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35화 (129/200)

135. 정실 전자 인수

재미있는 일이라.

사실 지금 나는 영광 산업개발에 대한 흥미를 급속도로 잃어가는 중이었다.

그렇지 않겠는가.

지금 내 머릿속에는 장은우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나의 배다른 누이가 생각지도 못하게 덫 안으로 들어왔고, 그로 인해 벌어질 가능성을 따져보느라 바빴다.

몽상가들의 단체 광기와 그 광기에 올라타 한몫 단단히 챙기려는 사기꾼의 이야기.

이 통속적인 사기극은 그저 정신줄 똑바로 잡고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나에게 줄 뿐이었다.

자기가 뱉은 말과 달리, 별 재미를 못 느끼는 것은 나 뿐만 아니라 앨런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는 바짝 말린 장작처럼 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미스터 한, 혹시 마이크 윌리엄스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윌리엄스 펀드 매니지먼트의 회장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21세기 최고의 펀드매니저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아.

앨런으로부터 부연 설명을 듣자 그제야 어렴풋이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당시 금융 회사와 주택 건설사를 상대로 공매도를 때려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고, 그 부(富)와 함께 ‘과부 제조기’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을 가지게 된 미국의 투자자.

각설하면 그쪽 세계에 해박하다고 자신 할 수 없는 나도 이름정도는 알고 있으니, 업계에서는 최고의 스타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걸 좀 보시죠.”

앨런은 태블릿을 통해 사진 한 장을 더 보여주었다.

그 사진에는 정영목과 바로 그 마이크 윌리엄스가 어깨동무를 하고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찍혀있었다.

그것 뿐이 아니었다.

심지어 동영상도 있었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촬영했기에 음성은 뭉개져 뭐라고 하는지 정확히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정영목과 세계적인 투자자는 정겹게 환담을 하고 있었다.

“뭐야··· 이 양반 진짜 뭐 있는 거 아니야?”

꼭 누가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무심결에 나온 혼잣말.

하지만 앨런은 내 말을 듣고선 입꼬리를 한쪽만 올리며 웃었다.

그의 웃음이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마이크 윌리엄스는 누구나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 제가 말하는 누구나는 아무나라는 뜻입니다. 저 노인네, 실상 현장에서 손 뗀 지 오래되었어요. 지금은 그저 얼굴마담입니다. 얼굴마담이 하는 일이 뭐겠습니까? 아마 마이크 윌리엄스는 하도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서 오늘 자기가 누굴 만났는지도 기억도 못 할 겁니다.”

나는 순간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아 뒤통수가 뜨거워졌다.

이래서 사기를 당하는구나.

조금 전 정신을 바로 차리고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떠들던 나조차도 순간 이렇게 미혹에 빠지지 않는가.

“미스터 한조차 이렇게 어?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이뿐이 아닙니다. 성인잡지 표지보다도 못한 이 사진을 들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바람을 잡고 다니고 있답니다. 이것 좀 보시죠.”

앨런은 인터넷 창을 켜고 영광 산업개발의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그 홈페이지에는 정영목이 수많은 업체의 대표, 사장들과 악수하는 모습이 업로드되어 있었다.

마치 영광 산업개발과 그 업체들이 무슨 긴밀한 관계라도 맺고 있는 것처럼

기업인으로서 아무런 실체도 없는 자가 계속해서 인적 네트워크를 확장해가며 사람들을 현혹하는 장면이었다.

이쯤 되니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현대판 봉이 김선달을 보는 것 같달까.

그때였다.

“··· 잠깐! 잠깐만요!”

나는 태블릿의 액정 위에서 무심히 사진을 넘기던 앨런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갑작스러운 내 돌발행동에 앨런은 토끼 눈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제기랄··· 이게 뭐야···”

당황스러웠다.

놀랍게도 그 사진들 속에는 내가 아는 얼굴도 있었다.

작고 왜소한 체격에 주름진 얼굴.

정영목의 손을 잡고 불편하게 웃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정실 전자의 이신재 사장이었다.

* * *

정실 전자의 주차장 안에는 빼곡히 차들이 서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축구 경기를 해도 될 정도로 텅텅 비어있던 곳이다.

차들이 이리 들어차 있다는 것은 그만큼 공장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

정실 전자를 살리는 데 나름 큰 공헌을 한 사람으로서 반가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앨런의 태블릿에서 이신재 사장의 얼굴을 보았을 때 한참을 묵혀놓았던 숙제가 방학의 끝자락에 와서야 퍼뜩 떠오르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왜 이 회사에 오물이 튀게 된 것일까.

당연히 이신재 사장이 크건 작건 저 사기극의 공모자 역할을 도맡았을 리가 없다.

내가 아는 이신재 사장은 순박하고 정직한 사람이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다는 말의 표상이랄까.

다만 그의 순박함은 사업을 함에 있어 장점보다는 약점이 되기 쉽다.

