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에메랄드 시티 프로젝트
“어서들 들어오세요. 괜히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들 하셨습니다.”
이종현 사장을 비롯해, 에메랄드 시티의 선발대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질 카타르 TF팀이 명동 복희 할머니의 집을 방문했다.
우리 시간으로 어제 새벽 2시.
카타르의 수도, 도하에서는 에메랄드 시티 프로젝트의 성대한 콘퍼런스가 있었다.
세계적인 부국답게, 그 콘퍼런스는 마치 올림픽이나 월드컵의 개막식을 방불케 했다.
나는 새벽에 라이브로 현지 영상을 시청했다.
영상을 다 보고 나서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너무 설레서 잠을 못 이뤘냐고?
천만에.
어둠 속에서 뜬 눈으로 나는 불안과 두려움에 맞서 엉망진창으로 진흙탕 싸움을 해야만 했다.
콘퍼런스 영상 속에서는 도하 시내 전체를 밝힐 만큼 화려하고 성대한 불꽃놀이가 거의 삼십 분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나는 그 진귀한 구경거리를 도저히 즐길 수가 없었다.
하늘 위에서 오색 빛으로 터지는 폭죽들이 마치 내 살가죽을 뚫고 파고드는 흉탄(兇彈)처럼 느껴졌다.
네가 지금 감당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알아?
한영수, 너는 건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런데 네가 사람들을 이끌고 세계가 주목하는 사업에 뛰어들겠다고?
넌 기껏해야 운 좋게 벼락부자가 된 사생아에 불과하다는 걸 알잖아.
절대 성공할 수 없어.
고왕 건설은 큰 망신을 당하게 될 거야. 네 욕심 때문에!
내 안의 악마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를 흔들었다.
그 사악한 존재는 조롱과 모욕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고윤아를 당장이라도 부르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만 했다.
그녀를 품에 안고 나약함이라는 이름의 이 악마를 떨쳐내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것을 핑계 삼아 그녀를 찾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그 대신에, 이를 악물고 나와 인연을 맺은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이제 나에게 의지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두려움을 외면해서도, 굴복해서도 안 된다.
나를 믿고 기꺼이 함께 발걸음을 맞춰주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비겁하게 도망칠 수는 없다.
그렇게 악마와의 싸움에서 조금씩 승기를 잡아갈 무렵, 창밖으로 시퍼런 새벽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 길로 침대에서 일어나 명동을 향했다.
그곳에서 머리를 비우고 싶었다.
이종현 사장에게 전화가 온 것은 아침 해가 뜨고도 한참 뒤, 마당에서 잡초를 뽑으며 소일거리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곧 회사로 출근하겠다는 내게, 이종현 사장은 TF팀과 함께 명동으로 찾아뵙겠다고 말했다.
뒤숭숭한 분위기는 그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나와 이종현 사장.
그리고 태상 건설에서 건너온 임원 몇몇과 특별히 가려 뽑은 고왕 건설의 직원들까지.
우리는 안방에 둥글게 모여 앉았다.
“회장님. 물론 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콘퍼런스 영상 편집본을 같이 다시 한번 시청하시지요.”
이종현 사장이 눈짓을 보내자 오재석 대리는 기민한 동작으로 준비해온 노트북을 펼쳤다.
- Thank you for attending the Emerald City project presentation. Emerald City is an eco-friendly future city and will become the capital of the world without borders···
개회사는 카타르 국왕의 몫이었다.
그는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능숙하게 에메랄드 프로젝트에 자신이 걸고 있는 포부와 기대감을 숨김없이 밝혔다.
과연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전면에 국왕이 직접 나설 것이라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국왕이 개회사를 마치고 물러나기 무섭게 대형 전광판에서 에메랄드 시티의 홍보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영상의 시작은 셰이크 알리 빈 모하메드 국왕이 구단주로 있는 AS 파리 소속의 축구 선수가 장식했다.
전설을 써내려가다 말년에 밉상짓으로 축구 흉물이 되어버린 라이벌과 달리 역사상 최고, ‘GOAT’라는 것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위대한 선수.
그 선수는 자신도 에메랄드 시티의 프로젝트에 많은 관심이 있으며, 언젠가 그 미래도시에 소속된 시민의 한 사람이 되길 기대한다는 폭탄 발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돈의 힘이 대단하긴 대단하구만. 저 친구가 저런 립서비스를 다 하고···”
함께 동영상을 보던 TF팀의 누군가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종현 사장은 내 눈치를 보며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주의를 주었다.
