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거래 (1)
“여기도 메뉴판이 없군.”
여기는 성북동에 있는 한 고급 요정(料亭).
고풍스러운 좌식 식탁을 가운데 두고 나의 건너편에는 기재부 2차관 유호성이 앉아있었다.
이지적이고 차가운 인상의 이 남자는 마치 1과 1을 더하면 2가 된다는 사실을 알리듯,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했다.
“한 회장님. 참 이상한 일 아닙니까? 소위 말하는 재벌들과 식사를 한번 할라치면 가는 곳마다 메뉴판이 없더이다. 메뉴판이 있어도 가격이 적혀 있지 않거나.”
“글쎄요. 저는 초보 재벌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웃으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유 차관으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사흘 전이었다.
그는 나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고왕 건설을 인수할 때, 은행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다소간 그에게 빚을 지기도 했고 굳이 만남을 피할 이유가 없었던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같이 식사를 한번 하기로 했는데, 어디로 장소를 잡아야 할지 제법 고민을 했다.
세상에 좋은 곳이야 많다만은, 행정부의 고위 관료와 독대하는데 열린 공간을 갈 수는 없지 않은가.
혼자 고심을 하다가 최화란에게 슬쩍 조언을 구했다.
그녀라면 분명히 내가 원하는 장소를 찾아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래 (1)
“흐응··· 성북동에 삼원각이라는 곳이 있어. 거기면 적당할 것 같은데?”
“삼원각이요···? 중국집입니까?”
나는 진지하게 말한 것인데, 최화란은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
“우리 한 대표··· 알다가도 모르겠어. 가끔 보면 순진한 구석이 있다니까. 요정이야, 요정.”
은밀한 곳을 원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적절한 장소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하게 나오는 장면인 소위 ‘요정 정치’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정치인, 기업인, 고위 법조인, 기생, 매춘 따위의 어두운 단어들과 가까운.
나는 물론이요, 유 차관 역시 그런 장소를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자칫하면 큰 실례가 될지도.
최화란은 그녀답게 눈치 빨랐다.
내 표정을 읽고, 그녀는 붉은 입술을 열어 부연 설명을 했다.
“한 대표, 이상한 생각하는구나? 그냥 고급 한정식집이라고 생각하면 돼. 자기가 생각하는 그런 건 없으니까 안심하고. 대신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기에는 최적화되어 있으니까 접대 자리로는 괜찮을 거야.”
?
이것이 여기까지 오게 된 저간의 사정이었다.
세계 어느 나라든 ‘예산’이라는 곳간의 열쇠는 재무부가 움켜쥐고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내가 사는 이 땅도 다를 게 없어서, 기재부는 대한민국 경제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로라하는 대기업들도 기재부의 입김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 부처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유 차관.
어쩔 수 없이 사회적 연결고리가 약한 내게, 유호성 차관과 안면이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행운에 가까운 일.
여하튼 유호성 차관은 잘 걸렸다는 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참 재미있는 일이죠. 가격을 모르고 주문을 한다라. 시장경제에 역행하는 일입니다. 재벌들이야말로 시장경제의 첨병들인데 참 모순적인 일이지요.”
유 차관은 ‘가격’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본인이 가지고 있는 식견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저는 세상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가격’이라고 봅니다. 고전적인 시각이지만 생산과 분배의 균형을 맞춰주는 마법의 지팡이지요. 물론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구로써 다양한 모델이 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여서 그런지 몰라도, 유 차관의 말은 매끄러웠다.
자칫 문외한인 나에겐 어려울 수 있는 개념들을 잘 풀어서 전달했다.
공무원보다는 교육자나 학자에 더 어울리는 양반이군.
“대한민국 경제학계의 큰 손실이군요. 차관님은.”
“예···?”
“훌륭한 교수님이 되실 것 같습니다. 말씀을 듣다 보니 아! 그렇구나 하고, 절로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네요. 제가.”
유호성 차관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양쪽 입꼬리를 올렸다.
내 말에 불쾌하거나 기분 나쁜 기색은 결코 아니었다.
어쩌면 저 남자가 진정 살고 싶었던 삶은 그런 삶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고개를 든 유 차관은 자신이 언제 웃었냐는 듯 예의 그 무뚝뚝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결코 말이 많은 편은 아닌데, 제가 생각해도··· 조금 이상한 일이군요.”
