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39화 (133/200)

139. 어떤 남매 (2)

“··· 그래. 이거지.”

딱딱하게 굳어있던 장은우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어쩐 일인지 오늘은 장이 열리기 무섭게 내림세를 보이며 영 힘을 쓰지 못하던 영광 산업개발의 주가.

오전 내내 빌빌대던 주가는 오후가 되자 다시 상승추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막 양봉으로 전환한 참.

인류가 낳은 불세출의 천재 아이작 뉴턴의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오늘날까지 그 명성이 자자한 이 위대한 과학자는 수학, 물리학, 천문학을 비롯해 신학까지 두루 섭렵한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천재였다.

그리고, 한가지 더.

뉴턴은 주식투자자이기도 했다.

“내가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어도, 인간의 광기는 도저히 계산 못 하겠다.”

당시에 남해 회사라는 주식회사에 투자했다가 제법 재미를 본 뉴턴.

하지만 주식을 처분한 뒤에도 남해 회사의 주가가 하늘 높은 지 모르고 끝없이 오르자, 뉴턴은 저 유명한 말을 하고선 전 재산을 다시 그 회사에 투자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남해 회사를 둘러싼 온갖 헛소문과 그 소문에 올라탄 사람들의 탐욕과 광기로 만들어진 거품은 근본이 없었으니 곧 바닥을 드러냈고, 그 거품의 결말이 어땠을지는 입 아프게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뉴턴 그 일로 자신이 평생 쌓아온 재산 대부분을 잃어버리게 된다.

장은우도 마찬가지였다.

최고의 환경에서 태어나 가장 훌륭한 교육코스를 밟아온 그녀에게 지성이 부족할 리 없었다.

미혹에 빠져있는 장은우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이 그녀의 개인적인 무능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소리다.

장은우는 지금 악귀에 씌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눈과 귀를 막고 그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었다.

심지어, 지금 발을 담그고 있는 도박이 성과를 내기까지 하자 그것이 마치 자신의 과감한 결단과 실력으로 이뤄낸 것이라는 헛된 착각까지 하게 되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요,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하던가.

장은우는 지금 자신에게는 평생 인연이 없을 줄 알았던 비극의 늪에 목까지 잠겨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최화란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어쩐 일인지 이번만은 최화란이 먼저 연락을 해 왔는데, 감히 자신을 오라 가라 하는 그녀가 신경에 거슬렸던 것도 사실이지만, 주식투자의 성공은 장은우를 제법 너그럽게 만들었다.

최화란의 사채타운에는 특별한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하나 따로 있었다.

다른 층을 거치지 않고 최화란의 방으로 바로 연결된 그 엘리베이터에 장은우는 익숙하게 올라탔다.

“최 사장. 나왔어.”

어쩐 일일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렸건만 늘 앞에서 맞이하던 최화란이 보이지 않는다.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들고 장은우는 방안을 살폈다.

아무리 고개를 돌려보아도 최화란은 이 공간에 없었다.

그 대신 장은우는 널찍한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남자는 말 없이 장은우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장은우는 반사적으로 블라우스에 끼워두었던 선글라스를 다시 얼굴에 올려 썼다.

‘저건 뭐야. 최 사장이 부리는 애인가?’

눈을 피하지 않는 남자에게 불쾌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장은우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 남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너무나 낯이 익다.

또각또각━

장은우는 저도 모르게 남자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얘. 사람 첨 보니? 버릇없이 어디 그렇게 계속 쳐다봐. 최화란 사장은 어딨어? 오늘 나랑 만나기로 했는데.”

남자의 야코를 죽여놓겠다는 듯 장은우는 대뜸 말부터 깔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남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내 말 안 들려? 너 벙어리니?”

장은우의 계속된 추궁에 마침내 남자의 입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최화란 사장은 오늘 여기에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듣기 좋은 미성(美聲)

하지만 남자의 말 속에는 장은우가 듣고 싶었던 내용이 없었기에, 그녀의 미간이 내용물을 씹고 버린 껌 종이처럼 찌푸려졌다.

