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두 여자
“아니··· 이거 석 달 뒤에는 무조건 받을 수 있는 겁니다. 10억짜리 어음을 6억에 넘기라니요.”
여기는 최화란의 사채 타운.
그녀의 앞에는 푸석푸석한 얼굴을 한 남자가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는 소위 말하는 ‘어음깡’을 하기 위해 최화란을 찾아온 참이었다.
남자의 잔뜩 갈라진 목소리에도 최화란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어머··· 사장님. 그럼 은행을 가셔서 대출이나 어음 할인을 받으시던지요.”
세모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향해 종로의 사채 여왕은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그녀를 찾아오는 이들은 대충 두 부류였다.
은밀한 돈을 원하는 힘이 있는 자들이거나,
당장 아주 큰 목돈을 구하지 못하면 절벽으로 떨어지게 생긴 이들.
지금 자신 앞에 있는 남자야 볼 것도 없이 후자였다.
그리고 최화란은 두 부류 중 어느 쪽에 더 가혹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게··· 안되니까··· 여기까지 온 것 아닙니까···.”
남자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입술도, 남자의 안색도 모두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세 달 뒤에는 무조건 받는다라··· 사장님, 있잖아요. 제가 저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제일 많이 듣는 말이 뭔지 알아요? ‘무조건’이에요.”
여전히 최화란은 웃고 있었지만, 그녀가 내뱉는 말들은 결코 친절하지 않았다.
“··· 그런데 그 무조건이 자발적으로 지켜지는 경우는 거의 없더라고.”
최화란은 자발적이라는 말에 힘을 주어 차갑게 말했다.
그 서늘함에 남자는 잠시 몸을 움츠렸고, 절로 시선이 최화란 옆에 경호원처럼 서 있는 건장한 사내를 향했다.
“8억··· 8억까지는 좀 쳐주십쇼.”
남자의 목소리는 마치 장기를 몇 바퀴 비틀어 내는 것 같았다.
그만큼 침통하고, 어두웠다.
“사업하시니까 잘 아시잖아요. 장사에서 제일 힘든 게 수금이라는 걸. 그 힘든 걸 우리가 대신 하는 건데 그렇게는 안 되겠어요.”
“··· 진짜 너무 하는 거 아니요! 이거 다 불법 아닙니까!”
남자는 소리를 벌떡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연히 남자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결코 이곳에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할 것임을.
법의 보호를 받을 길이 없어 여기를 찾았다는 것을.
그렇기에 남자가 내뱉은 말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상대에게 작은 위협조차 될 수 없었다.
“아니, 사장님. 조건이 마음에 안 들면 그냥 가시면 되지, 왜 주둥이를 함부로 쓰십니까?”
최화란 옆에 있던 정장이 당장이라도 남자의 멱살을 잡을 듯이 사납게 앞으로 나섰다.
“··· 됐어.”
최화란은 손을 들어 정장을 제지했다.
“제가 칼 들고 사장님 협박하는 것도 아니니까. 시비하실 것 없어요. 그렇게 소리 지르실 거면 나가주셨으면 좋겠네요.”
말 문이 막힌 남자는 고개를 떨구고 몇 번 휘휘 젓더니, 그대로 등을 돌려 최화란의 방을 나섰다.
그의 어깨는 힘없이 툭 떨궈져 있었다.
“사장님. 요즘 시장이 꽁꽁 얼어서 저 정도 건수 찾기 힘든데, 사정 좀 봐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래서 더 의심스러워.”
“예?”
“네 말처럼 시장이 잔뜩 얼어붙었는데 10억짜리 어음을 들고 돌아다닌다? 뭔가 냄새가 나잖아. 우리한테 누가 폭탄 던지는 걸 수도 있고.”
최화란은 콧방귀를 꼈다.
“혹시라도 다음에 내 사무실까지 올리지 마. 1억 더 까서 불러봐. 어떻게 나오나 보게.”
“알겠습니다. 사장님.”
최화란의 수하는 그녀의 말이 끝났음에도 어쩐 일인지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
무언가 그녀에게 할 말이라도 있는 것으로 보였다.