“괜찮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그런데, 차관님께서 제게 가르침을 주시겠다고 부르신 건 아닐 테고요.”
“물론입니다.”
“긴 이야기가 되겠습니까?”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나는 손을 들어 식탁을 향해 내밀었다.
식탁에는 아직 수저가 닿지 않은 산해진미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 차관의 말대로 주인 마음대로 가격을 부르는 그 음식들이.
“그럼 일단 배부터 채우시죠. 머리는 차관님으로부터 좋은 말씀에 감사하고 있는데, 교양 없는 배는 아까부터 난리입니다.”
죽은 사자의 갈기는 토끼도 물어뜯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이는 언제라도 큰 포효를 내뿜을 수 있는 살아있는 사자였다.
그렇다고 내가 파리처럼 그의 앞에서 두 손을 싹싹 비비고 있을쏘냐.
내가 알아보고 경험한 바에 따르면 유호성 차관은 굉장히 냉철하고 합리적인 인물이다.
그런 그가 나와 교분을 트겠다거나 혹은 접대를 받겠다고 만남을 청했을 리가 없다.
말 몇 마디로 대한민국 경제를 들쑤실 수 있는 그의 자리는 매사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내릴 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다.
분명히 유 차관은 나에게 모종의 ‘거래’를 제안할 것이다.
그 거래의 내용까지야 알 수 없다만, 그가 거래를 원한다면 내가 저자세를 취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아니지.
오히려 거래는 여유로운 놈이 이기는 법이다.
나는 수저부터 들자는 간단한 말에 유머를 아주 조금 섞어 분위기를 주도해나갔다.
“차관님, 이것도 좀 드셔보시죠. 맛이 정말 괜찮네요.”
능구렁이처럼 철저하게 용건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단지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으며 차려진 음식들에 대한 평을 했을 뿐이다.
“··· 한 회장님.”
참을성 대결에서 승리한 건 내 쪽이었다.
배가 반쯤 찼을 때, 드디어 유 차관이 본론을 말하기 시작했다.
“대용 건설이라고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예. 경기 지역 건설사 아닙니까. 도급순위 80위권의. 최근 회생절차에 들어갔다는 기사는 봤습니다.”
“맞습니다. 법정관리에 들어갔지요. 100대 건설사의 파산 위기라니··· 요즘 이 문제로 정부 입장에서는 고민이 많습니다. 물론 고왕 건이야 한 대표님 덕에 한시름 놓았습니다만.”
나는 잠시 유호성 차관을 바라보았다.
대용 건설을 인수라도 해달라는 건가?
나라도 모든 걸 알 수는 없으니 그들의 내밀한 속사정은 모르지만, 대용 건설은 월급 체불에 공사 중단 같은 문제가 작년부터 계속 터졌다고 한다.
업계에서는 갈 데까지 갔다는 불길한 소문이 진작부터 돌던 곳.
당연히 구미가 당기는 먹거리가 아니다.
잘못 먹었다간 배탈로 크게 앓을 수도 있다.
나는 유 차관의 의사를 확실히 알기 위해 발을 한 발짝 더 내밀었다.
“차관님. 오늘 어떤 회장을 만나려고 하신 겁니까. 고왕 건설입니까, 아니면 BH 인베스트먼트 입니까.”
“하하하!”
나의 당돌함이 그의 신경을 건드리기라도 한 걸까.
유호성 차관은 오늘 만나서 처음으로 소리를 내어 웃었다.
“제가 너무 모호하게 말했군요. 일개 관료가 기업인에게 M&A를 하라 마라 하는 건 시장을 어지럽히는 행위죠. 저는 그런 월권을 할 정도로 용기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다른 이야기입니다. 경기도 북부권에 B 시라는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B 시라.
살면서 가본 적은 없지만 들어본 적은 있는 곳이다.
“미군부대가 있는 그곳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예. 아파트 단지가 밀집된 일부 말고는 지역 대부분이 상당히 낙후되어 있는 곳이죠. 미군의 주둔으로 개발에 어려움이 있기도 하구요. 아무튼 역사적으로도 지역주민의 애환이 많은 곳입니다.”
왜 B 시가 등장한 걸까.
나는 유 차관의 말을 들으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설마 신도시 프로젝트라도 진행할 예정인 걸까?
