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깐부
“누나 말이야?”
은호 형은 내가 장은우 사장에 대해 묻자 몹시나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은호 형은 내가 그쪽 사정에 대해 관심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혹시 요즘 무슨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다든지···”
“...”
은호 형은 잠시 말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말을 아낀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까?
“··· 혹시 누나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
묻고 싶은 것이 많은 것은 나인데 오히려 은호 형 쪽에서 질문을 해왔다.
이것은 그도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방증이리라.
나는 지금 차를 몰아 최화란에게 가는 중이었다.
최화란과 장은우 사장 사이에 연결고리가 생겼다는 것은 나로서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사건이었다.
호기심이 솟구쳤다.
피 냄새를 맡은 상어라도 된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 속사정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제기랄.
나에게는 조금의 휴식도 허락이 되지 않는다는 투정이 절로 나왔다.
한동안 치열하게 감독 노릇만 했다.
시나리오를 쓰고, 그 대본을 무대 위에 올리기 위해 배우들을 움직였다.
그러다 모처럼 씨번을 만나 관객의 마음으로 느긋하게 박수를 보낼 수 있게 된 참이었다.
크리스 번스타인은 나와의 작별을 아쉬워하며 몇 번이나 자신을 만나러 한번 와달라고 당부를 했다.
마이 브로, 마이 프렌드를 연발하며.
나 역시 씨번에게 다음에 한국을 또 방문하게 된다면 광고모델을 부탁하고 싶다는 덕업일치의 제안을 전했다.
여하튼 차에 올라타자마자 은호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언가 깔고 갈만한 힌트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며.
“제가 괜한 소리를 형님께 했나 보네요. 못 들은 거로 해주세요.”
“영수야. 너도 나의 형제지만, 누나도 내 가족이기도 해. 이미 들은 것을 못 들은 걸로 하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은데.”
그렇지.
관계라는 것이 어찌 한줄기로만 뻗어나갈까.
나는 섣부르게 은호 형에게 장은우 사장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한영수, 이 헛똑똑이야.
최화란을 만나고 사정을 좀 더 들어본 뒤 연락을 했어도 늦지 않았을 텐데.
눈살이 절로 찡그려졌다.
나의 미숙함에 대해 속으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 한영수.”
내가 대답이 없자, 은호 형은 나지막하게 나를 불렀다.
“예. 형님.”
“나는 우리가 한배를 타고 있는 사이라고 믿는다. 적어도 서로에게는 숨기는 것이 없었으면 좋겠어.”
··· 어쩔 수 없나.
“저도 건너서 들은 이야기에요. 장은우 사장이 돈을 구하러 다닌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돈을? 얼마나.”
“··· 그건 저도 알지 못합니다. 혹시 사업상에 무슨 문제도 있나 싶어서요. 그건 태상의 지분 관계에도 변동이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일단은 생각나는 대로 은호 형에게 둘러대었다.
수화기를 통해 끙━ 하며 은호 형이 신음을 내뱉는 소리가 전해져왔다.
“각자의 영역이 있기 때문에 나도 누나가 맡고 있는 사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속사정까지 알지는 못해. 다만···”
다만?
“무슨 연관이 있을까 싶지만, 누나가 요즘 해외에 나가는 일이 잦더군.”
해외라.
무언가 실마리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해외··· 200억··· 최화란···
“알겠습니다. 형님. 개인적인 호기심 차원이었습니다.”
“··· 영수야.”
오늘따라 은호 형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혹시라도 네가 누나와 부딪칠 일이 생긴다면··· 나쁘게 하지 말아줄 수 있겠니. 알다시피 누나는 우리가 넘어야 할 벽이 아니야.”
이미 냄새를 맡았구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은호 형도 보통이 아니다.
애써 말을 돌려보았지만, 내가 최화란과의 통화에서 그랬듯 그 역시 몇 마디 대화만으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한 것 같았다.
