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24화 (124/200)

124. 고명딸 장은우

장영복 회장의 고명딸 장은우.

그 장영복 회장이 장은우를 바라보는 시선은 은수, 은호 두 형제와는 조금 온도 차가 있었다.

야심이 있고 그 야심을 받쳐줄 머리도 있지만, 정도가 지나칠 정도로 차가운 장은수.

호방한 성격에 인간적인 매력이 장점이나 통제가 어려운 장은호.

그 둘과 달리 장은우는 적당히 영리했으며, 또 적당히 어리석었다.

큰 그림을 그릴 그릇은 아닐지언정 이해가 부족하진 않았다.

능력에 비해 허영은 컸던 장은우가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태상의 퍼스트레이디를 자처하고 다닐 때도 장영복은 딸을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훗날 장영복 회장이 두 아들에게는 굵직한 계열사를 넘겨주었음에도 장은우에게는 고작 백화점 하나만을 맡긴 것은 그가 남아선호사상을 추종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고명딸이 가질 것은 그 정도가 딱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말 큰 실수만 없다면 말아먹을 일이 없는 사업.

장영복 회장의 눈은 언제나처럼 정확했고, 장은우 역시 큰 불만 없이 아버지가 맡긴 소임에 만족했다.

장영복 회장 사후, 물밑에서 벌어지고 있는 후계자 싸움조차도 장은우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늙은이들을 뒤에 줄을 세우고 서열 싸움을 하는 것은 그녀에게 감정과 시간의 불필요한 소모로 보일 뿐이었다.

인생에는 즐기고 누릴 것이 얼마나 많은데!

그저 징그러운 남자 형제 둘 사이에서 이득을 취할 수 있다면 그녀는 그걸로 만족이었다.

심지어 장은우는 아버지가 자신에 대해 가졌던 생각보다 훨씬 더 일을 잘 해내기까지 했다.

최고의 하이엔드 브랜드만을 입점시킨 압구정점은 명품들의 박물관이라고 불리며 하나의 관광코스로까지 자리를 잡았다.

이런 고급화 전략은 VIP들의 마음을 제대로 사로잡아, 경기와 상관없이 태상 백화점의 매출은 언제나 대호황이었다.

거기에 셀럽 기질이 다분한 그녀의 성향이 시너지를 발휘해, 어느새 장은우는 세계 명품 시장에서 주목받는 존재가 되기에 이르렀다.

40줄을 넘긴 그녀지만, 결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자신이 한 남자에게 묶이는 것은 그야말로 인생의 낭비라고 생각하는 장은우였다.

돈만 있다면 얼마든지 젊게 살 수 있다.

무너지지 않는 젊음은 그녀의 자랑이자 하나의 신앙.

보라!

지금도 장은우의 옆에는 그녀보다 열 살은 어린 일회용 남자친구가 있지 않은가?

아이돌 출신의 사업가 이시형.

이 출중한 외모의 남자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장은우의 애인 역할을 훌륭하게 해주고 있었다.

“사장님은 이틀 뒤에 출국이죠?”

“응.”

“에이, 좀 더 놀다 가지 그래요. 아직 라스베이거스 반도 못 즐겼는데.”

런칭 행사에 참석하면서 장은우가 수행원들을 일절 대동하지 않은 것은 이 남자와의 밀회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아직도 한창 잘나가던 시절의 앳된 기색이 남아있는, 자신과 나란히 침대에 누워있는 남자를 보며 장은우는 피식 웃었다.

“바빠. 한국 돌아가서 할 일이 태산이야.”

“그럼 한국 가서 연락해도 돼요?”

이시형은 라스베이거스에 체류하며 함께 쓴 모든 돈을 제가 알아서 먼저 계산했다.

그의 재산이래야 장은우가 가진 것에 비하면 비교도 할 수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다.

장은우는 그런 그를 굳이 말리지 않았다.

“하지 마. 우리 딱 트래블링 메이트까지만 하기로 했잖아. 그리고 너 허튼짓하다간 내 경호원들이 가만히 안 둘걸?”

“··· 와. 진짜 클래스가 다르시네요.”

엄살을 부리는 남자에게 장은우는 웃으며 입을 맞췄다.

“연락해. 대신 며칠 친하게 지냈다고 귀찮게 굴 생각은 하지 말고. 나 그런 거 아주 딱 질색이니까.”

장은우는 침대에서 일어나 가운을 걸쳤다.

“그런데 사장님, 라스베이거스가 또 도박의 도시잖아요. 카지노는 가보셨어요?”

