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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억을 상속받았다-129화 (150/200)

129. 금의환향 (2)

- 저는 엄마, 아빠 없는 고아입니다.

쪽지에 적힌 글씨를 보자 나는 흉악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삐뚤빼뚤한 써진 글씨에서는 조악함이 느껴졌다.

그 글씨체로 유추해보건대 아마도 또래 누군가의 못된 장난이리라.

··· 아니다.

이게 그저 장난이라고?

수아의 가방에서 아이가 모르게 쪽지를 떼어내었다.

자기 등 뒤에 무엇이 붙어있는지도 모르고 털레털레 걸어왔을 수아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고, 이걸 떼어주는 어른 한 명이 없었다는 것이 화가 났다.

“오빠, 무슨 일이에요?”

내 표정이 심상치 않자 고윤아가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눈은 곧이어 나의 꽉 쥔 주먹 속에 삐죽이 튀어나와 있는 쪽지 귀퉁이를 향했다.

고윤아는 말없이 내 주먹의 힘을 풀고 쪽지를 가져갔다.

“수아야. 너 몇 학년 몇 반이지?”

“··· 저 5학년 2반이에요.”

아이가 조금 작다 싶었는데, 생각보다 나이가 많았다.

5학년이면 알만한 것은 다 아는 나이다.

머리가 그래도 어느 정도 여물었을 놈이 이런 장난을 쳤다고 생각하니 더욱더 화가 났다.

“··· 오빠.”

그때였다.

고윤아가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녀는 나를 향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이가 놀랐어요.”

그제야 내 눈에 수아의 모습이 제대로 들어왔다.

무서운 얼굴을 한 나에게 질리기라도 한 것일까.

수아는 놀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자기가 무슨 큰 잘못을 해서 혼이라도 나는 게 아닌가 걱정하는 듯.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아이를 향해 나는 키를 낮췄다.

“수아, 학교는 재미있어?”

나는 얼굴에 힘을 풀고 최대한 온화하게 말했다.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숨을 푹 내쉴 수밖에 없었다.

겁을 잔뜩 먹은 아이에게 뭘 더 캐물을 수 있겠는가.

나는 지갑 안에서 명함을 꺼내 수아에게 건넸다.

“수아야. 이거 아저씨 명함이야. 아저씨도 수아처럼 여기서 자란 거 알고 있지?”

끄덕끄덕.

수아의 둥근 머리가 또 한 번 그네처럼 흔들렸다.

“신부님이 계시지만, 혹시라도 어른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아저씨한테 연락해줘. 무슨 말인지 알겠지?”

“··· 네. 안녕히 계세요.”

수아는 나에게 인사를 꾸벅하고 등을 돌려 원장실을 나갔다.

나는 수아의 가방에 붙어있던 쪽지를 바지 주머니 안에 구겨 넣었다.

“왜 그러니.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사정을 모르는 신부님이 의아해하며 나에게 물었다.

“아니에요. 수아가 오학년이었네요. 애가 체구가 작아서 저는 겨우 10살쯤 된 줄 알았어요.”

”그렇지 않아도 걱정이야. 특히나 요즘 들어서 수아가 밥때마다 끼적끼적 이라고. 생전 반찬 투정 한번 한 적 없는 애인데 말이야.“

아무리 신부님이 아이들을 살뜰하게 챙기신대도 학교생활까지 속속들이 알지는 못하시겠지.

지금 수아처럼 입을 다물어버리면 더더욱 말이야.

“신부님. 요즘도 애들 초등학교 다 송연으로 가나요?”

“그래. 여기서 제일 가까운 학교니까 말이야.”

“알겠어요. 신부님. 저 이제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벌써? 조금 더 있다가 가지 그래.”

신부님은 내가 급작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아쉬운 기색을 숨기시지 못하셨다.

“애들 이제 하교 시간이니까 준비할 것 많으시잖아요. 그리고 일이 있어요. 다음에는 승우랑 시간 맞춰서 함께 올게요.”

