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철없는 공주님
아주 오래전 일이다.
시기상으로 따지자면 정식 모터스에 갓 입사를 했던 때.
어느 날인가 친구 한 명이 정말 갑작스럽게 날 찾아온 적이 있었다.
준규라는 이름의 동갑내기였는데, 열 살 때부터 자애 보육원에서 자란 녀석이었다.
사람마다 자신의 역사가 있고 사정은 제각각이기 마련이다.
보육원 안에서 사는 아이들도 그건 다르지 않은데, 밖에 사람들이 보기엔 고만고만하게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안에서는 각자의 사연이 있는 법이다.
준규는 보육원의 대부분 아이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녀석은 부모님이 모두 살아계셨다.
그리고 준규는 그걸 지나칠 정도로 아이들 앞에서 자랑스러워하며 뽐냈었다.
“우리 아빠는 엄청나게 큰 회사 사장님이거든? 지금 너무 바빠서 나는 여기 잠깐 있는 거야. 이제 곧 엄마, 아빠가 나 데리러 올 거니까.”
사장, 군인, 심지어 어느 날은 조직폭력배까지.
준규는 아버지의 직업만 바꿔가며 항상 같은 말을 반복했다.
며칠만 있으면 자기의 부모가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이라는.
준규의 바람과 달리 그 꿈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어린아이가 키가 훌쩍 크고, 코 밑에 수염이 거뭇하게 막 자라나기 시작할 무렵이 되어서야 준규는 보육원을 떠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로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 내게 준규는 다짜고짜 백만 원만 빌려줄 수 있는지 물어왔다.
녀석의 안색은 며칠 밤을 새우기라도 한 것처럼 어두웠고, 옷을 차려입은 꼴이 영 형편이 없었다.
말 못 할 사연이 있겠거니, 오죽하면 나한테까지 찾아와서 돈을 빌릴까 싶었다.
나는 준규에게 저녁 한 끼를 사주고 두말하지 않고 돈을 빌려주었다.
사실 빌려주면서도 못 돌려받는 돈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의외로 준규는 그 백만 원을 채 며칠도 지나지 않아 금세 갚았다.
소정의 이자까지 더해서.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영수야, 미안한데 나 한 번만 더 빌리자. 혹시 너 이백 정도 여윳돈 있어? 내가 며칠만 쓰고 돌려줄게.”
한 번만이라는 말은 곧 두 번, 세 번, 그리고 네 번이 되었다.
녀석은 계속해서 돈을 빌리고 갚기를 반복했다.
빠르면 다음 날 바로 주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몇 달이 걸리기도 했다.
그 당시만 해도 도대체 나는 준규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준규야. 미안하다. 나도 이제 전세를 좀 구해야 해서 목돈이 필요해. 이제는 너한테 돈 빌려주기가 어렵겠다. 그리고··· 자꾸 이런 부탁. 좀 불편해.”
“그러냐···?”
마지막으로 300만 원 정도의 돈을 거의 반년 만에 돌려받았을 때, 나는 준규에게 딱 잘라서 더는 너와 돈거래를 할 생각이 없음을 밝혔다.
“··· 너 근데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
처음으로 준규의 사정을 물었다.
하지만 녀석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전화로 매번 이러지 말고, 언제 한번 놀러 와. 밥이나 한 끼 하자. 얼굴 보고 말하자. 알겠지?”
“··· 영수야.”
준규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보육원 있었을 때 말이야. 애들이 나 따돌렸어도 너만은 나한테 잘해줬었지.”
“아니, 뭐···”
사실이긴 했다.
늘 거짓말을 하면서 난 너희들과는 다르다고 말하는 준규가 같이 생활하는 보육원 아이들의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나 그때 속으로 너 참 멋있다고 생각했어. 너 완전 대장이었잖아. 애들도 너 말이라면 다 잘 듣고.”
“대장은 무슨, 그냥 우리는 모두 가족 아니냐.”
“가족···”
내 말을 곱씹던 준규는 덤덤하게 안녕을 고했다.
“그동안 미안했다. 고마웠고.”
그 말을 끝으로 준규는 더는 나에게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나 역시 생활의 반복 속에 준규의 존재는 그저 하나의 해프닝으로 희미해져 갔다.
