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제 무덤을 파는 여자
“여기. 오빠가 전에 하나 받아 달라고 말했던 리미티드.”
여기는 태상 건설 본사의 회장실.
장은수, 장은우 남매는 장은수의 출장을 앞두고 둘만의 회담을 하고 있었다.
장은수는 다음 주에 있을 ‘에메랄드 시티’ 컨퍼런스에 초대장을 받아 도하로 날아갈 예정이었다.
장은우는 일전에 패션 위크에서 얻어온 ‘돈으로도 살 수 없다는’ 특별한 명품을 자랑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장은수는 집무 의자에 앉은 채로 장은우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깟 명품이 무어냐는 듯 장은수는 동생의 선물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고맙다는 인사조차 없었다.
지금 두 남매의 포지션은 퍽 상징적인 행태를 보였다.
장은수는 깍지를 낀 채 그것을 자신에 턱에 대고 있었으며, 장은우는 선 채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장은우에 대해 조금 더 언급하자면, 그녀는 무언가에 쫓기듯 조급해 보였다.
“살이 많이 빠졌네. 안색도 영 형편없고. 너답지 않구나.”
장은수의 첫마디였다.
같은 말이어도 화자의 감정이나 의도에 따라 품고 있는 뜻이 천차만별로 달라지기 마련.
장은수는 동생의 안위를 걱정한다기보다는 물건을 품평하는 듯한 투였다.
그의 목소리는 오아시스를 단 한 번도 품어본 적 없는 사막처럼 건조하기만 했다.
“··· 오빠는 나이를 먹어도 예의가 없는 건 변하지 않네. 참 일관적이야. 이거 구하느라고 내가 얼마나 아쉬운 소리를 했는지 모르지? 고맙다든지, 수고했다든지. 오빠의 사전에는 그런 단어가 없나?”
장은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어쨌든 약속이나 지켜. 시저 홀에서 런칭쇼 할 거니까.”
장은수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아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귀족적인 몸동작이었다.
고개의 끄덕임이 멈추자 장은수는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무엇이 우스운 것일까.
장은우는 자신의 오빠의 웃음이 불안했고, 또 불편했다.
그녀가 알기로 장은수의 조소는 항상 누군가에게 나쁜 일을 불러왔었다.
이럴 때의 장은수는 마치 다 잡아놓은 사냥감을 가지고 잔인한 여흥을 즐기는 육식동물과 같았다.
뚜벅뚜벅━
장은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구두 굽 소리를 내며 장은우를 향해 걸어왔다.
그녀의 지척까지 다가와서야 비로소 멈춰선 그는 동생의 어깨에 손을 척하니 올렸다.
핏기 하나 없이 하얗고 마른 손.
손만 보자면 장은수와 이 자리에 없는 장은호가 형제라는 걸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장은우는 옷 위로 장은수의 손이 닿자,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마치 미끌거리는 피부를 가진 파충류가 달라붙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징그럽게 왜 이래?”
“시저 홀, 그렇지 않아도 태상 호텔에 대해서 내가 생각을 좀 해봤어.”
“생각? 무슨 생각.”
“은우야. 호텔 체인과 백화점 사업의 공통점이 뭘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장은수는 무언가 묻기보다 답을 결정짓기를 좋아한다는 걸 생각하면 이례적이기까지 했다.
“··· VIP들 위주로 경영을 해야 한다는 것?”
어쨌든, 오빠에게 얕잡아 보이기는 죽어도 싫었던 장은우였다.
장은우의 태상 백화점은 VIP들이 매출의 절반 이상을 책임져주고 있었다.
’호텔 사업도 매한가지겠지.’
“그래. 맞아.”
장은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장은우의 대답을 긍정해 주었다.
“은우, 너는 훌륭하게 백화점 사업을 이끌고 있지. 요 몇 년간 세상에 돈이 많이 풀린 덕을 톡톡히 보긴 했지만, 이유가 뭐가 되었건 매출도 큰 폭으로 성장시켰고.”
“웬일이야? 내 칭찬을 다 하고?”
“그만큼 네가 잘 해내고 있다는 말이야. 내가 생각했던 상상 이상으로.”