실제로 우리의 이야기에 시작점이었던 신형 컨버터 기술을 눈뜬 채로 빼앗길 뻔하지 않았는가.

아마 이신재 사장은 갑작스럽게 정실 전자에 나타나 사특한 혀를 놀리는 자들에게 눈만 껌뻑껌뻑 뜨고 있지 않았을까?

부디 그가 영광 산업개발과 어떠한 종류의 서류도 나눠 갖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만약 그렇다면 나와 정실 전자의 관계는 여기서 끝일 수밖에 없다.

이제 큰 바다로 항해를 시작한 나의 배에 작은 구멍도 용납할 수는 없으니.

“어! 영쑤, 영쑤 사장님!”

그때,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실 전자의 직원 우디트였다.

우디트는 공장 귀퉁이에서 물고 있던 담배를 얼른 바닥에 비벼 끄더니, 춤추는 풍선 인형처럼 두 팔을 흔들며 나에게 뛰어왔다.

“우디트 씨··· 잘 지냈어요?”

“너어무 잘 지냈습니다! 우리 일감이 정말 많습니다. 몸은 힘든데 너무 행복합니다. 우리 직원들도 전부 돌아왔어요. 이게 다 영쑤 사장님 덕분이에요.”

입을 활짝 벌리고 웃는 우디트를 보자 문득 반성을 하게 되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정실 전자를 기억 어딘가에 깊숙하게 묻은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다.

어쩌면 그깟 50억··· 하며 건방을 떨었는지도 모른다.

“이신재 사장님은 어디 계신가요?”

“사장님 공장 안에 있어요. 이번 주까지 추가 납품 물량 있어요. 우리 정말 바쁩니다.”

“그렇게 바쁜데 우디트 씨는 지금 혼자 땡땡이치는 거예요?”

내가 농담을 던지자 우디트는 용케 땡땡이라는 말을 알아듣고선 두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닙니다. 점심 먹고 처음 자리 비운 거에요. 진짜로요.”

“알아요. 농담. 우디트 혹시 사장님께 말씀 좀 전해주실 수 있어요? 사무실로 와주실 수 있냐고.”

“영쑤 사장님, 저랑 같이 갑시다. 다들 사장님 보면 좋아할 겁니다.”

우디트는 다정하게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그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고개만 좌우로 저었다.

“아니에요. 지금 바쁘실 텐데 괜히 내가 가서 신경들 쓰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사장님만 좀 불러주세요. 부탁해요.”

“그럼 알겠습니다. 사장님. 사무실로.”

우디트는 내가 대단한 임무라도 맡긴 것처럼 후다닥 공장 쪽으로 뛰어갔다.

* * *

“아이고··· 영수 군. 연락도 없이 어떻게···”

사무실에서 경리 직원이 내어준 차를 두 모금쯤 마셨을까, 이신재 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장님. 잘 지내셨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신재 사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글서글하게 웃는 이신재 사장의 손은 여전했다.

기름때가 잔뜩 낀 일하는 손.

달라진 게 있다면 이신재 사장의 분위기였다.

더 이상 그에게서 어두운 그늘을 찾을 수 없었다.

경리 직원은 눈치 좋게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었고, 이신재 사장은 작업복 외투를 벗어 낡은 소파 위에 올려놓았다.

“정실 전자가 번창하는 걸 보니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투자자로서도 개인적으로도요.”

“허허허··· 다 영수 군 덕분이지. 정말로 은인이야.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걸세.”

“최근에 연락해 주셨을 때 설비 증설을 고민하고 있다고 하셨죠? 진척이 좀 있나요?”

이신재 사장의 얼굴의 얼굴에 밝은 태양이 떠올랐다.

빈말로라도 잘난 외모라고 하기는 어려운 그였지만, 정말로 보기 좋았다.

“그래. 이젠 자질구레한 것들은 정리하려고 해. 컨버터에만 집중하려고. 그전에는 몇 푼이라도 더 벌어보려고 이것저것 다 벌려놓았었는데, 이제는 계산이 나오니까.”

“드디어 그간 노력의 결실이 맺어지는군요.”

우리는 서로에게 몇 마디 덕담을 더 주고받았다.

이렇게 계속 말만 계속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여기 온 것은 확인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 사장님. 그런데 영광 산업개발이라고 들어보셨지요?”

“영광 산업개발?”

이신재 사장은 잠시 궁리하더니 아, 아. 하며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두 달 전쯤인가, 공장을 찾아왔었어. 어떻게 알고 왔는지 대표라는 사람이 와서는 우리와 전략적 협력 관계를 체결하자고 하더라고.”

“그래서요?”

“아이고, 뭐 세계적인 투자자가 어떻고, 앞으로 에너지 자원이 어떻고, 너무나 거창한 소리를 해대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고. 도저히 감당 안 되는 이야기라 그냥 돌려보냈지.”

···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그런데 영수 군이 그걸 어떻게 알았어?”

나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경리 직원이 사용하는 컴퓨터에 가 앉았다.