“그래. 바쁘지. 가야지. 암.”

이런!

울보 신부님의 눈가가 금세 촉촉해지셨다.

나는 다정하게 신부님을 안아드렸다.

어린 시절 그렇게나 커 보였던 당신이 내 품 안에서 겨우 한 줌이었다.

··· 그런데 원래 이렇게까지 마르셨던가?

신부님은 보육원 정문까지 나와 윤아를 배웅하셨다.

“우리 영수를 잘 부탁합니다.”

신부님은 머리가 땅에 닿을 듯 고윤아를 향해 허리를 숙이셨다.

나이 많은 어르신의 너무나 공손한 인사에 황망해진 것은 고윤아였다.

“신부님···”

신부님은 우리가 주차된 차에 올라탈 때까지 언덕 위에 서서 손을 흔들고 계셨다.

“정말 좋은 분이시군요. 이젠 알 것 같아요. 오빠의 굳은 심지가 어디서 나왔는지.”

“나의 진정한 아버지야.”

··· 비록 몸은 장영복 회장에게 받았을지 몰라도 말이야.

나는 음절 하나하나를 힘을 주어 씹었다.

내 말의 뜻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고윤아는 조수석에서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신부님에 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의 작은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아이의 책가방에 붙어있던 쪽지도.

돈이 없었을 때나 엄청난 재산을 가지게 된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생각이 있다.

가진 것이 많다고 위세를 부리는 건 정말로 멋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 멋없는 짓을 한번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윤아야. 경기도 교육감 만났었잖아. 장학회 일 때문에.”

“네. 홍정민 교육감이었죠.”

“··· 나 그 교육감이랑 지금 통화 한번 하고 싶어.”

* * *

“아이고, 한영수 이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예. 반갑습니다.”

“네. 저는 학교법인 송연의 이사장 김영철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김난주 교장 선생님, 그리고 여기는···”

교육감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송연 초등학교의 관계자들이 버선발로 날 맞이 했다.

그들은 경기도 교육청과 큰 규모의 MOU를 맺은 선재 장학회의 이사장의 등장에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사장이야 당연히 초면이었지만 송연 초등학교의 교장은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하필이면 오늘.

참으로 기막힌 인연이구나.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은 조소에 가까운 것이었다.

김난주 교장은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었다.

그 당시 30대 후반이었던 그녀는 이 학교에 계속 남아 교장의 자리까지 오른 모양이었다.

6학년 첫 시험에서 나는 반에서 1등을 했었는데, 교장은 나의 커닝을 의심했다.

교장은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보육원 출신의 고아가 좋은 성적을 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억측에 나는 억울한 심정을 표출할 수밖에 없었는데, 교장은 그것을 교권에 대한 반항으로 치부했다.

반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차지한 나는 그 대가로 복도에서 손을 들고 벌을 서야 했다.

큰 벌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분통함에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어야 했다.

나는 그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교장은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젊은 분이 정말 훌륭한 일을 많이 하신다고 교육감님께 전해 들었습니다. 여기 송연 초등학교의 역사에 대해 잠깐 말씀드리자면···”

교장실로 나와 고윤아를 안내하면서 김영철 이사장은 잠시도 입을 쉬지 않았다.

그는 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아주 오랫동안 나를 흠모해왔다는 듯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알고 있습니다. 저도 송연 초등학교의 졸업생이니까요.”

“그러셨군요! 하하하! 그건 또 제가 몰랐습니다. 학교의 자랑이십니다.”

김영철 이사장은 눈을 빛내며 손뼉을 쳤다.

나의 방문이 이 학교의 재산을 불려줄 특별한 이벤트가 될 거라는 확신에 차 있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나의 존재에 대해 슬쩍 힌트를 흘렸음에도 김난주 교장은 여전히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교장실에는 미리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김영철 이사장은 상석에 나를 안내했고, 좌우로 우리의 뒤를 따라온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다.