틀린 말도 아닌 걸 뭐.
카타르의 국왕 셰이크 알리 빈 모하메드는 개인 재산만 추정 1,000조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다.
도무지 가늠되지 않는 천문학적인 재산을 가지고 있는 그의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이는 세상에 몇 없을 것이다.
홍보 영상이 끝나고, 카메라는 초대석을 비추었다.
그리고 초대석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얼굴인 장은수 회장을 찾을 수 있었다.
장은수 회장은 활짝 웃는 얼굴로 연신 손뼉을 치고 있었다.
화면에 그가 스쳐 지나가자 얼굴이 미묘해지는 이들이 있었다.
장은수 회장에 의해 태상 건설에서 내쳐진 사람들.
인공지능 기반 미래형 도시, 지속 가능한 친환경 생태계, 국경 없는 세계의 수도···
유호성 차관이 귀띔해준 대로 연단에 올라 열정적으로 에메랄드 프로젝트에 관해 설명하는 것은 왕세자가 아닌 아메드 빈 알리 제 2 왕자였다.
펑퍼짐한 알 아바를 입고 있었지만, 건장한 체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는 무척이나 젊었으며, 선 굵은 미남이었다.
“다른 경쟁사들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동영상이 끝나고 나는 TF팀을 향해 물었다.
“다들 아직은 조용합니다. 에메랄드 프로젝트를 뜬 소문으로 치부하는 것이 업계 전반에 퍼져있던 분위기인지라··· 하지만 카타르 국왕이 직접 프로젝트 발표회에 참가한 것을 보았으니 엇, 뜨거 싶겠지요. 그래도 저희는 진작부터 TF팀을 조직해 대비했으니 나름 한발 앞서가는 셈입니다. TF팀 일부를 다음 주에 현지에 파견할 예정입니다.”
TF팀의 박 상무가 말했다.
그는 이종현 사장이 나에게 가장 먼저 추천한 인사였다.
“그렇다면 지금 국내에서 제일 앞서가고 있는 것은 태상 건설이라고 해도 되겠군요. 그 뒤를 우리가 따라가는 형국이고··· 장은수 회장이 저렇게 현지에 초대까지 받았으니 말입니다.”
“태상 건설은 워낙에 중동 커넥션을 탄탄하게 쌓아놓았습니다. 아쉽지만 그 점은 승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종현 사장이 씁쓸하게 말했다.
“제가 알기로 사장님도 실무자로서 중동에서 많은 이력을 쌓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TF팀이 다음 주에 건너가서 맨땅에 머리를 박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선이 닿는 데까지 힘을 좀 써주세요.”
“예. 그렇지 않아도 이곳저곳 알아보고 있습니다. 영향력 있는 인사에게 우리의 사업 참여 의지를 보여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나는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침묵이 고요히 깔렸다.
선뜻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어젯밤 그랬듯이, TF팀 역시도 많은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셨다.
들숨에 허파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나는 저들의 대장이다.
비록 내가 기술적으로 무언가 떠들지는 못할지언정 사기만은 바로 세워주어야 할 것 아닌가.
“사장님, 그리고 새롭게 고왕 건설에 합류한 임원 여러분들.”
호명받은 이들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기회가 왔습니다. 제가 그 기분을 감히 속속들이 헤아리지는 못하겠지만 분명히 복수심에 굶주리고 계셨을 거로 생각합니다. 경영의 신이라는 그 장영복 회장님의 수족 같은 분들 아니십니까. 그 정도 승부 근성은 당연히 가지고 계시겠지요.”
“...”
저들의 한을 잘 알고 있었다.
회사를 위해 헌신해왔지만, 박수받지 못하고 퇴장할 수밖에 없었던 그 비참함을.
그리고 분명히 보았다.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몇몇 눈에 불꽃이 튀는 것을.
“증명해 보이세요. 때마침 우리의 앞에 태상 건설이 뛰어가고 있습니다. 저들을 후회하게 만들어줍시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조 상무님.”
“예. 회장님.”
윤 회장 시절부터 고왕 건설의 재무를 책임지던 조 상무.
나는 그를 있던 자리에 그대로 유임시켰다.
조 상무는 엄밀히 말하면 TF팀 소속은 아니었지만, 추후 뒤에서 총알을 보급하는 역할을 맡을 예정이었다.