“카지노?”

등 뒤에서 들리는 이시형의 목소리에 장은우는 몸을 돌렸다.

“네. 여기까지 왔으면 당연히 카지노는 한번 들려야죠.”

“내가 돈이 아쉬워서 도박 같은 걸 할 사람으로 보여? 관심 없어.”

“그거랑은 좀 다른데요? 돈 때문에 도박하는 사람들은 막장까지 간 거죠.”

이시형은 손가락으로 자기 관자놀이를 두어 번 툭툭 쳤다.

“저도 그렇고 사장님도 그렇고 돈이 아쉬운 사람들도 아니잖아요. 이건 머리랑 행운으로 하는 스포츠예요. 잃든, 따든, 그 긴장감과 해방감은 어디서도 맛보기 힘들다고요.”

장은우는 이시형이 감히 스스로를 자기와 같은 급으로 올려치기한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며칠간 그녀의 몸과 정신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 그에게 굳이 마음 속 쓴소리를 내뱉진 않았다.

“너 꽤 경험이 있나 보네?”

“뭐···”

이시형은 물어 뭐하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자랑이다. 겁도 안나? 원정도박 하다가 패가망신한 연예인들 주변에서 못 봤어?”

“에이. 그건 진짜 재수가 없어서 걸리는 거죠. 무리해서 조폭들 돈 끌어 쓰다가 탈이 나거나···”

“사람들이 알아보기라도 하면?”

“당연히 VIP들이 노는 곳만 가는 거죠. 그런 곳은 최우선 규칙이 프라이버시예요. 보안이 정말 철저하다니까요. 심지어 전세기나 헬기까지 보내주기도 하는걸요.”

하필이면 이때 장은우의 적당한 어리석음과 허영심에 발동이 걸렸다.

VIP 중의 VIP인 자신이 VIP들만 노는 곳에 가보지 않으면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소리지만, 화려한 파티가 끊이지 않았던 라스베이거스와 이대로 작별하기는 무언가 좀 아쉬운 그녀였다.

‘하기야. 어차피 잃어봐야 고작 몇백이겠지.’

몇백으로 이 도시와 추억을 하나 더 만들 수 있다면 비싼 값은 아니리라.

한번 마음이 기울기 시작하자 해보지 않았던 것을 도전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뭐 보안은 그렇다 치고, 외국환거래법 위반 아니야?”

장은우의 말에 이시형은 대단한 유머라도 들었다는 듯 으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사장님. 얼마나 크게 하시려고 그런 걱정을 해요. 그리고, 아마추어같이 왜 그러세요. 돈 문제는 알아서 깔끔하게 세탁한 후에 한국까지 문제없이 송금해 줍니다.”

“··· 그래?”

잠시 주저하던 장은우가 입을 열었다.

“그럼, 뭐. 구경이나 하러 가보자.”

***

“player 7, banker 3. player win. congratulation.”

“이번엔 내가 이긴 거 맞지?”

“예.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장은우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어디서든 도도함을 자랑하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녀는 지금 바카라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그저 카드를 받고, 그 카드를 까서 9 이하의 숫자로 높고 낮음을 겨루는 홀짝 같은 게임.

과연 이시형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도박판에 끼자 장은우는 온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끝없이 샘솟는 것 같았다.

세 바퀴만 돌아보면 초등학생도 규칙을 알 법한 이 게임이 왜 이리 재밌는지 장은우는 알 수가 없었다.

“사장님, 잠깐 일어나시죠.”

“왜? 이제야 분위기가 내 쪽으로 넘어온 거 같은데.”

장은우는 이 자리에 정확히 오천 달러를 들고 왔다.

고급 호텔 안의 밀실에 차려진 이 특별실에서 5천 달러는 비루한 군자금에 가까웠지만, 이 정도면 다 잃어도 웃으면서 나갈 수 있으리라.

머리털 나고 처음 해보는 것이니 초반에는 소심할 수밖에 없었다.

장은우는 100달러짜리 칩을 던지며 분위기를 읽어갔다.

도대체 이걸 왜 하는 건가 잠시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이시형의 친절한 코칭과 몇 번의 작은 승리 끝에 장은우는 슬슬 도박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본전과 손실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고 있던 때였다.

그녀는 과감하게 2천 달러짜리 칩을 내밀었고, 그 판에서 2배를 먹게 된 것이었다.

“크게 한번 먹었을 때는 쉬어가는 거예요. 뭐··· 2천 달러 먹은 걸 가지고 크게 먹었다고 하긴 뭐하지만.”

