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30화 (151/200)

130. 내가 아는 그 친구는요

“와, 몇 번을 봐도 진짜 너무하네. 이렇게 제멋대로 가격을 붙여도 아무도 뭐라고 안 했단 말이야?”

구동일은 고왕 리조트와 창비 물산 간의 거래 장부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구동일이 특별감사팀장이라는 감투를 쓴 것이 한 달 전의 일이다.

고왕 리조트에 사장으로 취임한 이재석의 인사보다 더 화제가 되었던 것은 이 나이 어린 특별감사팀장이었다.

어디서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구동일의 정체가 고왕 리조트 전체에 퍼지는 데는 고작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모기업에 대주주의 아들이자, 그룹 총수가 직접 꽂아 넣은 인사.

소문이라는 것이 그렇기 마련이다.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음 사람에게 더욱 부풀려졌다.

이미 한영수가 고왕 건설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구동일 역시도 고왕 리조트 내에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입방아 위에 올랐다.

디테일은 조금씩 달랐지만, 그들이 한목소리로 주장하는 것이 있었다.

좌천된 이재석이 분을 못 참고 곧 사장직을 걷어찰 것이며, 그 자리에 구동일이 오를 것이라는.

뜬소문은 점점 힘을 얻었고, 기어코 정설이라고 믿어지기에 이르렀다.

어떤 이들은 구동일의 눈에 들겠다고 일찌감치 그의 주변을 얼쩡거리기 시작했다.

“너, 내가 특별감사팀장이라는 있지도 않은 자리를 일부러 만들어서 거기 보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 네가 리조트에 가면 너한테 줄이라도 한번 대보겠다고 난리들을 칠 거야. 그런 거 철저하게 다 쳐버려. 언제든 내가 당신들에게 벌을 줄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면서 거리를 두란 말이야. 사람들이 우쭈쭈 해 준다고 들뜨지 말고. 동일이 네가 무슨 일을 할지는 리조트에서 적응 좀 된 다음에 다시 이야기 해보자.”

한영수는 구동일이 고왕 리조트에 일으킬 파문을 손바닥 위의 일처럼 정확하게 예견했다.

그는 구동일에게 몇 번이나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이봐, 구 팀장. 이제 그건 그만 들춰보는 게 어때.”

이재석 사장은 구동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구동일이 맡은 첫 임무는 이재석 사장과 함께 고왕 리조트의 비리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우선 윤일중 회장 일가의 탈세와 착복에 관련된 직원들을 조용히 정리했고, 그 이후에 남아있는 증거자료들을 한곳에 그러모았다.

물론 경험이 짧은 구동일이야 그저 지켜보는 쪽에 가까웠지만.

오늘 이재석 사장과 구동일은 은밀하게 모은 자료들을 거기 있다는 것조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 창고 안에 묻어버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사장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이럴 거면 차라리 이 장부들 전부 파쇄해 버리는 게 낫지 않습니까?”

구동일의 물음에 이재석 사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천진난만한 녀석 같으니라고.’

“구 팀장.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작업 말이야. 왜 이렇게까지 비밀스럽게 자네랑 나 둘이서만 해왔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웃기는 일이잖아. 그래도 내가 명색이 사장인데 아랫사람들을 시키지 않고.”

구동일은 들고 있던 장부를 박스 안에 넣고선 눈을 크게 뜨고 이재석을 바라보았다.

선생에게 답을 묻는 학생처럼 구동일은 고개를 갸웃거리기까지 했다.

“사람, 참 답답하긴! 이건 범죄의 흔적이야. 그걸 우리가 파쇄를 하자고? 자발적으로 증거 은닉이라도 하자는 거야?”

“··· 아!”

이재석이 힌트를 주자 그제야 알겠다는 듯 구동일은 손뼉을 쳤다.

“내부적으로 묻는다니, 그런 맹추 같은 소리는 뻥끗도 하지 마. 공식적으로 자네와 나, 우리는 이 장부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본 적도 없고. 그냥 썩은 시체를 땅속에 묻는다고 생각해. 혹시라도 나중에라도 누가 이 무덤을 파헤치면 그 책임은 전부 윤 회장의 몫이어야 하지, 우리에게 돌아오면 되겠나.”

