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어떤 남매 (1)
“여보세요.”
“예. 한영수 씨 맞으시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온 것은 고왕 건설의 회장실에서 한참 업무를 보고 있을 때였다.
어머머, 잘 지내셨어요? 라며 높은 톤으로 퍽 친한 척을 하며 곰살궂게 구는 여자의 목소리는 낯설기만 했다.
“제가 한영수는 맞는데··· 실례지만, 어디시죠?”
“여기 부동산이에요.”
“부동산이요?”
단박에 머릿속에 떠오른 건 내 앞으로 되어 있는 압구정의 아파트였다.
송림 프라자 건물이라면 건물 관리인을 따로 고용하고 있으니 나에게 부동산이 직접 연락해올 리가 없다.
세입자랑 무슨 문제가 있기라도 한 건가?
세입자와의 월세 550짜리 계약이 올 8월까지라고 했었다.
만약 어머니가 살아있었다면 우리 모자가 살았을지도 모르는 집이다.
하지만 나의 출생과 더불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면서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30년이 지나서야 나에게 돌아온 그 집에 특별한 애정이 있을 리 없었다.
차라리 정리를 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지금은 집을 팔기에는 영 좋지 않은 시기다.
그저 때 되면 꼬박꼬박 월세 들어오겠거니 하고 잊고지냈던 참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세입자가 이사라도 나간다던가요?”
상대가 아직 신분을 밝히지 않았음에도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뱉었다.
“세입자요? 세입자는 한영수 씨죠.”
아···
이런, 완전히 헛다리를 짚었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정작 나 역시 아직 세를 들어서 사는 처지라는 걸 깜빡했던 것이다.
“전세 계약 만료 3개월 전이에요. 알고 계시죠?”
“아··· 예.”
네라고 선선히 대답했지만 벌써 그렇게 되었나 싶었다.
주변의 일에는 그렇게도 촉각을 내세웠으면서, 정작 나 제 일에는 제대로 신경을 못 쓰고 있었구나.
“어떻게 하시려고요? 계약 연장하실 건요? 어디 보자··· 1억 2천짜리네요? 집주인분이 계약 당시에 시세보다 참 가격을 좋게 주신 건 알고 있죠? 정말 그분이 인품이 훌륭하신 분이라니까.”
부동산 여자는 속사포처럼 말을 쏴대었다.
어찌나 말이 빠른지 그녀의 언어 사이에는 내가 낄 틈이 없었다.
“저기, 그런데 말이에요.”
집주인에 대해 입이 마르게 칭송하던 여자가 갑자기 목소리를 한 톤 낮췄다.
이런 경우 십중팔구는 이제부터가 진짜 본론이기 마련이다.
“계속 살 거면 혹시 월세는 생각 없어요?”
“월세요?”
“그래요. 주인분이 월세로 돌리고 싶어 하시네. 뭐, 세입자분한테도 나쁜 거야 없지. 요즘 금리가 보통이에요? 월세나 은행 이자나 그게 그거 아니겠어요?”
일 년 전쯤의 나였으면 지금 저 여자의 말에 꽤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월세를 얼마를 달라고 할까?
전세로 계속 살겠다고 하면 분명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하겠지?
그 돈은 또 어디서 구해야 하나.
이런 생각들로 전전긍긍했을 거란 말이다.
하지만 지금 저 여자의 말은 나에게 그 어떤 위기감도 주지 못했다.
이것 역시 돈이 나에게 준 혜택이라고 할 수 있겠지.
“월세 놓으시라고 하세요. 저는 계약 만료되면 바로 이사 나가겠습니다.”
“어머, 그래요?”
부동산 여자는 나의 시원스러운 대답에 반색했다.
임대인과 임차인 간의 귀찮은 의견 조율을 피할 수 있으니 오히려 좋다는 기색이었다.
“예. 주인분께도 그렇게 의사를 전해주세요. 감사히 잘 지냈다고.”
“아휴, 그래요. 알겠어요.”
옳거니 하며 여자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이사를 하게 생겼구나.
역시나 이젠 내 집이 있어야겠지.
조금 기다렸다가 압구정 아파트에 들어가서 살아도 되겠지만 그건 그리 내키지 않는다.
나도 은호 형님처럼 그럴듯한 저택을 짓고 살아볼까?
어찌 되었건 큰돈을 쓰게 되겠군.
의외로 붙어있는 0의 숫자를 세는 것이 어려울 정도의 재산이 생긴 뒤에도 소비에 있어서 나의 삶은 상식선을 벗어나진 않았다.
눈 딱 감고 억 단위의 외제 차를 하나 산 것을 제외하면,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예의를 지키기 위해 비싼 옷을 몇 벌 맞췄을 뿐이다.
평생 부유하게 살아본 적이 없으니 어찌 돈에 대해 한이 없겠는가.