“··· 뭐?”

“그것보다, 저를 알아보지 못하시는군요. 전 한영수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실까요?”

··· 한영수!

마침내 장은우는 이 남자가 왜 낯이 익은지 기억해낼 수 있게 되었다.

“너··· 네가··· 왜···”

* * *

- 은수 형이라면 어떻게든 널 밟으려고 할 것이고, 누나는 철저하게 널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테지.

언제가 은호 형이 나에게 했던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장은우 사장은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너··· 네가··· 왜···”

내가 이름을 밝히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에게 유의미한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늘 장 사장님이 만나야 할 사람은 최 사장이 아니라 바로 저입니다.”

“...”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난 그녀는 심히 당황했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형이 여기서 왜 나와.

한때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밈.

지금 장은우의 얼굴은 딱 그 예능인의 표정이었다.

장은우 사장의 침묵은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몹시나 길었다.

열심히 떠들어대는 것보다 오히려 이 침묵이 더 많은 체력을 소모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는 진이 빠진 모습이었다.

하기야, 인생이 얄궂다고 생각되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 시계를 사겠다고 백화점을 갔을 때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던 장은우 사장.

그때만 해도 내가 나와 반쪽만큼 피를 공유하는 그녀를 다시 보게 될 일은 없을 거라고 장담을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얼굴을 맞대게 될 줄이야.

“앉으세요.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장은우 사장은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앉으라는 내 말까지 사양하지는 않았다.

나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배다른 누이.

장은우는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떨리는 손으로 벗었다.

마침내 마주하게 된 그녀의 맨눈.

그 눈 속에서 나는 혼란을 느낄 수 있었다.

“가족이 처음으로 만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장소군요.”

“··· 네가 왜 내 가족이야. 누구 마음대로.”

예상했던 대로 장은우는 차갑게 말했다.

그렇다고 내가 상처받을 것은 없었다.

나 역시 가족이라는 말을 진심으로 한 것도 아닐뿐더러, 그녀의 날선 반응이 자기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에 기인했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 사장이랑 너랑은 무슨 관계인 건데.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냐고.”

장은우 사장은 어떻게든 지금 이 판을 정리해보려 애를 썼다.

그래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아주 일부분만, 조금씩 보여줄 생각이었고, 그림 전체를 보기 전까지 장은우 사장은 안개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으리라.

“그건 잘못된 질문이군요. 지금 이 자리에서 중요한 것은 장은우 사장님과 저와의 관계입니다.”

“말했잖아.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난 네가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야.”

나는 양쪽 입꼬리를 올렸다.

“사실 저도 여기에 혈육과의 감동적인 만남을 기대하고 온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한 관계라는 건 조금 다른 이야기에요. 장 사장님과 저는 어쩌면 피보다 더 질기고 무서운 것으로 이어져 있달까요.”

물음표.

장은우의 머리 위에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물음표가 아주 크게 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이제 힌트를 조금 풀어볼까.

“돈. 장은우 사장님이 최 사장으로부터 가져다 쓴 800억. 그건 모두 제 돈입니다.”

장은우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 뭐? 네가 아버지한테 받은 건 고작 500억이잖아. 어디서 800억이 나와. 그 전에 너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장은우가 차마 하지 못했을 말을 가만히 유추해보았다.

이런···

장은우 사장은 정말로 나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었구나.

지금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어디에 서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구나.

“뭐 이래저래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제 돈을 가지고 그렇게 해외를 열심히 다니시더군요. 솔직히 저는 잘 이해가 안 됩니다. 모든 걸 가졌다고 말해도 좋을 사람이 도박에 빠진다는 게.”

장은우는 내 말을 듣고 불에 데기라도 한 듯 몸을 움찔거렸다.

그것도 잠시, 장은우의 눈에서 사나운 불길이 솟구쳐 올라왔다.