“그렇구나··· 사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 뭐?”

자기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는 구동일을 향해 이재석 사장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뭐가 감사해.”

“아시다시피 제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요. 솔직히 저 낙하산이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사장님에게 잘 배우고 있으니 당연히 감사하죠.”

허허허━

이재석은 어이가 없어서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기분이 묘해진 그였다.

이재석 사장.

그가 승진을 거듭하는 동안 만나야 하는 적들은 뱃속에 능구렁이들이 가득 찬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남의 공을 뺏어서라도 하늘에 빛나는 유일한 별이 되려고 안간힘을 썼다.

당연히 자신의 부족함을 선선히 인정하는 법이 결코 없었다.

물론, 반추해보자면 이재석 역시도 그런 이들과 다르다고 할 수 없었다.

아니, 더 하면 더했다.

결국 적들을 모두 밟고 끝까지 올라선 건 이재석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구동일을 보자.

그는 지금 제 약점을 스스럼없이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이재석 사장은 그런 구동일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다.

자기를 쏘라고 가슴을 벌려 심장을 내밀고 있으니, 오히려 화살을 쏠 수가 없었다.

처음 구동일이 고왕 리조트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재석은 그를 몹시 경계했었다.

그로서는 당연했겠지만, 틀림없이 구동일이 자신을 잡기 위해 한영수 회장이 보낸 자객일 거라고 여겼다.

이재석은 이 특별감사팀장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직책을 가진 남자의 등장에 심히 압박감을 느꼈다.

그래서 등 떠밀리듯 한영수와 했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고왕 리조트의 해묵은 비리를 청소하는 그 일을.

그런데 이게 웬걸?

가만히 지켜보자니, 구동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사원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재석이 피 튀기는 전장에서 살아남은 베테랑이라면 구동일은 몸에 맞지도 않는 군복을 입고 소총을 땅에 질질 끌고 있는 소년병이었다.

이 둘은 이미 체급 자체에서 게임이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구동일이 연기를 하고 있다고 이재석은 생각했었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자기를 숨기나 감탄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구동일에게서는 음모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제가 인정하는 것처럼 부족한 점은 많지만, 뭐라도 배우려고 안간힘을 쓰는 구동일.

환상적인 뒷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누구보다도 일찍 출근하는 구동일.

수첩을 들고 자신을 온종일 졸졸 따라다니며 메모를 하는 이 젊은 청년을 보고 있자니, 어느 순간부터 의심의 눈초리는 점점 둥글어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이제 지저분한 일도 오늘로 끝 아닌가. 계속 팀원도 없는 팀장 명찰을 달고 있을 수는 없고··· 어쩔 생각이야? 고왕 건설로 갈 건가? 아니면 여기서 가고 싶은 부서라도 있어?”

“리조트에서 이제 겨우 적응하기 시작했는데요. 계속 여기서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부서야 뭐, 사장님이 어디든 보내주시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구 팀장. 우리 솔직히 툭 터놓고 이야기 하자고. 자네가 회장님의 측근인 걸 모르는 사람 여기 아무도 없어. 뭔가 따로 언질을 주셨을 거 아닌가.”

“아, 그게 영수는···”

구동일은 아차 싶었는지 퍼뜩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회장님은 다른 말 없었습니다. 그저 여기서 사장님의 말씀 잘 따르라고만 했습니다.”

회장의 이름을 스스럼없이 부르는 구동일.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이재석은 두 젊은 놈의 사이를 틀어놓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였다.

윤일중 회장은 농락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한영수에게 철저하게 얻어맞기만 했다.

윤 회장이 링 위에서 떡실신 당하는 동안, 그 아래서 세컨드를 보고 있던 이재석은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그저 언제 수건을 던져야 할지 끊임없이 눈치만 보고 있었을 뿐.