준규의 소식에 대해 듣게 된 것은 그 이후로 한참 뒤의 일이었다.
이승우는 전화로 나에게 뜻밖의 부고를 전했다.
준규가 죽었다는.
“··· 뭐?”
“자살을 했다나 봐. 걔 도박 빚이 많았대. 듣기로는 3, 4억 된다던가?”
“도박···”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게 수시로 나에게 돈을 빌렸었구나.
“나한테도 몇 번 연락해 왔었어. 내가 돈이 어딨냐고 쳐내기는 했지만. 시팔, 젊은 새끼가 어떻게든 살아야지···”
물먹은 목소리로 말하는 승우에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내가 실제로 접했던 도박꾼의 쓸쓸한 말로였다.
마약 같은 도박에 결국 자기 삶까지 전부 먹혀버린.
* * *
“돈을 더 빌려주라고? 자기야.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최화란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예. 빌려주세요. 천억 정도까지는.”
“천억?”
최화란의 입이 떡 벌어졌다.
“한 대표, 미쳤어? 이백억도 못 돌려받을까 봐 전전긍긍인데. 천억이라니. 자기가 요즘 잘나가는 건 알지만 이건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냐?”
나는 최화란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녀는 고구마를 백 개쯤 먹은 듯이 나에게 답답함을 호소했다.
“장 사장한테 빌려 간 거, 거기까지는 그냥 내 돈이야. 그런데 여기서 더 빌려주면 쩐주들 돈까지 건드려야 한다고. 나보고 그런 미친 짓을 하라고?”
“그럼 답 나왔네요. 새로운 쩐주를 구하면 되겠네.”
“갑자기 쩐주를 어디서··· 잠깐만.”
최화란은 눈을 크게 뜨고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기··· 설마···”
최화란이 드디어 내 속내를 짐작했다.
“지금 한 대표가 내 쩐주가 되겠다는 거야?”
“네. 장은우 사장에게 나가는 돈에 한해서요. 이미 빌려 간 이백억 포함입니다. 이렇게 하시죠. 거기서 나오는 이자는 모두 최화란 이사님 몫으로 가져가세요.”
최화란의 눈이 초승달을 엎어놓은 것처럼 가늘어졌다.
그녀로서는 손해를 볼 것이 조금도 없는 파격적인 조건.
“한 대표. 자기 혹시 나 사랑해?”
“갑자기 뭔 소리예요, 진짜.”
생뚱맞은 최화란의 말에 나는 손을 내저었다.
“어머, 그렇게까지 극구 사절하니 섭섭하네?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어?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주냔 말이야. 그 말대로라면 자기가 얻어가는 것이 하나도 없잖아.”
얻어가는 것이 없을 리가.
이미 이번 사태로 얻어갈 것에 대해 밑그림이 그려진 뒤였다.
“대신이라고 말하긴 뭐하지만, 제가 말하는 대로 따라주시기만 하면 돼요. 일단 담보부터 새로 잡읍시다.”
“담보?”
최화란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지금까지 신용만으로 빌려줬는데, 담보 잡겠다고 하면 장은우 사장이 오케이를 할까?”
“한꺼번에 백억 정도 푸세요. 흔쾌히 큰돈을 내밀면 입이 헤벌쭉 벌어져 시키는 대로 할 겁니다.”
장은우 사장이 정말 지금 도박에 미쳐있다면 말이야.
미끼를 던지면 틀림없이 입질을 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좋아. 한 대표 말은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 만약 장 사장이 콜을 잡는다 치자. 그럼 뭘 담보로 잡을까.”
“장은우가 쥐고 있는 태상 백화점의 지분. 그걸로 하시죠.”
사실 돈이라는 미끼를 던져 진짜 얻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장은우가 가지고 있는 태상건설의 지분.
하지만, 섣부르게 태상건설을 건드렸다가는 벌집을 쑤시는 꼴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백화점의 지분이었다.
듣기에 장은우 사장은 백화점 사업에 온갖 공을 쏟는다고 했다.
그 말인즉슨 태상 백화점을 쥐락펴락하게 되면 장은우까지도 흔들 수 있다는 소리와 같았다.
일단 내 계산은 거기까지.
“이런 악당.”
최화란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녀의 표정과 말투에는 골치 아픈 고민이 해결되었다는 안도가 깃들어있었다.