“누나는 그저 자기 영역 안에서 행복해하는 사람일 뿐이야. 그냥 공주님일 뿐이니까···”
“형님. 저는 누군가를 해치는 데서 재미를 느끼는 가학적인 사람이 아니에요. 상대가 먼저 이빨을 내밀지 않는다면.”
자신의 누나를 열심히 변호하는 은호 형을 보자 유치하게도 질투심이 들었다.
나 역시 사람이다 보니 인간적인 결함이 없을 리가 없다.
실수를 하기도 하고, 쓸데없이 감정을 소비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도 질투심이라니···
혈육의 정을 애타게 그리워하던 작은 아이가 내 마음속 어딘가 숨어있다가 불쑥 손을 들고 일어나 크게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장은호는 나만의 형이 되어야 한다며.
나는 고개를 두어 번 좌우로 저어 유아적인 생각을 떨쳐내려 노력했다.
어느새 최화란의 건물 근처에 도착한 참이었다.
“형님. 또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혹시 알게 되는 것 있으면 연락드릴게요.”
* * *
“한 대표, 왔어?”
평소와 다르게 최화란은 문 앞까지 나와 나를 맞이했다.
나를 보고 눈을 빛내는 그녀.
이제야 한시름 놓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지금 고왕 건설의 회장도 BH 인베스트먼트의 대표이사도 아닌, 해결사 한영수를 기대하고 있으리라.
“오늘 제가 아주 중요한 팬 미팅에 참석하고 있었거든요? 지금 그거 제끼고 여기 온 거에요.”
“어머, 한 대표가 그런 쪽으로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네? 있지, 그럼 내가 벌충하는 셈 치고 뭐 자리라도 한번 만들어줄까? 나 연예 기획사 대표 몇이랑도 친분이 좀 있거든.”
“됐어요. 그런 거 아니니까. 일단 앉죠.”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나는 입을 열었다.
“장은우 사장이니, 200억이니, 대관절 무슨 일인데요.”
“그게···”
최화란은 자기의 탐스러운 긴머리를 크게 한번 쓸어넘겼다.
“얼마 전에 장 사장이 우리 사무실을 찾아왔었어. 나에게 ‘작은 부탁’을 하나 했거든. 그걸 계기로 서로 친분을 좀 텄지. 몇 번 밖에서 식사도 하고··· 그런데 장은우 사장이 나한테서 돈을 좀 쓰고 싶다는 거야.”
“200억을 한번에 빌려 간 거예요?”
최화란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 10억에서 20억··· 그런 식으로. 그런데 점점 돈을 빌리는 주기가 짧아지고 액수가 커지기 시작했어.”
“그런데 어떻게 담보도 안 잡을 수가 있어요.”
“한 대표. 이 대한민국에서 태상이라는 이름값만큼 확실한 담보가 또 있어?”
쓴웃음을 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최화란이 그 태상과 나 사이에 아주 커다란 비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대한민국은 망해도 태상은 망하지 않는다.
갑남을녀들조차도 흔하게 입에 담는 말이었다.
최화란 입장에서는 그 태상의 최상위에 있는 인물이 손을 먼저 내밀었으니, 이참에 한 번 크게 배를 채워보자는 욕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왜 굳이 장은우는 최화란을 찾아왔을까.
물론 장은우가 장영복 회장의 사후에 천문학적 액수의 상속세를 마련하기 위해 곤란을 겪었다는 것쯤은 기사를 통해 진작에 접했다.
아직도 일부는 계속 진행 중이라고 알고 있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녀에게 돈이 나올 구멍이 없을까.
정히 급하다면 자기가 가진 주식, 혹은 부동산을 담보로 은행권을 통해 대출을 받으면 될 일이다.
누가 봐도 그게 정상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장은우가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을 택했다는 것은 저 200억이라는 돈의 용처가 아주 개인적이고 은밀한데 쓰였다는 것을 의미하리라.