“··· 왜? 뭐 할 말 있어?”
“아닙니다. 왠지 사장님이 돌아오신 것 같아서 반가워서요.”
“내가 뭐 어디 갔었나.”
“요즘에는 여기 종로보다 강남 쪽에 더 많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흐응━
최화란은 콧소리를 냈다.
“뭐··· 한영수, 그 애랑 있으면 재밌기는 하거든.”
한영수.
처음에는 그저 얼굴 좋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신통한 녀석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데리고 쓰면 일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한영수를 옆에 잡아두려고 일부러 추파를 던져보기도 했다.
물론, 한영수 쪽에서 최화란에게 철벽을 치긴 했지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영수는 자신이 평가했던 것 이상이며, 결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아니. 부끄러워서 차마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지만, 최화란은 한영수를 태양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밝음과 뜨거움이 최화란은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녀는 태생이 어둠과 가까웠다.
몸 파는 어미의 배 속에서 태어난 딸은 인생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어둠에 먹히지 않기 위해 그녀는 먼저 어둠을 먼저 먹어 치웠다.
그렇게 음지는 그녀의 집이 되었다.
그것에 대해 후회는 없었다.
어쩌면 제 어미와 똑같은 처지가 될 수도 있었던 인생을 이만큼 개척해냈으니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렇다.
그녀는 자신이 떳떳했다.
하지만 한영수를 만난 이후로 최화란은 자꾸 자기의 인생을 뒤돌아보게 되었다.
그와 함께라면 자신도 태양 아래서 당당하게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자꾸만 생겼다.
처음엔 자기가 짝사랑에라도 빠진 줄 알았던 최화란이다.
그 생각이 영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방을 거의 신적인 존재로 바라보기 마련 아닌가.
하지만 아무리 따져보아도 그건 아니었다.
한영수를 보면 분명 가슴이 뜨거워질 때가 있지만, 그건 분명히 남녀 사이의 애정, 혹은 성적인 갈망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똑똑━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들겼다.
“누구야? 가서 문 열어봐.”
최화란의 지시에 따라 그녀 옆에서 있던 수하가 문을 열자, 또 다른 그녀의 수하가 상기된 표정으로 최화란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 뭐야, 쟤 왜 저래?”
“큰 손님! 이 왔습니다.”
“얘, 좀 천천히 말해볼래?”
유난을 떠는 수하가 못마땅했던 최화란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 장은우 사장입니다. 태상 백화점 장은우!”
***
두 여자가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화려한 두 여자.
그 둘 중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장미의 색처럼 붉은 입술을 자랑하는 여자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최화란이라고 합니다. 장은우 사장님.”
예의를 갖춘 최화란의 인사를 장은우는 한쪽 다리를 꼬아 올리며 받았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듣자 하니 ‘이쪽’ 세계에서 명성이 자자하시다면서요?”
장은우의 말 저편에 숨어있는 오만함이 최화란의 신경을 건드렸다.
‘··· 건방진 년. 같은 서울 한복판에 있으면서 네가 사는 세계와 내가 사는 세계가 무슨 선으로 딱 나뉘어 구분되기라도 하니?’
물론 프로 중의 프로인 최화란이였기에 속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나는 일은 없었다.
대신 말속에 가시를 아주 조금만 심었을 뿐이었다.
“천한 년에게 명성이라니 과분한 말씀이네요.”
“천하다니요. 사실 지하경제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경제가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었겠어요? 기업인들과 사채시장,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잖아요.”
··· 뭐 그것도 우리 아버지 세대까지의 이야기지만.
장은우는 들릴 듯 말 듯 작게 뒷말했다.
최화란은 뒷말은 못 들었다는 듯 쾌활하게 입을 열었다.
‘자··· 태상의 공주님이 날 왜 찾아왔을까?’
최화란은 장은우가 심어준 유쾌하지 않은 첫인상은 과감하게 지워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일만 생각하자.'
근래에 사업차 만났던 이들 중 가장 거물이다.
거물들은 돈 냄새를 몰고 다니기 마련이다.