“장학재단을 운영한다는 사람이 진작에 모교를 한번 찾아왔어야 하는데 제가 너무 늦었습니다.”

김영철 이사장과 동석한 교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손사래를 쳤다.

“별말씀을요.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겨있을 이곳을 다시 찾아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 추억이요. 그래요. 사실 좋았던 것들만큼이나 속상했던 기억들이 많습니다만.”

심상치 않은 말에 모두의 얼굴에 순간 긴장의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예. 아무튼 여기에 온 것은 송연 초등학교에 후원을 좀 하고 싶어서입니다.”

꿀꺽━

김영철 이사장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학교발전을 위해 10억을 기탁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송연 초등학교에서 품행이 단정하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몇 뽑아 장학생으로 선발하고 싶고요. 제가 그래도 되겠습니까?”

10억이라는 숫자는 이사장과 교사들의 눈을 과장 없이 몇 CM 정도는 튀어나오게 만든 것 같았다.

그들의 표정에 굴종이 깃들었다.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죽으라는 것 빼고는 뭐든지 할 기색이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사장님의 후배들이 이 소식을 알게 되면 얼마나 기뻐할까요. 동문회보에 이 사실을 알리겠습니다. 그리고 또···”

“아니요. 그런 건 괜찮습니다. 그보다···”

나는 날카로운 눈을 하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송연 초등학교에 자애 보육원의 아이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자애 보육원이요?”

김영철 이사장의 눈이 김난주 교장을 향했다.

그는 그녀에게서 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으려 했다.

“아··· 예, 학교 근처에 있는 작은 보육원인데, 거기 원생 중 몇 명이 우리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근처? 우리 학생들 다 추첨으로 뽑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는 한데, 우리 학교가 1지망으로 선호되지는 않고 있어서···”

김난주 교장은 슬쩍 내 눈치를 보며 말을 흐렸다.

“그리고 그 보육원을 운영하는 신부님께서 교육 지원청에 가서 간곡히 부탁을 하셨나 봐요. 원생들이 가까운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요.”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여러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고 다니셨을 신부님을 생각하자 마음 한쪽이 저렸다.

“사실 그래서 면학 분위기를 걱정하는 학부모님들도 좀 계시고···”

“저도···”

나는 교장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다시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모였다.

“자애 보육원 출신입니다.”

정적.

순간 교장실에서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구겨진 쪽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오늘 자애 보육원을 갔더니 한 아이의 책가방에 이런 쪽지가 붙어있더군요.”

꾸깃꾸깃한 종이 위에 삐뚤빼뚤한 글씨를 이 자리의 모두가 읽었지만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예. 철없는 어떤 아이의 장난이었겠죠. 하지만 장난삼아 던지는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 저를 아직도 기억 못 하시겠습니까?”

나는 차가운 눈으로 김난주 교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나를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래요. 교단에 서서 많은 아이를 가르치셨을 테니 기억 못 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요. 하지만 저는 교장 선생님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제가 보육원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시험에서 남의 것을 훔쳐봤을 거라며 벌을 세우던 엄격함을요.”

이제야 기억이 떠오른 걸까?

교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제 유별난 기억력보다는 아마도 그날이 제게 큰 상처였기 때문에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학교 다닐 때 부모가 없다는 이유로 나와 내 가족들을 무시하던 아이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때마다 선생님들은 친구끼리는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말로 성의 없는 화해를 강요하셨습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다과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물론 교육 현장에서 어려움이 많으시겠지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학교에 제법 큰 돈을 기부하려고 합니다. 그건 무언가 요구를 할 자격이 있다는 거지요.”

나는 다과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애 보육원의 제 동생들. 두 번, 아니 세 번 더 관심을 가지고 따듯하게 대해주세요. 송연 초등학교가 10억을 받는 대가입니다. 그리고 한번 더 이렇게 제 동생들의 마음에 못이 박히는 일이 발생한다면 저, 절대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내가 아는 그 친구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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