그랬던 그였기에 조금 심술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도저히 빈틈이 보이지 않던 한영수.

이재석 사장은 어쩌면 구동일이 한영수의 아킬레스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질이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해왔던 이재석이다.

저 어수룩한 녀석을 구워삶는 데는 몇 마디면 충분하리라 자신했다.

‘한번 슬쩍 주물러 볼까···’

“···그런데, 회장님도 참 대단하시구만. 자네랑 회장님이 친구 사이라고 했지?“

“예. 그렇다고 제가 그 친분을 가지고 회사 안에서 주제넘게 굴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방금은 그만 말실수를 했습니다.”

“아니야. 편하게 부르던 사람을 회장이라고 호칭하려니 당연히 입에 안 붙겠지. 이해해. 그런데 한 회장님 말이야. 젊은 양반이 참 독한 구석이 있으시단 말이지.”

이재석은 슬그머니 운을 떼기 시작했다.

그의 속마음을 모르는 구동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했다.

“확실히 보통은 아니긴 하죠. 어떨 때 보면 같은 사람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라니까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그렇게 될 수 있는지···”

“그러게 말이야. 그 나이에 맞지 않게 참 침착하지. 그런데 구 팀장이 내 말을 잘못 이해한 것 같아. 난 한 회장님을 칭찬하겠다고 말을 꺼낸 게 아니야.”

“··· 예?”

대관절 저 양반이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어 구동일은 머리를 삐딱하게 숙였다.

이재석은 잠시 턱을 손으로 쓸다가 입을 열었다.

“··· 우리 둘이서 지금까지 해온 청소 말이야.”

이재석 사장은 우리라는 단어에 일부러 힘을 주었다.

그는 말이 가진 힘을 높게 치는 축에 속했는데, 지금도 우리라는 지칭을 통해 자신과 구동일 사이에 은밀한 유대감을 만들려 하고 있었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다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야. 자칫하면 덤터기를 전부 쓸 수도 있다고. 두 사람이 얼마나 속 깊은 사이인지 나야 알 수 없지. 그래도 같이 좀 지냈다고 구 팀장이 걱정되는구만.”

“그렇게 위험한 일이면, 사장님께서는 왜 직접 손을 쓰시는 건가요.”

“난 패배했어. 패배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감내해야 하는 것이 있는 법이야. 마치 이 일처럼. 하지만 자네는 사정이 다르지 않나.”

“...”

이재석은 슬쩍 곁눈질로 구동일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이 구동일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데 성공한 걸까?

양쪽 입가가 축 처진 것이 구동일의 표정이 꽤 심각해졌다.

‘옳거니.’

이재석 사장은 작은 반역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간다는 생각에 기분이 유쾌해졌다.

‘구동일이. 너는 절대 도박은 하지 마라.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구만.’

이재석은 구동일을 두들기는데 더 박차를 가했다.

“어쨌든 내 처지에 까라면 까야지 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자네는 그래도 친구 아닌가. 친구에게 이런 일을 맡겼다는 게···”

구동일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이재석은 그런 그를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을 좀 더 살아본 선배로서 내가 조언 좀 해 줄까? 나 말이야, 밑바닥에서 나름대로 인정받는 위치까지 올라가 본 사람이야. 난 오로지 나만 믿었어. 이 판에 말이야, 영원한 내 편이란 없어. 우리가 남이냐를 외치다가도 자기가 죽게 생기면 바로 줄 끊고 달아나는 일이 태반이라고. 그 밑에 줄줄이 매달려있던 사람들이 떨어져 죽거나 말거나.”

“··· 사장님.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자기 이야기에 심취해 있던 이재석 사장이 눈을 바로 뜨고 구동일을 바라보았다.

구동일은 언제 심각했냐는 듯 빙그레 웃고 있었다.

“저는 승리니, 패배니 그런 거 모릅니다. 아직 이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잘 모르구요. 하지만 제가 하나 확실하게 아는 것이 있습니다.”

구동일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이재석은 또 한 번 한영수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아는 회장님··· 아니, 영수는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데,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덕업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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