숨겨둔 애인에게 호구라도 잡힌 것일까?
아니면 정치권에 은밀하게 돈을 대기라도 하는 것일까?
그때였다.
문득 아까 최화란이 장은우의 ‘작은 부탁’하나를 들어주었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장은우 사장이 최 이사님에게 부탁을 했다고 했었죠? 그건 뭡니까.”
“아아···”
최화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차명 계좌를 하나 만들어달라고 하더라고. 뭐, 크게 사업하는 사람들이 탈세 목적으로 차명 돌리는 거야 흔한 일이니까.”
탈세?
아니다. 장은우는 그런 목적으로 차명 계좌를 만들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섰다.
세금을 아끼겠다면서 최화란에게 사채를 쓰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니까.
“이사님. 그 계좌 꼬리 따놨죠?”
“응?”
“모르는 척 하지 마시고요. 그 계좌로 돈이 들어가고 빠져나가는 거 뒷구멍으로 보고 있었죠?”
“자기야··· 내가 무슨 양아치도 아니고.”
“이사님.”
내가 지긋이 눈빛을 보내자 최화란은 못 이기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 뭉탱이 돈이 여러 번 오가더라고. 한번에 작게는 몇십억에서 몇백억까지. 그 계좌로 드나든 돈만 해도 누적 500억에서 600억은 될 거야. 그 액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고.”
- 누나가 요즘 해외에 나가는 일이 잦더군.
아까 전화 통화에서 은호 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이 번뜩이며 아귀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마침내 톱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하고 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 그림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장은우 사장이 원정도박을 하고 있구나!
나는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보세요, 장영복 회장님.
당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 일이 이렇게 돌아갑니다.
우습지 않아요?
당신이 내버린 사생아가 그 모든 일에 연관이 되어 간다는 게.
“··· 썅년.”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불현듯 최화란이 무서운 얼굴을 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그 썅년이 누구를 지칭하고 있는지는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내가 더 이상 돈을 빌려주는 게 어려울 것 같다고 하니까, 그년이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나는 눈에 독기를 품고 있는 최화란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굳이 내 대답을 기다린 게 아니라는 듯 곧이어 최화란의 입이 열렸다.
“검찰에 자기가 아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거야. 내 장사쯤은 얼마든지 거덜 낼 수 있다고.”
“··· 장은우 사장이 사람 잘 못 건드렸네.”
“잘못 건드리긴.”
최화란은 책상 위에 전자담배를 들어 깊게 액상을 빨아 마셨다.
이어 한숨처럼 하얀 연기가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에서 뿜어져 나왔다.
“세상은 정말 더럽고 불공평해. 돈으로 계단을 쌓아서 아무리 올라가봤자 그 위에 또 천장이 있다고. 장은우 사장이 나를 윽박지르는데 병신같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니깐.”
“··· 내가 해결해 드릴게요.”
최화란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정말?”
나는 말없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 전에 먼저 물어볼 게 있어요.”
“뭔데? 내가 아는 거라면 뭐든지 대답을 해 줄게.”
최화란은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답을 말해준 나를 향해 몸을 잔뜩 기울였다.
“최 이사님이랑 나, 깐부 맞죠?”
“··· 깐부? 뜬금없이 왜 철 지난 유행어는 하고 그래?”
“진지하게 물어보는 거예요.”
“참 나···”
그녀는 한참을 치, 치 거렸다.
뭐, 내가 부끄러운 것을 요구했다는 것처럼.
“그래. 한 대표, 내 깐부 맞아. 갑자기 왜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건지.”
못이기는 척 대답하는 최화란의 얼굴은 슬쩍 붉어져 있었다.
그녀에게서 잘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좋습니다. 같이 해결해보시죠. 일단 장은우 사장에게 계속 돈 대주세요. 그 사람이 원하는 만큼 더.”
철없는 공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