장은우의 손목을 잡아 일으킨 이시형이 말했다.

이시형은 모르겠으나 장은우에게는 정말 그랬다.

그녀에게 2천 달러, 우리 돈 250만 원 정도는 결코 아쉬운 액수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장은우는 마치 대단한 성취라도 이룬 것처럼 희희낙락이었다.

소중한 보물을 헤아리듯 칩을 세는 그녀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우리 사장님, 정신 못 차리시네. 어때요? 내 말이 맞죠? 이렇게 재미있는 게 또 없다니까.”

“그러게. 이런 세상이 있는 줄은 여태껏 몰랐네. 그런데 넌 게임 안 해?”

“오늘은 구경만··· 어차피 사장님도 지금 가진 돈 다 쓰면 그만할 거잖아요. 도박판에는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게 있어요. 옆에서 그거나 감상하죠. 뭐.”

“있잖아. 그런데 저건 룰렛 맞지?”

장은우의 손가락이 또 다른 게임을 가리켰다.

“네. 맞아요.”

“가볼까?”

“좀 쉬었다 해요.”

이시형에 만류에도 장은우는 놀이공원에 처음 온 아이처럼 그를 재촉했다.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와 달리 이제 그녀는 당당했다.

이시형을 뒤에 둔 채 장은우는 성큼 앞장서 걸었다.

“설명해줘.”

룰렛 테이블에서 몇 발짝 떨어져, 장은우는 이시형에게 게임법을 물었다.

“룰렛도 바카라처럼 간단해요. 테이블에 숫자 써진 격자 보이죠? 맨 밑에 줄은 배당금 2배. 조건은 다양해요. 빨간색과 검은색을 맞추거나, 아니면 짝수, 홀수···”

장은우는 스펀지처럼 이시형의 말을 빨아들였다.

한번 도박에 열린 머리는 무섭도록 룰을 빠르게 이해했다.

“그럼, 저기 숫자에다가 걸면?”

“숫자 2개에다 걸쳐서 배팅할 수도 있어요. 그러면 배당률 18배. 그리고 숫자 하나에다 거는 게 가장 배당률이 큰데 그건 36배예요.”

1/36!

2.7%에 불과한 아주 희박한 확률이었지만, 왠지 장은우는 그 숫자가 현실적으로 들렸다.

“그런데 사실 룰렛은 카지노 좀 다닌다는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게임이에요. 환수율이 불리하거든요.”

“아니야. 나는 직관적이어서 마음에 든다. 해보자.”

정말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것이 있는 걸까.

놀랍게도 장은우는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안정적으로 배팅 하겠다는 심산으로 배당률 2배짜리에만 칩을 걸었는데, 무려 5번을 연속으로 맞췄다.

노련한 딜러는 그녀의 행운에 당황해 완급을 열심히 조절해보았지만, 행운의 여신이 들러붙은 장은우를 막을 수 없었다.

믿기 힘든 행운에 같이 게임을 하던 사람들도 늘씬한 동양 여자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준다는 이곳에서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심지어 장은우의 배팅을 그대로 따라하는 이까지 있었다.

순식간에 장은우의 칩은 9,000달러까지 불어있었다.

이제 장은우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저 하얀 공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 어!”

뒤에 서서 장은우의 게임을 구경하던 이시형이 두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았다.

이시형은 입을 장은우의 귀 옆에 가져다 대고 작게 속삭였다.

“사장님. 잘못 배팅한 거 아니죠?”

“응? 제대로 했는데.”

이시형이 던진 갈색 칩이 룰렛 테이블 격자의 숫자 6 한 칸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거 5천 달러짜리 칩이에요. 그걸 36배에 한번에 태운다고요?”

“많이 땄잖아. 이거 잃는다고 나 안 죽어.”

“아니,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도 라스베이거스는 날 사랑하는 것 같아. 오늘은 틀림없이 나의 날이야.”

장은우는 손가락을 제 입술에 가져다 대며 이시형에게 이제 그만 입 다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눈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하얀 공을 향해 있었다.

숨 막히는 순간!

원 궤적을 그리며 빠르게 움직이던 공은 점점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르르륵━

하얀 공은 정확히 숫자 6 번호판 안으로 들어왔다.

“bravo!”

“holy shit!”

사방에서 감탄사와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꺅!”

골드 미스의 진정한 아이콘.

30대 여성들의 워너비.

그리고, 태상의 마스코트인 장은우 사장은 철없는 10대 소녀처럼 비명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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