그래도 그 한을 풀겠다고 누군가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만큼의 사치와 향락에는 빠지지 않았으니, 그 점은 스스로를 칭찬해도 될까?
의자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 채 잠시 과거를 반추했다.
대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고시원으로.
그리고 고시원에서 또 원룸 몇 곳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오게 된 곳이 지금까지 살고 있는 집이었다.
생각해보면 지독한 떠돌이의 삶이었다.
이제는 뿌리를 내리자.
난파선처럼 파도에 밀려다니며 그때, 그때 상황에 맞춰 살았던 삶은 안녕이다.
* * *
경영과 소유의 분리를 야심 차게 천명하며 회장 자리에 올랐지만, 에메랄드 시티 프로젝트에 있어서는 도저히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었다.
하루하루가 회의의 연속이었으며, 직접 얼굴을 비춰야 할 곳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어디 그뿐이랴.
보고서와 서류들은 아무리 읽어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래도 묵묵히 신입사원의 자세가 되어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했다.
이미 지난주에 카타르 현지로 팀을 파견한 뒤였다.
인천 공항까지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따라간 나는 뜨거운 목소리로 그들의 무운을 기원했다.
다행인 것은 이런 열정이 조금씩 나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을 변하게 했다는 것이다.
고작 30대에 불과한 정체불명의 회장에게 어찌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그들의 불안과 우려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더욱 내 진심을 보여주려 애를 썼다.
“새 회장님 말이야. 가만 보니까 역시 젊은 사람이라서 그런지 확실히 합리적인 면이 있어.”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TF팀 지원했어야 했는데··· 에메랄드 시티 프로젝트 그거 주가 뻥튀기해서 먹튀 하려고 회장이 여론몰이하는 건지 알았지.”
“먹튀는 무슨, 윤 회장보다야 지금 회장이 훨씬 낫지 뭘. 몇 달 전 분위기 생각해봐. 다들 누가 짐 쌀지 몰라서 회사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었었잖아.”
“젊은 사람이 뭘 하겠냐 싶었는데, 임원들이 꼼짝 못 하게 하는 거 봐. 얼굴만 봐도 뭐랄까, 카리스마가 있어. 카리스마가!”
“에이. 제가 봤을 때는 카리스마보다는 정말 겸손하신 분이던데요. 그 자리에 있으면 목에 깁스할 만 도 한데, 직원들뿐만 아니라 경비 보시는 분들한테도 공손하게 인사하더라고요.”
나에 대한 우호적인 말들이 온갖 뜬소문들과 억측을 압도하기 시작하면서 이제서야 ‘기업 사냥꾼’이라는 오명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똑똑━
회장실의 문을 두들기고 비서실 직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회장님. 오늘은 이제 더 일정이 없으십니다.”
“아··· 벌써 시간이.”
나는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김 비서님 들어가셔야지요.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저··· 회장님께서는.”
“저는 보던 게 남아서 마저 보고 들어갈게요. 그리고 앞으로는 퇴근하실 때 일부러 저한테 말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간 되면 편하게 들어가세요.”
“최 기사님께는 뭐라고 말씀드릴까요? 대기하시라고 할까요?”
“아닙니다. 들어가시라고 해요. 자가용으로 퇴근하겠습니다.”
내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김 비서는 허리를 한번 숙인 뒤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는 두 팔을 들어 기지개를 한번 쭉 폈다.
“잠깐 몸이나 풀고 올까···”
회장 자리에 오르고, 사실 회삿돈으로 개인적인 욕심을 채운 게 딱 하나 있었다.
바로 회사 건물 안에 있는 체력 단련실을 싹 뜯어고친 것.
명목상 있는 것이다 보니 규모도 크지 않고 녹이 잔뜩 쓴 낡은 기구 몇 개와 러닝머신이 전부인 곳이었다.
시설이라고 하기에 민망스러운 수준이다 보니 이용하는 직원은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헬스 마니아로서 참 마음 아픈 광경이었다.
그래서 직원복지를 명목으로 싹 뜯어고쳤다.
자애짐처럼 고급 수입 제품으로 채우기에는 조금 눈치가 보여 가성비가 훌륭한 국산 기구들로 새로 채웠다.
한쪽에는 여직원들을 위해 필라테스 기구까지 몇 들여놓았다.
뒷말로 듣기에는 총무부에선 운동 기구 브랜드와 그 기구들의 배치까지 콕 찍어 말하는 나를 보고 회장이 뭘 저런 것까지 신경을 쓰냐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나의 요청은 진지했고, 총무부는 내 요청에 맞게 예산을 편성해주었다.
그 결과로 30분만 머물러도 파상풍에 걸릴 것 같던 공간은 제법, 아니 나름 훌륭한 운동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당연히 직원들의 반응은 몹시나 좋았다.
