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덕업일치
“··· 그런 일이 있었구나.”
구동일에게 전화가 왔다.
녀석은 나에게 숙제 검사라도 받듯 리조트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화로 보고하곤 했다.
이재석 사장과 나는 마음으로 맺어진 사이가 아니다.
한 번 배신한 사람은 언제고 또 배신할 수 있는 법이다.
비록 그가 나에게 백기 투항을 했다지만, 아직 그를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감시역을 맡아줄 사람이 한 명 필요했는데, 그 자리에는 구동일이 적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아는 이재석 사장은 계산이 굉장히 빠른 사람이다.
섣불리 사람을 붙여봤자 경계의 벽만 잔뜩 높게 쌓고선 나에게 그 어떤 빈틈도 보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구동일이 있었다.
이재석 사장과 정반대라고 해도 좋을 그.
특유의 천진난만함을 간직하고 있는 구동일이 이재석을 상대한다면 어떨까?
제법 재미있는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계산이 빠르다는 것은 생각이 많다는 소리와 같다.
이재석은 구동일을 놓고 어떻게든 퍼즐을 맞춰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래봐야 뭐하겠는가?
아무리 털어보려고 해도 나올 것이 없을 텐데.
그럴수록 이재석의 머릿속은 복잡해지기만 할 것이다.
계산이 복잡해지면 생각지도 못한 오류를 범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구동일에게 대놓고 나의 이런 의도를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저 가서 열심히 하라는 말과 함께 넌지시 리조트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좀 알려달라고 했을 뿐이다.
항상 내 말이라면 최선을 다하는 구동일은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나의 훌륭한 눈이 되어주었다.
일련의 일들로 구 씨 부자는 나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이고 있었다.
특히나 구동일은 나를 마치 자기의 스승이라도 되는 것처럼 대했는데, 사실 동갑내기 친구에게 그렇게까지 존경의 시선을 받는다는 게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구동일의 진심에 거짓이 전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든든하고, 또 고마웠다.
구 회장에게는 ‘어쩌면’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장차 구동일이 어느정도 스스로 그림을 그릴 줄 알게 되면 정말로 리조트 사업의 전권을 그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여하튼, 이번에 구동일을 고왕 리조트로 보낸 것은 나도, 구동일도, 구 회장도 모두가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이재석 사장 말을 들어보니까, 좀 찝찝하긴 하더라구.”
“당연하지. 남이 싸놓은 것 치우는 일인데 손이 안 더러워질 수가 있겠어? 그래서 내가 진작 말했잖아. 절대 적극적으로 나서지 말고 지켜만 보라고.”
“그러게. 괜히 열심히 하려다가 큰일 날 뻔했다.”
“적극적인 것도 좋지만 에너지를 아껴야 할 때도 있는 거야. 그런데 아마 네가 걱정하는 큰일이 날 건 없었을걸?”
“··· 응?”
“이재석 사장 말이야. 후각이 굉장히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존본능이 대단해. 틀림없이 자기 살길 파놓고 일 진행했을 것이고 잔 실수도 없었을 거야. 동일이 너는 그 사람의 그런 걸 잘 배워둬.”
청소부로서는 특급이랄까.
구동일로부터 이재석 사장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을 전해 듣고 사실 감탄을 금치 못했다.
뒷말 나오지 않게 윤 회장의 비리와 연관된 자들을 정리하는 것부터 장부들을 처리하는 방법까지.
일이 잘못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오히려 장부들을 남겨둬야 한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나도 모르게 탄성이 절로 나왔다.
역시 아직 이재석 부사장은 충분히 써먹을 수 있는 카드다.
“그나저나 동일이 너 나한테 섭섭했겠다. 이재석 사장 말이 영 틀린 것도 아니고.”
“나도 눈치가 있지. 일부로 어수룩한 척 한거야. 너랑 나를 뻔히 이간질하려는 수작이 보이던데 뭘···”
“그래.? 오해 없었으면 됐어. 알았다. 또 연락 주고.”
“응. 아 참, 그런데 영수야.”
구동일이 전화를 끊으려는 나의 말을 막았다.