“윤일중 회장을 멕이더니, 이제는 장은우 사장이야?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그러는 거야?”
“글쎄요. 어쩌면 장은우 사장을 구하는 일이 될지도 모르죠.”
애매모호한 나의 말에 최화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아직 할 말이 더 있어요. 조금 미안한 이야기지만, 공식적으로 BH 인베스트먼트와 최 이사님의 관계는 여기서 정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뭐?”
“공식적으로만 말이에요. 묻어둔 투자금은 그냥 두셔도 되고, 원하시면 넉넉하게 수익 붙여서 돌려드릴게요.”
“··· 설마, 지금 나 손절하겠다는 거?”
“이사님 사업에 내 돈 천억 이상을 태울 건데 무슨··· 그리고 제가 왜 이사님을 손절합니까. 나에게 꼭 필요한 사람인데.”
섭섭함을 내비치던 최화란의 입이 당신은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말에 조금씩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사님에게 돈 벌게 해드리겠다는 약속, 앞으로도 지킬 거예요. 장은우 사장 관련해서 이자는 모두 가져가라는 것도 그런 점에서 마찬가지구요.”
“뭐, 나는 번득한 직함 달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는데···”
“언젠가 지금보다 훨씬 더 그럴듯한 자리 만들어드릴게요. 약속합니다.”
“··· 새로운 쩐주께서 그러라는데 힘없는 내가 어쩌겠어. 자기 말이야, 이것도 계획의 일부인 거지?”
나는 최화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장은우 사장이 만질 돈의 뒤에 내가 있다는 게 알려져서는 절대 안 됩니다. 혹여라도 누가 우리의 관계에 관해 물으면, 저를 원수처럼 말해주세요. 손절··· 그래요. 그 정도면 되겠네요. 기업 하나 먹더니 제가 이사님을 뒤통수치고 팽했다고.”
* * *
“백억을 더 빌려주겠다고?”
“네. 사장님.”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군.’
장은우는 입가가 씰룩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알겠어. 내가 일전에 최 사장에게 말을 좀 함부로 했던 건 사과할게.”
“어머, 아니에요. 사장님. 이런 일 하면 늘상 겪는 일인 걸요.”
최화란의 말에는 뼈가 있었지만, 당장 칩을 던질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한 장은우는 그런 것을 곱씹을 여유가 없었다.
“알겠어. 그럼 그 계좌로 좀 부탁할게.”
“네. 물론이죠. 그런데 사장님.”
“··· 응?”
바쁘게 자리를 떠나려는 장은우를 최화란이 불러 세웠다.
“아시겠지만, 저는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거든요. 앞으로 내어드리는 돈은 제 돈이 아니라 제 뒤를 봐주시는 분들에게서 나오는 것이에요.”
“뭐야, 최 사장이 종로에서는 최고라면서 몇백억 가지고 앓는 소리 하는 거야?”
최화란은 장은우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아무튼 그래서?”
“네. 이제는 신용만으로 빌려드리긴 조금 어려울 것 같고, 담보를 좀 잡아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장은우의 눈가가 씰룩거렸다.
담보라니.
과히 듣기 좋은 말은 아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시녀 대하듯 최화란에게 말하고는 있지만, 장은우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재벌가의 재산변동에 대해서는 온 나라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주시를 한다.
그들의 눈을 피해 수십, 수백억을 호주머니에서 넣고 빼려면 장은우는 최화란의 도움을 받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 그래서. 담보로 뭘 잡아주면 될까?”
“태상 백화점의 지분. 제 입장에서는 그것만큼 확실한 담보가 없는데.”
최화란의 입에서 자신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백화점이 거론되자 장은우는 불쾌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금 장은우는 마음이 급했다.
“알았어. 어차피 최 사장에게 빌린 현금. 조만간 다 정리하려고 했으니까.”
“네. 그리고 이자도 좀 조정을 하려는데···”
“최 사장.”
장은우는 선 채로 팔짱을 끼고 최화란을 바라보았다.
“나 태상의 장은우야. 빨리 처리나 해줬으면 하는데.”
모든 것은 한영수의 말 대로였다.
아무리 도박에 뇌가 절여졌다고 하지만, 태상의 장은우는 정말 철없는 공주님이었다.
영광 산업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