“고왕 건설이 분명히 업계 1위이던 시절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 예. 70년대에서 80년대 초반까지 국내 건설사 1위는 저희 고왕 건설이었습니다.”
“저도 입사원서를 낸 적이 있으니 고왕의 역사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고는 있습니다만···”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다른 대기업들과 다르게 우리 고왕 건설은 여전히 건설업 외길에만 집중해왔지요?”
“예. 그 ··· 리조트 사업이라든지.”
조 상무는 머쓱한지 잠시 헛기침을 했다.
“외도를 잠시 한 적도 있지만, 어쨌든 우리 그룹의 기조는 항상 건설이었습니다.”
“예. 그래서 자본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지만 남부럽지 않은 기술을 쌓아왔구요.”
한때 업계 1등이었던 그 역사를 기억해내라.
당신들의 선배들이 해낸 일이다.
그리고 이제 당신들이 그 바통을 이어받을 차례다.
고왕 건설의 직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내 말의 속뜻을 알아들었는지 TF팀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기존 고왕의 팀원들이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은 자세를 바로 했다.
“언급하기는 싫지만, 전 회장님의 여러 가지 실책에도 고왕이 꿋꿋이 명맥을 유지한 것은 조 상무님을 비롯해 직원 여러분의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 과거의 영광만 사탕처럼 핥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 사업을 계기로 고왕 건설을 다시 정상까지 끌어올립시다. 이건 저만의 의지로는 불가능합니다. 고왕 건설. 아니, 고왕 그룹 임직원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나의 말이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마음속에 불을 댕기길.
그리고 이들이 그 불을 같이 일하는 직원 모두에게 전파할 수 있게 되길.
“··· 회장님.”
그때였다.
불쑥 김영남 차장, 아니 부장이 나에게 서류뭉치를 쓱, 내밀었다.
“카타르 왕족과 고위층에 대한 정보와 성향을 정리했습니다. 중동은 우리와 문화가 아주 다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이 사업의 시작이고, 성패가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두꺼운 서류의 양에서 김 부장이 쏟은 시간과 노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는 기꺼이 김영남 부장의 진심 어린 성의를 받아들였다.
“예. 좋습니다. 앞으로도 TF팀은 지금 김 부장님처럼 계선을 따지지 말고 제가 알아야 할 것이 있으면 바로 말씀 주셨으면 합니다. 이 팀의 막내가 오재석 대리님인가요?”
“예! 회장님!”
나는 일부러 오재석 대리를 불렀다.
오 대리는 바짝 얼어붙은 이등병처럼 필요 이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오 대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치 보지 말고 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언제든 하세요. 회장실을 직접 찾아와도 좋고, 전화나 문자메시지··· 뭐든 가리지 않겠습니다.”
마침내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비록 저 콘퍼런스에 초대받는 행운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가면 됩니다.”
* * *
“사장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이종현 사장만을 자리에 남긴 채로 나머지 TF팀을 물렸다.
“예. 회장님. 말씀하시지요.”
“아메드 빈 알리 왕자 말입니다. 상반기 내에 방한할 것 같습니다.”
“예? 그걸 어떻게···”
이종현 사장은 토끼 눈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대통령과의 회담입니다. 오프더레코드로 들은 이야기에요. 사장님도 듣고 입단속 부탁드립니다.”
“··· 아메드 빈 알리 왕자가 방한한다면 역시나 에메랄드 시티 건인데.”
역시나 이종현 사장은 '척'하면 척이었다.
“아마도 국내 재계인과의 만남도 짧게나마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어떻게든 거기에 한 자리 비집고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이종현 사장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쉽지 않을 텐데요. 재계 순위로만 따지면야 저희는 한참···”
“어차피 앞으로 쉽지 않은 일들만 있을 겁니다. 어떻게든 해봐야지요. 나름 밑밥은 깔려있습니다. 저는 저대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장님도 해 주셔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 책임감을 통감한다는 듯, 이종현 사장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저는 오늘 하루 쉬겠습니다. 아까 센 척하면서 열심히 떠들었지만, 사실 저··· 어제 한숨도 못 잤습니다.”
“어쩐지 안색이 피곤해 보이셨습니다.”
이종현 사장은 사람 좋게 웃었다.
“이제 시작이군요.”
“예. 이제 시작입니다.”
그와 나는 같은 말을 번갈아 하며 서로의 뜻이 같음을 확인했다.
어떤 남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