민욱 이 사람 말이야.

천상 기자를 하기 위해 태어났구나.

잘 됐어. 이거, 이야기가 아주 빠르겠군.

“개인적으로 영광 산업개발에 대해 모은 정보들입니다. 주가조작도 주가조작이지만, 사실상 폰지 사기나 다름없어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캐면 캘수록 구린 냄새가 진동하더군요. 정영목 대표는 그저 배우 중에 한 명일 뿐입니다. 혼자가 아니라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아마 필요한 모든 내용이 이 USB 안에 있을 겁니다. 경제 기자가 체질에 잘 안 맞는다고 들었습니다. 이참에 사회부로 돌아가시죠.”

“··· 개인적이라. 믿을 수 있는 정보입니까? 출처는요.”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돈이 있으면 많은 것들을 쉽게 알 수 있더군요. 이 USB 안의 정보가 참인지 거짓인지 정도는 이민욱 기자님이 가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영광 산업개발에 물려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야 아무런 재주가 없지만, 기자님에게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릴 힘이 있지 않습니까. 더 큰 피해가 오기 전에 막아주시지요.”

이민욱은 USB를 집어 들곤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하나 물어봅시다. 이런 일을 한다고 해서 회장님에게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득실을 따지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때 사람을 구하려고 뛰어들었던 것처럼요. 옳은 일이니까··· 단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뭐, 이런 놈이 있냐는 표정으로 이민욱 기자는 나를 바라보았다.

“제보 역시 철저히 익명으로 부탁드립니다. 기자님을 통해 유명세를 타는 건 한 번이면 충분한 것 같거든요.”

얼마간 더 USB 주물럭대던 이민욱은 마침내 그 물건을 자기의 외투 주머니 속에 넣었다.

“··· 공교로운 일의 연속이군요. 그렇지 않아도 영광 산업개발은 저도 계속 주시하고 있었습니다만.”

이민욱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역시 더는 용건이 없었기에 굳이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런데.”

큰 걸음으로 걸어 나가던 이민욱.

불현듯 그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까 저한테 회장님이 어떻게 보이냐고 물었죠.”

나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온갖 인간들을 만났습니다. 선한 자, 악한 자, 가진 자, 없는 자, 그리고 억울한 자··· 그렇게 별의별 사람들의 얼굴을 쫓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어렴풋이 보이더군요. 그 사람의 인생이.”

이민욱은 다시 한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은 알겠더이다. 어째서 철로에 주저 없이 몸을 던질 수 있었는지. 회장님. 아니, 한영수 씨 말입니다. 이 시대엔 공룡처럼 멸종해 버린 줄 알았던 보기 드문 단단한 인간이군요.”

이민욱은 나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럼, 또 봅시다.”

속을 알 수 없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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