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거래 (2)
“··· 제가 관심 있을 이야기요? 그게 뭘까요.”
직장생활을 하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업무?
연봉?
승진?
조직문화?
백 사람에게 물으면 백 가지 답이 나오겠지만 개인적으로 가장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인간관계라고 생각한다.
중식 모터스 시절, 이제 막 사회 초년생 냄새가 빠지기 시작했던 어느 날 인간관계에 대해 내가 세웠던 원칙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상대에게 필요하고 아쉬운 사람이 될 것.
둘째. 결코 모든 카드를 다 내보이지 말 것.
셋째. 억지로 사랑받으려고 노력하지 말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대에게 의도적인 불편함을 줄 것.
누군가는 그게 뭐야, 하며 피식 웃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고작 삼십 년하고도 몇 년을 더 한, 인생 덜 산 놈의 개똥철학에 지나지 않을지도.
그래도 한가지 내가 확실히 보증할 수 있는 건, 저 원칙을 성실히 지켜온 십 년 남짓한 회사 생활 동안 직장 내 인간관계 때문에 밤잠을 못 이룰 정도로 마음고생을 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최고의 빌런이었던 임 차장 정도가 유일한 예외였달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유 차관과의 대화가 생각나는 대로 흘러가도록 방조하지 않았다.
의식의 흐름을 무심히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입을 열었다.
유 차장의 지금 반응을 보아할 때, 나의 전략이 성공적으로 먹혀들어 간 것이 틀림없었다.
아쉬운 소리를 하기보다 듣는 일에 익숙할 유호성 차관이 내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저울의 천칭이 내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한 회장님. 혹시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자랑 같아서 부끄럽습니다만, 재주는 많이 없어도 기억력 하나는 좋은 편입니다. 대화 하나, 하나를 모두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고왕 건설을 인수하면 해외시장 진출에 전력을 다하시겠다고 하셨지요. 특히 카타르의 계획도시 건설에 관심이 많으시다고.”
“예. 맞습니다. 에메랄드 시티라고 명명된 것이지요.”
“제가 그것과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조금 실망스러웠다.
초연한 척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사실 봄을 기다리는 처녀처럼 유 차관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메랄드 시티에 대한 썰이라면 이미 앨런에게 듣지 않았던가.
아무리 고위 관료라고 해도 결국 공무원.
세계 경제의 중심지 월스트리트에서 나온 정보보다 그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두 번 들어봐야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어쨌든 나는 실망감은 저편에 밀어둔 채 다시 귀를 기울였다.
혹시라도 내가 모르는 새로운 것을 듣게 될 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아직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은 일정이니, 철저하게 보안 유지 해주셔야 합니다. VIP 일정입니다.”
유 차관이 말하는 VIP란 대통령을 말한다.
왜 대통령을?
짙은 안개 속에서 발밑에 온 정신을 기울이듯, 나는 차분히 유호성 차관의 말을 행적을 좇으려 노력했다.
“상반기 내로 카타르 제 2 왕자인 아메드 빈 알리가 방한을 할 겁니다. 무역부 장관과 교통부 장관을 대동하고요. 에메랄드 시티, 그 사업 카타르 정부··· 아니, 카타르 왕족 주도로 진행될 겁니다. 그렇다면 그 방한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제가 굳이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죠.”
잠깐.
무역부 장관은 그렇다고 해도 교통부 장관을 대동한다는 것은 분명히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에메랄드 시티에 대한 논의가 오갈 것이라는 소리다.
아마도 한국 기업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해달라는 주문이 있겠지.
하지만.
앨런이 말하길, 분명히 프로젝트의 진행은 왕세자가 맡을 것이라고 했다.
··· 그런데 왜 2 왕자인가?
그 이유를 깊은 심해처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중동의 왕자들은 협력보다는 경쟁에 익숙한 존재들 아닌가.
형의 사업을 돕겠다고 한국으로 건너오는 왕자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군요. 왕세자를 건너뛰고 제 2 왕자가··· 외교라는 건 격을 맞추는 게 기본 아닙니까? 카타르가 우리의 국격을 낮잡아 볼 리도 없고···”
궁금증의 해갈을 위해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유 차관에게 질문을 던졌다.
유호성 차관의 얼굴이 묘했다.
그 표정 뒤편에는 ‘드디어 요 젊은 놈의 기를 좀 죽였구나’ 하는 작은 만족감이 포함된 것 같았다.
“왕세자의 건강이 그리 좋지 않다고 합니다.”
아···
유 차관의 짧은 말 몇 마디에 단숨에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왕세자가 바뀔 수도 있겠구나!
그 둘째 왕자라는 자에게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가 자신을 증명하는 시험 무대가 될 것이고.
권력을 잡기 위해 사활을 다 할 것이니, 내 예상보다 에메랄드 시티가 더 판이 커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이런.
한영수 이 어리석은 놈아···
유 차관에게서 들을 게 뭐 들을 게 있겠냐고 건방을 떨던 오 분 전의 나를 혼쭐을 내주고 싶었다.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소식이군요. 하지만, 대통령께서 카타르의 왕족을 지금 저희처럼 조용히 만날 것도 아니고 결국엔 대중에 공표될 일정 아닙니까?”
나에게 조금만 더 무언갈 보여달라.
이빨이 썩어도 좋으니 달달한 것을 먹고 싶다.
당신이 나에게 해줄 것이 분명히 더 있을 것이다.
나는 유호성 차관에게 말보다 더 솔직한 마음을 눈으로 전했다.