“그나저나, 사장님께서 어쩐 일이실까요. 제가 태상 백화점의 VVIP이긴 합니다만··· 직접 고객 관리를 하시는 건 아니실 테고요.”
최화란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장은우를 날카롭게 훑고 있었다.
“최 사장님이라고 편하게 부를게요. 내가 그래도 되겠어요?”
“물론이지요.”
장은우는 입술을 달싹이며 잠시 머뭇거렸다.
최화란은 참을성 있게 태상의 딸이 도대체 뭐라고 할지, 장은우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기업인들이나 정치인들 많이 알고 지낸다고 하시던데, 제가 들은 말이 맞나요?”
“제 입으로 말하긴 조금 그렇지만, 높은 분들 심부름을 종종 하곤 합니다.”
“심부름을 한다는 건 입이 무겁다는 것과 같은 말이겠죠?”
“그럼요. 입에 자물쇠를 거는 대신 심부름 값을 좀 받는 게 제 일인 걸요.”
장은우는 꼰 다리를 풀지 않고 구두 끝을 까닥거렸다.
“그래요. 우리 사이에 신뢰를 지금부터 쌓아볼까요? 내가 작은 일 하나만 부탁하고 싶은데.”
말 잘 들으면 앞으로 곶감이라도 주겠다는 투.
“차명계좌, 해외 거래가 가능한 차명계좌 하나만 만들어줄 수 있겠어요?”
최화란은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 눌렀다.
그까짓 것, 최화란에게는 식은 죽 먹기처럼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참 순진한 공주님이네.’
장은우 본인이 말한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어떤 신뢰도 없다.
그저 오늘 처음 만났을 뿐이다.
그런 사람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불법을 말하는 장은우의 천진난만함이 최화란은 우스웠다.
“아니, 내 주변 사람들은 왜 그렇게 겁이 많은지··· 자꾸 어디다 쓰려고 그러냐고 꼬치꼬치 캐묻잖아.”
“차명 계좌쯤이야, 당장 내일이라도 만들어 드릴 수 있지요.”
“··· 내일?”
시원스러운 최화란의 대답에 장은우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비용은 알아서 처리해주시고, 빨리 준비 좀 해줘요. 그러면.”
“어머, 걱정하지 마세요.”
“나 벌써 사장님이 마음에 들기 시작하네. 용건은 이 정도면 됐고. 우리 친분은 다음에 또 쌓아볼까요?”
장은우는 우아한 자세로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화란 역시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뒤를 따랐다.
또각━ 또각━
두 여자는 정확히 같은 보폭으로 걸었기에 구두 굽 소리가 겹쳐 울렸다.
“사장님, 제가 연락을 드릴까요? 아니면 사람을 따로 보내시겠어요?”
“아니요. 제가 이번 주 내로 다시 한번 찾아뵐게요.”
방을 나서기 위해 문고리를 잡아당기려던 장은우.
무언가 생각이 나기라도 했다는 듯 그녀는 동작을 멈추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여기 왔었다는 건 절대 비밀이에요. 아랫사람들도 입단속 잘 시키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서로 간의 신뢰가 잘 지켜진다면 앞으로도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가 될 수도 있는 거고··· 그러지 않는다면··· 내 말 무슨 소리인지 아시죠?”
“아무렴요. 걱정 붙들어 매세요.”
장은우가 나가자 웃음을 잃지 않던 최화란의 표정이 무섭도록 삽시간 만에 차분해졌다.
다시 앉았던 소파로 돌아온 그녀는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탈세를 위해 차명계좌를 쓰는 것은 드문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장은우 정도라면 자신에게 찾아올 것도 없이 내부적으로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문제라는 건데···’
따로 밑에 사람을 시키지 않고 직접 자신이 발로 움직이는 걸로 보아 틀림이 없었다.
최화란의 붉은 입술 한쪽이 비죽이 올라갔다.
그 입술이 작게 열리며 음성을 뱉었다.
“··· 재밌네.”
‘그래. 일단 던져줘 볼까. 잘 감으면 틀림없이 뭐라도 나오겠어.’
이때까지만 해도 두 여자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신들 사이에 한영수라는 존재가 끼어 있다는 사실을.
금의환향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