“이건 좀 다른 소리인데 말이야. 너 헬스 좋아하잖아.”
뜬금없이?
구동일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화제가 튀어나왔다.
“그렇지. 근데 그게 왜?”
“너 그럼 크리스··· 아, 이름이 뭐더라.”
구동일은 잠시 앓는 것처럼 끙끙거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기억을 짜내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다.
“아! 크리스 번스타인! 그 사람 알아?”
크리스 번스타인!
당연히 알고 있다.
캐나다 태생의 프로 보디빌더이자 미스터 올림피아 클래식 피지크 종목에서 수년째 정상을 지키고 있는 젊은 황제.
성과 이름의 앞 글자만 따서 ‘씨번’이라 불리는 그는, 전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몸을 가진 남자라는 멋진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지나친 싸이즈 경쟁과 과도한 약물 사용으로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미의 기준과 안드로메다만큼이나 멀어진 현대 보디빌딩 업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씨번.
그는 조각 같은 몸과 더불어 엄청난 스트렝스와 수행 능력을 보여주며 이 업계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그야말로 인자강의 표본이랄까.
여하튼 씨번은 수많은 헬창들의 우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튜브에서 그의 채널을 구독하고 씨번의 운동법을 이래저래 따라 해왔으니까.
“알지. 그런데 크리스 번스타인이 왜.”
“그 크리스 번스타인이라는 사람이 한국에 온다던데? 그런데 숙소를 종로 GW 호텔로 정했다는 거야.”
“··· 뭐?”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고, 큰 소리가 나왔다.
GW 호텔은 고왕 리조트에서 하고 있는 체인 사업.
요컨대 나의 아이돌이 내 집에 방문한다는 것과 같은 소리였다.
“야, 깜짝이야. 뭐 올림피아 챔피언이라는 데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야?”
그 정도가 아니지.
“듣자 하니 관광 목적으로 입국한다는 것 같던데. 혹시나 너 관심 있을까 봐. 하기야, 할리우드 스타도 아니고, 영수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겠지.”
“동일아.”
“응?”
“나 그 사람의 찐팬이야. 호텔 쪽에 이야기 좀 전해줘. 숙박비를 비롯해 부대비용 일체를 청구하지 말아 달라고. 방은 스위트룸으로 내어주고. 필요하다면 비용은 내가 낼 테니.”
“워···”
구동일은 다소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왜?”
“한영수가 이런 모습도 있구나 싶어서.”
구동일이 낄낄대며 웃었다.
그래, 맘껏 웃어라.
지금의 나는 소녀팬의 심정이니까.
* * *
“안녕하세요. 저는 크리스 번스타인이라고 합니다. 한국에도 저를 이렇게 알아봐 주시는 분들이 있다니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저를 이 자리에 초대해주신 한영수 대표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통역사의 말이 끝나자 가슴팍까지 파여있는 나시 차림의 남자들이 일제히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이 건강한 사나이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생일을 맞은 아이처럼 행복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여기는 ‘자애 헬스장’
씨번은 자신을 중심으로 운집해있는 근육맨들을 향해 한국식 손가락 하트를 팬서비스로 내보였다.
“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커질 수가 있죠.”
회원들과 별다를 것 없이 열심히 손뼉을 치고 있는 내 옆에서 최예리가 중얼거렸다.
과연 그런 말이 나올법했다.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씨번은 키가 거의 190에 달했는데, 옆으로 몸이 크게 펼쳐지기까지 했으니 말 그대로 거인이 따로 없었다.
우리 헬스장의 회원들은 프로 선수는 아니더라도 아마추어 수준에서는 한가락 한다는 이들인데, 씨번의 체구에 비하면 어린아이와 다를 것이 없었다.
크리스 번스타인은 GW 호텔의 환대에 크게 감명을 받은 모양이었다.
회장이 이 벽안의 외국인에게 큰 관심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호텔 측에서는 내가 말했던 것보다 훨씬 성대하게 올림피아의 챔피언을 맞이했다.
자신을 슈퍼스타처럼 맞이해주는 연유에 대해 궁금함을 참지 못했던 크리스 번스타인은 결국 그 뒤에 나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며 만남을 청해왔다.