“이 새끼나, 저 새끼나···”

그야말로 야차와 같이 험악한 얼굴이 된 장은우 사장.

“···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날 협박하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얼굴 푸세요. 사실 장은우 사장님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습니다. 그런 제가 협박을 한다니 너무 넘겨짚으시는 것 같군요. 물론 사장님의 아버지에게는 유감이 있긴 하지만 그건 이것과 별개의 문제지요.”

나와 닮은 눈을 가진 여자.

그 눈을 바라보며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길 누구보다도 장 사장님이 원치 않았을 겁니다. 그저 재벌가의 일탈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일이 조금 커지기도 했지요.”

“800억, 그 정도 돈을 내가 해결 못 할까 봐? 지금 당장이라도···”

“한화로 약 1조 2천억 원.”

나는 장은우 사장의 말을 잘랐다.

“세상에 공개된 장은우 사장님의 재산입니다. 뭐 아직도 끝나지 않은 장영복 회장님의 유산 상속이 마무리되면 더 늘어나기야 하겠지만··· 아무튼 저 재산의 대부분은 현금이 아니라 주식과 부동산으로 묶여 있을 텐데요. 갑자기 현금 800억을 만든다는 게 지금 장담하시는 것처럼 쉽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 돈을 만든다고 해도 세상의 눈을 피해 전달할 재주가 있으십니까?”

장은우 사장은 아무런 반박도 못 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래서 제가 이 자리에 장은우 사장님을 부른 겁니다. 저와 친해질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쓸데없이 적대시할 이유도 없습니다. 저는 그저 거래를 하나 제안하고 싶습니다.”

“··· 거래? 뭐, 이제 와서라도 아버지의 자식으로 인정받는 걸 도와달라기라도 하라는 거야?”

하하하━

절로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쩌면 이렇게 본인들 입맛대로만 생각하는 건지.

“만약에 그걸 바란다면 사장님의 도움이 뭐가 필요했겠습니까. 유언장 안 보셨습니까? 장영복 회장님은 생전에 이미 본인의 자식이라고 저를 인정했고, 사장님이 보기에는 아주 적은 돈이겠지만 유산도 남겼습니다. 만약 친자라는 걸 인정받고 싶었다면 진작에 발바닥에 땀 나도록 법원을 들락거렸겠죠.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건···”

나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었다.

“내가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순간 장은우는 나의 기세에 눌린 것이 분명했다.

이를 꽉 깨물고 도전적인 태도를 보이던 장은우의 얼굴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 도대체 뭘 제안하겠다는 건데.”

“합리적인 거래. 우리 둘 다 윈윈할 수 있는 그런 거래 말입니다. 제가 지금 장은우 사장님이 처해있는 상황을 모두 깨끗하게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제 말을 따르시면 장은우 사장님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사람들에게 박수받는 능력 있는 경영자, 그리고 대한민국 여자들의 선망을 한 몸에 받는 인플루언서로.”

“거래니까 당연히 공짜는 아니겠지. 내가 치러야 할 대가는?”

“몇 가지 약속만 해 주시면 됩니다. 그건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악당은 아니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 장은우 사장님이 얻을 것에 비하면 아주 약소한 것이 될 테니까요.”

장은우 사장은 입을 꾹 다물었다.

또다시 무거운 침묵이 우리 둘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이번 침묵은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나름의 결실을 가지고 왔다.

“그래. 들어나 보자. 그럼 내가 뭘 하면 될까?”

“일단 지금 가지고 있는 영광 산업개발 주식 정리하세요. 당장, 전부 다.”

장은우는 뭐라고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마도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느냐고 떠들려다 자포자기해 버린 것 같았다.

“거기서부터가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만약 정신 못 차리고 계속 그걸 쥐고 있는다면 저는 사장님을 도와드릴 수가 없습니다. 며칠만 두고 봅시다. 아마 저에게 고맙다고 절이라도 하고 싶어질 테니.”

이민욱 기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