그리고 영광 산업개발의 홈페이지 일부를 이신재 사장에게 보여주었다.

어설프게 웃으며 정영목과 악수를 하는 그의 모습을.

“아니, 이걸 이 사람들이 왜 자기 회사 홈페이지에···”

이신재 사장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사장님. 확실치는 않지만 영광 산업개발 말이에요···”

나는 앨런을 통해 소화한 정보를 이신재 사장에게 그대로 전해주었다.

이신재 사장은 펄쩍 뛰었다.

“아니, 우리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말이야! 같이 사진 한 장 찍자는 걸 싫다고 할 수도 없고. 좋은 대답을 해주지 못해 찜찜하고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순 나쁜 사람들이었구먼!”

“괜찮아요. 사장님이 잘 돌려보내셨으니까. 그렇게까지 놀라실 거는 없어요. 대신 정식으로 영광 산업개발 쪽에 요청을 하세요. 귀사와 우리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사진 내려달라고. 만약 정정이 없을 시 법적으로 문제를 삼겠다고.”

“그래. 알겠어. 내가 당장 그렇게 조치를 해야겠네.”

나는 가만히 이신재 사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정실 전자가 커갈수록 이런 일이 더더욱 많이 일어나겠지.

온갖 승냥이들이 침을 흘리며 달라붙을 테다.

지금은 가내수공업같이 운영되는 정실 전자가 더 단단해질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이신재 사장의 선함이 나약함으로 보이지 않게 만들 방파제가 필요하다는 것도.

“사장님. 이제 슬슬 상장 준비를 시작하시는 것이 어떨까요?”

“상장?”

“네. 정실 전자는 앞으로도 점점 커나갈 텐데 안정적으로 자금을 확보할 방법을 모색해봐야지요.”

“하지만 우리처럼 작은 회사에 사람들이 관심이나 가질까?”

“정실 전자보다 직원 수가 더 적은 회사 중에도 주식회사 많습니다. 그리고 엄연히 이제 정실 전자는 대기업에 납품하고 있는 업체에요. 상장이라는 게 하루이틀 사이에 되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부터 한 번 천천히 준비해보시지요.”

내가 용기를 실어주자 이신재 사장은 두 주먹을 그러모았다.

그의 의지를 시험한 나는 내친 김에 말을 더 이었다.

“그리고··· 하나더. 저 정실 전자에 추가로 투자금을 더 넣었으면 합니다.”

“투자금? 얼마나···”

“제가 투자한 딱 그만큼 더요.”

“50억을 말이야!”

이신재 사장은 오늘 놀라운 이야기들을 너무 많이 들은 나머지 사고회로가 정지된 것 같았다.

그는 계속해서 50억, 100억, 50억··· 같은 말을 반복해 중얼거렸다.

“대신 기존의 투자 조건도 수정이 필요하겠지요. 더 이야기를 해봐야겠지만 다른 건은 차치하고 추후 상장 시 지분 관계 조정이 제일 중요할 것 같습니다.”

“30%··· 였었지?”

“네. 만약 사장님이 제 투자금을 더 받는 데 찬성하신다면 정실 전자의 지분을 70%까지는 가져가고 싶습니다. 그 지분으로 제가 정실 전자를 단단하게 지키겠습니다.”

이신재 사장의 표정이 다소 쓸쓸해졌다.

“··· 그 말인즉슨, 이 회사의 주인이 바뀐다는 이야기구만.”

“걱정하지 마세요. 이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장님의 피땀으로 일군 곳이잖아요. 상장하더라도 저는 주주로 남을 겁니다. 함부로 지분을 팔아치우지도 않을 거구요. 경영권도 원하지 않습니다. 이 회사의 주인은 여전히 사장님과 정실 전자의 직원들일 겁니다.”

“허··· 이거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이신재 사장은 붉어진 얼굴로 연신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다지 날이 덥지도 않은데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나를 은인처럼 생각한다는 그의 진심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지만, 고민이 되는 것이 당연할 터였다.

예전에 내가 50억을 흔쾌히 투자했을 때와 지금 정실 전자는 사정이 다르지 않은가.

매출도 큰 폭으로 늘었고, 재무 상황도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건강해졌다.

“사장님. 충분히 고민해보세요. 제가 기존에 묻은 투자금은 그거고, 이거는 또 강요할 수는 없는 문제니까요.”

“...”

이신재 사장은 말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의 침묵이 지나가고.

“··· 알겠네.”

이신재 사장의 입이 열렸다.

흉통을 크게 울리고 나오는 듯한 목소리였다.

“어차피 영수 군이 아니었으면 죽었을 회사야. 자네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나는 그저 직원들 월급만 제때 챙겨주고 자식 같은 우리 회사의 물건만 계속 팔 수 있으면 그만이야.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영수 군은 내가 믿을 수 있지. 하자는 대로 군소리 없이 뜻을 따르겠네.”

제 무덤을 파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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