회사 내에 헬스 동아리까지 자연스럽게 생겼다는 모양.
“아니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퇴근 시간과 맞물린 지금 체력 단련실을 찾아가 봐야 운동하는 직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것이다.
온종일 업무로 쌓인 스트레스를 운동으로 풀고 있을 그들에게 나의 등장은 부담감이 될 수도 있을 터.
차라리 퇴근 후에 자애짐에 가서 속 편하게 하는 것이 낫다.
나는 다시 책상에 내려놓았던 서류를 집어 들었다.
웅웅━
그렇게 서류를 채 몇 장이나 겨우 넘겼을까, 핸드폰이 부르르 몸을 떨며 자신의 존재를 나에게 알려왔다.
최화란이었다.
“한 대표 바빠? 요즘 통화가 어렵네.”
“최근에 좀 그랬어요. 말씀하세요.”
“으흥, 난 전화 안 받길래 BH에서 나 내쫓고 진짜 손절하려나보다 섭섭했던 거 있지?”
“내쫓기는··· 우리가 보통 사이입니까. 같은 스승님 밑에서 배운 동문 아닙니까.”
내 말에 최화란은 쿡쿡 웃었다.
“나야 스승님에게 파문당한 제자고, 직계 제자는 자기지. 그래, 어쨌든 알려줄 게 있어. 장은우 사장 이야기야. 한 이주 전쯤인가?”
장은우 사장.
그녀가 지금까지 최화란을 통해 끌어다 쓴 내 돈은 물경 800억에 달했다.
액수도 액수지만, 그보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10억, 20억에서 시작해서 저 큰돈을 빌려 가기까지 걸린 시간이 불과 두 달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요. 돈이 더 필요하답니까?”
“아니. 이번에는 다른 소리를 하더라고.”
“··· 다른 소리요?”
“그래. 차명계좌로 주식을 사고 싶다고 하더라고.”
주식?
이번에는 또 무슨 바람이 분 걸까.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미 수백억을 속된 말로 도박에 꼬라박았으니 아무리 재벌일지언정 장은우의 정신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 멀쩡하지 않은 정신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요.”
“당연히 안될 이유가 없으니 가능하다고 말해주었지. 그랬더니 남은 돈을 영광 산업개발이라는 회사에다가 몰빵 쳐달라지 뭐야?”
“잠깐만요. 어디라고요?”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되물었다.
순간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회사 일에 대한 고민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정도였다.
“영광 산업개발. 곰곰이 따져보니까 장 사장이 들어가고 난 뒤로만 따져도 주가가 20%나 올랐더라고. 뒷골목 소문에서는 이 회사 대표에 대해 말이 많던데. 유력 정치인이 뒷배라는 말도 있어. 이거 재벌가까지 돈을 집어넣는 거 보니까 나도 슬금슬금 관심이 생기더라고.”
“관심 접어두시는 게 좋을걸요. 실체 없는 깡통이에요. 완전 개미지옥. 그나저나 계좌는요. 돈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습니까.”
“그렇게 미친 듯이 돈을 넣다, 뺐다 하더니 주식에 돈 들어간 이후로는 전혀 움직임이 없어. 지금 계좌는 그냥 텅 비어있는 상태야.”
최화란의 말을 듣자 느낌이 왔다.
무슨 사연 때문인지까지는 모르겠으나 장은우 사장이 도박에서 손을 털었구나.
아마도 자의에 의한 것은 아니겠지.
어쨌든 빌린 돈은 최대한 조용한 방법으로 메꿔놓아야 할 테니 남은 돈으로 천장을 사정없이 때려 부수고 있는 영광 산업개발에서 반전을 노려보겠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장은우 본인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수많은 개미들을 비탄에 잠기게 할 사기극의 막을 올려준 셈이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큰돈이 한꺼번에 들어온 것을 알게 된 설계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드디어 정리할 때가 왔다고 여길 것이다.
배불리 먹었으니 이제 구린 것을 쏟아내고 튀어버리자고.
이미 정영목이라는 자는 제가 가진 지분들을 야금야금 팔아치우며 엄청난 시세 차익을 거두고 있으리라.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때였다.
제법 쓸만한 묘수가 그려졌다.
“최 사장님.”
“응?”
“사장님 밑에서 일하는 사람 몇 명만 당분간 제가 좀 쓸 수 있을까요? 그 사람들 일당은 제가 감당할 테니까.”
“그거야 어렵지 않은데. 어디다 쓰려고.”
“나중에··· 저한테 계획이 좀 있어요. 그리고 말이죠.”
내 입으로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말.
나는 그 말을 최화란에게 전했다.
“직접 장은우 사장을 좀 만나보고 싶습니다. 자리를 만들어주세요. 그쪽에는 나라는 사람이 나갈 거라고 미리 말하지는 말고요.”
어떤 남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