아니다.
장밋빛 가설이 하나 떠올랐지만, 바로 오답이라는 판단이 섰다.
일단 방금 유 차관이 말했다시피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그곳에 신도시가 들어선다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일 것이다.
만약 가능하다고 해도 그런 귀중한 정보를 일부러 귀띔해줄 정도로 나와 유 차관 사이에 남다른 의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대용 건설··· 노후된 도시··· 지역주민의 애환···
머릿속에 퍼즐이 슬슬 맞춰지기 시작했다.
“도시환경정비사업이겠군요. 그 사업의 시행사로 대용 건설이 선정되었을 것이고··· 당연히 그들은 지금 상황에 사업을 더 이상 수행할 능력도, 의지도 없겠죠?”
빙고!
유호성 차관의 오른쪽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그의 얼굴을 보며 내 추리가 들어맞았다는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거 놀랍군요. 특별히 힌트를 드린 것 같지도 않은데.”
감탄의 기색을 숨기지 않던 유 차관이 이어 말했다.
“그럼 빙빙 돌리지 않겠습니다. B 시의 도시환경정비사업, 고왕 건설에서 좀 맡아주시지 않겠습니까?”
“그건 지자체 소관 아닙니까. 왜 중앙부처에서 직접···”
“맞는 말씀입니다.”
유 차관의 얼굴이 모나게 찌푸려졌다.
“강원도 테마파크 부도는 잘 알고 계시겠죠. 결국 지자체가 감당을 못해 우리 부처와 협의 끝에 2,000억을 겨우 막았습니다. 이후 지방채에 대한 금융기관들의 신뢰가 말 그대로 박살이 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돈이 전혀 돌지 않고 있습니다. 지자체에서 다른 중소 건설사들을 물색해보았지만 다들 고사를 했다더군요. 괜히 판에 끼었다가 자기들도 된서리를 맞을까 몸을 사리고 있습니다. VIP께서도 이 상황을 심각하게 주시하고 계시구요.”
“그 말인즉슨, B 시의 도시정비사업은 B 시가 아니라 정부가 보증한다고 이해해도 될까요.”
“··· 정부에서는 건설 업계의 유동성 위기 탈출을 위해 앞으로 50조 원 이상을 준비할 예정입니다.”
확답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긍정적인 대답이었다.
사실 고왕 건설 내부에서 회장이 지나치게 해외 사업에 열정을 보인다는 볼멘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들에게 사업을 하나 던져주고 달래는 것도 나쁠 것 없으리라.
하지만, 지조 없이 바로 덥석 무는 것은 내 가치를 스스로 떨어트리는 짓이다.
나는 좀 더 유 차관의 간을 보기로 했다.
“어쨌든 공정한 입찰 과정을 통해 시행사를 새로 선정하는 것이 올바른 절차 아니겠습니까.”
“말씀드렸다시피, 건설사 선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만약 고왕이 하시겠다면 입찰은 요식 행위에 불과할 겁니다.”
“꼭 중소 건설사가 아니더라도 저희 말고 다른 회사들도 있을 텐데요.”
유호성 차관은 입술을 잠시 달싹거렸다.
그는 나의 말에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 아마 그들은 손사래를 치겠죠. 작은 도시의 정비 사업, 우리와 비슷한 규모의 건설사라면 볼만한 재미가 없으니까. 그리고···”
나는 유호성 차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차관님은 제가 차관님께 빚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겠죠. 그러니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고.”
얼마간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던 유 차관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오늘 여러 번 놀라게 하시는군요. 한 회장님.”
“차관님.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빚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차관님, 그리고 기재부를 비롯한 정부가 저에게 빚을 졌지요.”
아까 올라갔던 눈썹이 오른쪽이었던가?
이번엔 유 차관의 왼쪽 눈썹이 솟아올랐다.
“만약 고왕 건설이 무너졌다면··· 강원도 테마파크 사태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이 나라의 경제에 악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그걸 제가 구제했으니 당연히 이쪽이 감사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유 차관의 두 번째 웃음이었다.
“··· 처음 봤을 때도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박하기 어렵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요.”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는 유호성 차관.
그의 입이 다시 열린 것은 잠시 뒤였다.
“좋습니다. 한 회장님이 관심이 있을 이야기를 제가 하나 해드리지요.”
거래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