유 차관은 이놈 좀 보란 표정으로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소리까지 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 부처는 뒷문을 통해 많은 일을 합니다. 사실 반강제적으로 고왕 건설을 움직이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시장의 자율성을 해치는 행위고요. 명백하게 차관님의 신념에 반하는 일이지요. ‘노예의 길’로 가는.”
노예의 길은 유호성 차관의 정신적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학자 하이에크가 저술한 책의 제목.
당연히 그에게는 금과옥조와 다름이 없다.
하하하━
또다시 유호성 차관이 크게 웃었다.
이것이 세 번째.
더도 덜도 없이 딱 세 번이라는 말도 있듯이 더 이상 그는 내게 속내를 숨기지 않으리라.
“좋습니다. 오피셜 하나만 더 알려드리겠습니다. VIP 와 회담이 끝나고 국내 기업인과의 만남도 일정에 계획되어 있습니다.”
꿀꺽━
마른침을 삼켜 넘겼다.
프로젝트 총책임자와 얼굴을 맞댈 수 있는 절호의 기회!
“···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메드 빈 알리의 방한 일정은 아주 짧습니다. 많은 시간이 없다는 것이죠. 아마 그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재계 순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그룹의 총수들 뿐일 겁니다.”
당연히 고왕 건설을 재계 순위에서 찾으려면 다섯 손가락이 아니라 양손과 발가락까지 동원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기회조차 허용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소리.
하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참을성 있게 유 차관의 입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
“예?”
“한 대표의 지금 표정 말입니다. 예전에 본 적이 있어요.”
유호성 차관은 갑자기 딴소리를 했다.
“예전 기재부에서 사무관 시절에··· 아 그 당시는 재정경제부였지요. 아무튼 장관님을 모시고 장영복 회장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저야 말석에 앉아있는 것에 불과했지만 곁눈질로 본 장영복, 그 양반은 정말 걸물이더군요.”
“··· 그렇습니까.”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발음을 흐리게 뱉었다.
유 차관이 내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 리가 없건만, 또다시 내 앞에서 장영복 회장이 소환되었다.
정말 지독하고 질긴 피의 끈.
“한 나라의, 그것도 위상 높은 부처의 장관이 장 회장에게 꼼짝을 못했습니다. 사실 저는 당시 태상의 문어발식 확장에 대해 부정적인 소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뭐··· 장영복 회장의 아우라는 인정할 수밖에 없더군요.”
“...”
“그 이후로 일을 하면서 피치 못하게 많은 재벌 총수들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장 회장만큼의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사람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해도 우습지만 한 회장님을 보고 있자니 그때가 생각이 나는 건 왜일까요?”
그가 내 생부니까.
나는 할 수 없는 말을 가슴 속에 숨긴 채 입을 열었다.
“과찬이십니다. 재계의 전설적인 인물과 제가 어디 조금이라도 닮은 구석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좋은 뜻으로 말씀하신 걸로 알고 감사하게 생각하겠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 보기 힘든 겸손함이란 미덕까지 갖추셨군요. 분명히 한 회장님에게는 신기한 힘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기대감을 가지게 만드는.”
유호성 차관은 자기 말에 스스로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작게 몇 번 끄덕였다.
“고왕 건설을 인수했던 것처럼 에메랄드 프로젝트에도 분명히 한 회장님과 고왕 건설이 뭔가 해낼 거라는 예감이 듭니다. 그건 국내 경제의 활성화에도 분명히 고무적인 시너지를 가져오겠지요. ··· 제가 만능 재주꾼은 결코 아닙니다만, 아메드 빈 알리의 만남에 한 회장님에게도 자리가 돌아가도록 한번 힘을 써보겠습니다.”
유 차관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는 악수를 청하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이제 구미가 당기십니까. 한 회장님 말처럼 저는 학자에 더 어울리는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장사에는 영 재주가 없군요. 여기서 뭘 더 달라고 하면 제가 몹시 난감해집니다.”
나는 공손하게 유호성의 손을 맞잡았다.
당연히 더 이상 간을 볼 이유가 없다.
“제가 고왕 건설의 대표이사에 오르고 첫 번째 사업입니다. B 시의 시민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시공을 하겠습니다.”
이걸로 거래 종료.
각자가 원하는 걸을 얻자 비로소 우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 그런데 차관님.”
소고기 불고기를 덜던 젓가락을 잠시 멈추고 나는 유 차관에게 말을 걸었다.
“예. 왜 그러십니까.”
“카타르 왕자의 만남에 당연히 태상 그룹도 참석하겠지요? ··· 장은수 회장입니까?”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확인에 가까웠다.
“태상은 1순위입니다.”
유호성 차관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내 얼굴도 보지 않은 채 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태상 건설에서 퇴직한 이종현 씨를 사장에 앉히셨더군요. 혹시나 태상과 마찰은 없겠습니까?”
“태상이 어떤 감정을 가지는지까지는 모르겠으나, 법적인 문제는 전혀 없습니다.”
참으로 얄궂은 운명이다.
기어코 장은수 회장과 만나게 되겠구나.
그것도 아주 중요한 자리에서.
은호 형님을 만나게 될 때와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그때는 도망치고 숨으려고만 했었고, 지금은 맞서려고 하고 있다.
장은수와 나.
우리는 서로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와 마주 보게 되었을 때의 그림이 어떨지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
입으로는 유 차관과 사교적인 대화를 떠들었지만, 내 머릿속은 심히 복잡해졌다.
비극이란 놈은 지독한 불청객이기에 항상 모든 게 잘 풀려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 찾아온다는 걸 알기에.
두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