’그럼 도대체 뭘 상상한 건데.’
전혀 유쾌하지 않은 반쪽짜리 칭찬이지만, 장은우는 그 칭찬의 이면을 살피기 위해 장은수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살펴보았다.
장은수는 동생의 도전적인 눈빛을 잠시 마주 보다가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그래서 말이야. 나는 태상 호텔 체인을 네가 맡아서 해보면 어떨까 싶어.”
“··· 뭐?”
“지금 내가 소수민족의 언어로 떠들기라도 했나? 말 그대로야.”
장은우는 입가가 씰룩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태상 호텔!
만약 태상 그룹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을 하나 고르라면 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호텔 체인을 선택할 장은우였다.
‘이제야 내 가치를 알아주는구나. 그래. 진작 이랬어야지. 나야말로 총수 자리의 향방을 결정짓는 핵심 키라고.’
“자기 편을 들어달라는 말을 꽤 고급스럽게 하네? 좋아, 나야 뭐 거절할 이유가 없지.”
“··· 내 편?”
여동생의 말을 듣곤 장은수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시에 그의 눈이 길게 찢어지기 시작했다.
“또 착각을 하는구나. 태상 호텔을 맡아보라는 말은 순수하게 사업적인 측면, 딱 하나만 고려한 거야. 네 비위를 맞추기 위해 내가 뭘 할 필요는 없지. 실상 너는 이제 내가 하는 말을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거든.”
장은우는 장은수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은우, 내 동생이 지금 이렇게 입이 찢어지는 건 혹시 호텔에 딸린 카지노 때문일까?“
순간 장은우는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두 다리가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치마나 딱 달라붙는 바지를 입고 오지 않은 것이 다행일 지경이었다.
“··· 정신 나간 것.”
“내··· 뒤를··· 캐기라도 한 거야?”
“태상에 관련된 일이라면 사람들은 나에게 많은 것을 알아서 말해주지.”
짐작이 가는 것이 있었다.
장은우의 머리에 황 실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황 실장··· 이 썩은 고기나 먹는 사냥개 같은 인간이···’
장은수는 더 이상 비죽이 웃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칼 같은 안광은 장은우를 얼어붙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 매서운 눈빛은 장은우 안에서 저항의 의지를 순식간에 앗아가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오빠. 그게···‘
“입 다물어. 내가 묻는 것만 대답해.”
톡, 톡, 톡━
장은수는 피아노 건반 치듯 책상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얼마나 해 먹었어?”
“육··· 육십억.”
거짓말이었다.
라스베이거스, 마리나 베이, 마닐라, 몬테카를로···
세계의 카지노 성지를 돌며 장은우가 까먹은 돈은 무려 육백억에 이르렀다.
“설마 회삿돈을 가지고 장난질을 친 건 아니겠지?”
“아니야. 오빠, 맹세코 아니야.”
이건 정말로 사실이었기에 장은우는 자신 있게, 큰 목소리로 떠들었다.
“조용히 말해. 여기저기 다 소문낼 일 있어?”
“알겠어. 알았다고···”
회장실에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까칠하기 그지없던 장은우.
그녀는 이제 장은수 앞에서 말 잘 듣는 모범생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나를 어쩔 생각은 아닐 거야. 그러니까 호텔 이야기도 꺼냈겠지. 그래. 총수 자리에 오르려면 오빠는 내가 꼭 필요해.’
열심히 희망 회로를 돌리며 장은우는 오빠의 입을 바라보았다.
“만약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당장 너를 사장 자리에서 쫓아냈을 거야. 아니지, 아버지였다면 검찰에 자진 출두시켰을지도 몰라. 딸보다는 태상 그룹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한 양반이었으니까.”
“오빠, 오빠는 나 지켜줄 거지? 그렇지?”
장은우의 머릿속에 자신이 검찰의 포토라인 앞에 서는 모습이 그려졌다.
어디 그뿐이랴, 세상 모든 사람이 손가락을 놀려 자신을 비난하는 댓글을 달아대겠지.
어제까지만 해도 열심히 빨아대던 우매한 대중들이!
그런 망신만은 절대 안 된다.