나로서는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비록 최정상의 프로와 아마추어 간의 레벨 차이야 있었지만, 우리는 언어의 장벽을 넘어 금방 의기투합할 수 있었다.
나야, 워낙에 그의 오랜 팬이었으니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까.
그런가 하면, 크리스 번스타인은 한국의 재벌이 보디빌딩에 대해 깊은 이해와 관심이 있다는 것에 친근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짧은 만남으로 끝날 줄 알았던 우리의 저녁 식사는 와인에서 시작해 소주로까지 옮겨갔게 되었다.
취기가 잔뜩 오른 크리스 번스타인는 나와 셀카를 찍어 자신의 인스타 피드에 올리기까지 했다.
’my bro'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 조심스럽게 내가 운영하는 센터에 원데이 세미나를 해줄 수 있겠냐고 물었고, 씨번은 흔쾌히 내 청을 받아들였다.
돈이 여태껏 내게 준 혜택 중에 가장 신나는 일이었다.
“자애 헬스장은 정말 훌륭한 센터입니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있어야 할 기구들만 있고 운동 동선도 잘 짜여 있군요. 그럴 수만 있다면 매일 여기서 훈련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씨번은 세미나를 진행하는 모습을 자신의 SNS를 통해 라방으로 동시에 내보냈는데, 확실한 립서비스까지 잊지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전 세계의 헬창들이 지금 자애 헬스장을 보고 있다!
그때였다.
호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휴대전화가 눈치도 없이 부르르 몸을 떨기 시작했다.
전화기를 꺼내 보니 액정에는 최화란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여보세요.”
어떻게 할까, 몇 초간 고민하다 외진 곳으로 자리를 옮겨 최화란의 전화를 받았다.
와━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와중에도 저쪽에서는 회원들의 탄성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 한 대표. 지금 바빠?”
“바쁘지는 않은데···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그러게. 좀 일이 있네.”
평소와 달리 최화란의 목소리에는 콧소리가 빠져있었다.
이런.
뭔가 영 께름칙했다.
그녀의 진지함에서 왠지 모를 불길함이 느껴졌달까.
“이야기 해보세요.”
씨번 때문에 들뜬 마음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게, 이게 우리 업장 문제이기는 한데···”
자기 업장 문제라면 본인의 사채업을 말하는 것일 터.
대관절 뭔 일이 터진 건지, 최화란은 말문을 자기가 먼저 터놓고도 계속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후━
최화란이 수화기 너머로 크게 숨을 내쉬었다.
사실 법의 경계를 항상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는 것을 고려할 때 최화란은 나의 불안 요소이기도 했다.
양날의 검.
최화란은 나에게 딱 그런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런 쪽으로 문제가 생겼다면 자칫 BH 인베스트먼트 쪽으로까지 불씨가 튈 수도 있었다.
“있잖아. 내가 요즘 큰 손님을 하나 물었거든? 딴에는 좋은 줄이 될 줄 알았는데, 이게 골치를 아프게 하네.”
“··· 액수가 얼마인가요?”
단박에 무슨 문제인지 통빡이 섰다.
받기 어려운 돈 문제가 생겼구나.
그래서 내 머리를 빌려보겠다고 헬프를 외치는 것이고.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니,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200억.”
“200억이요?”
몇억을 가지고 최화란이 나에게 우는소리를 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내 상상보다 훨씬 더 큰 액수였다.
“그게 끝이 아니야. 돈을 더 빌리려고 하더라고.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서네.”
“담보는요?”
“··· 차용증만 썼어.”
허, 천하의 최화란이 사람 얼굴 하나만 보고 그 큰돈을 빌려줬다는 것인가?
“누굽니까. 이사님이 신용만 보고 그 큰돈을 빌려줬다면 틀림없이 보통은 아닌 사람일 텐데.”
“그래. 한 대표도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일 거야.”
잠시 뒤 최 화란의 입에서 이 대범한 채무자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 이름을 듣기 무섭게 온몸에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태상 백화점 장은우 사장. 이거 내가 괜한 짓을 해서 호랑이 등 위에 올라탄 건 아닌지 모르겠어.”
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