더욱이 자신이 사랑하는 백화점 사업을 이런 일로 잃을 수는 없다.
“그래. 나는 아버지와는 다르지. 내 혈육을 벼랑 끝에서 밀지 않아. 미친 짓거리는 이제 그만 둬. 그리고 앞으로는 머리 굴리면서 딴생각 하지 말고. 호텔 건은 내가 총수 자리에 오르고 나면 다시 생각해보자.”
총수에 오르면···
과연 그 뒤에도 장은수가 입을 다물고 있을까?
장은우는 오빠를 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안 믿을 도리도 없었다.
그녀는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 시팔.”
장은우는 예쁜 입술에 어울리지 않는 욕설을 뱉었다.
사실 세상의 그 어떤 천박한 욕일지라도 지금 그녀의 기분을 표현하기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장은우는 가는 팔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차의 뒷문을 거칠게 열었다.
“··· 어, 사장님. 오셨습니까.”
차에서 대기하고 있던 운전기사는 실실거리며 핸드폰 화면을 보고 있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모시는 사람이 차에 올라탔음에도 바로 알아채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이 기사. 뭐가 그렇게 좋아요?”
장은우는 새된 목소리를 내질렀다.
자기는 지금 기분이 썩어들어가는데, 속도 모르고 싱글벙글인 운전기사가 마음에 들 리 없는 그녀였다.
“아, 잠깐···”
그제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이 기사는 미소를 얼른 거둬들였다.
“뭐냐고요. 왜 묻는 말에 대답을 안 해.”
“그게··· 주식을 좀.”
장은우는 기가 막혀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뭐 재미 좀 봤나 보네요?”
참으로 눈치가 없기도 하지.
이 기사는 장은우의 말에 쓸데없는 성실함을 발휘했다.
“예. 사장님. 혹시 영흥 산업개발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제가 반년 전부터 묻어놓았는데 벌써 수익률이 200%입니다.”
‘··· 200%? 요즘 주식 장 완전 박살이 났다고 하던데···’
“뭐야. 그거 누가 장난질 치는 거 아니에요?”
“아휴, 아닙니다. 사장님. 보세요.”
이 기사는 신이 나서 운전석에서 몸을 틀더니 장은우에게 차트를 보여주었다.
“이거 좀 보세요. 1년 동안 쭉 우상향이죠. 이 회사 대표이사가 세계 3대 투자자 중의 한 명의 양아들이나 다름없습니다. 아직 10배는 더 튈 거랍니다. 그것도 보수적인 관점으로.”
600억.
그동안은 한방 크게 따면 바로 갚을 수 있는 돈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장은우에게 있어 막막한 돈이 되어버렸다.
물론 그녀가 가진 재산을 헐면 충분히 변제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큰돈의 움직임은 분명히 세상의 시선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고, 무엇보다도 장은수의 레이더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장은수가 자신이 사채업자와 돈거래를 하고, 차명계좌까지 돌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장은우였다.
“뭐 하는 회사인데요? 거기가?”
절박함에 귀신이라도 씐 걸까.
장은우는 묻지 말아야 할 것을 이 기사에게 묻고 말았다.
“지금 당장보다 앞으로의 비전이 좋습니다. 미국의 큰 정유 회사와 합작해서 셰일 가스 사업을 내년 중에 시작할 예정이라네요.”
‘그래? 나름대로 소스는 있단 말이지?’
이 기사 말대로 10배까지는 아니더라도 3배, 아니 2배만 올라도···
‘그래. 최화란, 그 사채업자랑은 총수 선출을 위한 사장단 회의 전까지만 깨끗하게 정리하면 돼. 아직 시간은 충분하지. 도박에 손을 대다니 내가 잠깐 미쳤었던 게 틀림없어. 누구나 살면서 실수할 때가 있잖아? 새 출발 하자. 호텔 체인이랑 백화점을 묶어 나도 회장 소리를 듣는 거야.’
장은우는 속으로 나름의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태상의 철없는 공주님은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다짐과 별개로 그녀는 여전히 도박 중독자였다.
다만 이제 그 도박을 합법의 경계 안에서 하려고 하는 것일 뿐.
에메랄드 시티 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