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23화 (123/200)

123. 승냥이들의 시간

“사장님. 사진 받으셨죠? 그런데 그 젊은 친구는 등짝 밖에 안 나와서 어쩌지? 도저히 각이 나오지 않더라고요.”

“아니요. 이거면 충분합니다.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 남자가 누구예요? 난 또 무슨 젊은 제비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남자 만나는 사진이면 충분하다니···”

“궁금해하지도 마시고, 알려고도 하지 마시죠. 소개받기를 그런 업체라고 들었는데요.”

“아, 예. 아무렴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직 사장님에게 말씀드렸던 기간보다 사흘이 남았는데 계속 진행할까요?”

“아니요. 이제 괜찮습니다.”

“그럼 빠지는 요금은 어디로 보내드리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생하신 것에 대한 보너스라고 생각하시지요.”

“아이고. 통도 크십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언제든지 필요하시면 또 연락해 주세요.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흥신소 직원은 혹여라도 이 통 큰 손님이 마음을 바꿀까 얼른 전화를 끊었다.

붙박이 식탁에 딸린 의자에 앉아 황 실장은 방금 딴 캔 맥주를 홀짝였다.

그는 휴대전화로 흥신소에서 보내준 사진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황 실장은 전화기가 많았다.

타인의 명의로 만들어진 대포폰들.

지금 그의 손에 들려있는 전화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온갖 지저분한 일을 처리 할 때마다 황 실장의 전화기는 하나씩 늘어갔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뻔한 구조의 오피스텔.

여기가 황 실장의 거처였다.

당연히 그에게도 번듯한 집이야 있었다.

하지만 아내와 딸을 미국에 보내놓고 혼자남은 그에게 커다란 아파트는 너무나 적막하기만 했다.

그래서 그는 살던 집을 세를 놓고, 8평짜리 오피스텔로 이사를 나왔다.

장은수 회장의 호출이 언제일지 모르니 회사 근처에 있는 것이 편하기도 했고.

어쨌든 이 공간은 황 실장만의 훌륭한 전략본부가 되어주었다.

일전에 사람을 붙였던 것이 한영수에게 발각에 된 뒤로, 그는 굉장히 주의를 기울였다.

수고로움을 참아가며 매번 심부름 업체를 바꿀 정도였다.

그런데 이게 웬걸.

한영수의 일상에는 실수가 없었다.

단조롭게까지 느껴지는 그의 하루에서는 도저히 건질만 한 것이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큰돈이 생겼으면 어디 룸빵 같은 데라도 가서 놀고 그러지··· 흥청망청 돈지랄하면서.’

그런데, 드디어 오늘.

황 실장은 생각지도 못한 대박을 건졌다.

이건 그가 잡아내려고 했던, 벼락부자의 추문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장은호 회장··· 이런 여우 같은 곰을 봤나.’

황 실장은 두 손가락으로 사진을 밀어 확대했다.

모자로 최대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틀림없는 장은호 회장이었다.

‘자, 이걸 이제 어쩐다.’

황 실장의 머릿속은 12기통짜리 슈퍼카가 출력을 올리는 것처럼 금세 뜨거워졌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자신의 남은 인생을 결정할지도 모른다는 묘한 흥분감에 주책맞게도 아랫도리가 묵직해지기까지 했다.

비록 수세에 몰려있으나 장은호 회장이 총수 자리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 그가 한영수와 접선을 했다?

세 살배기 아기도 그 이유에 대해서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은호 회장은 태상 그룹의 모체인 건설사의 지분에서 장은수 회장에게 하염없이 밀린다.

가지고 있는 개인 지분은 기껏해야 2% 남짓.

하지만 그룹 전체로 놓고 보면 장은호는 그의 형 못지않은 몫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장학재단 이름으로 5%가 넘는 태성 건설 지분을 가지고 있는 한영수가 참전을 했겠다?

‘재미있는 그림이야. 장영복 회장님. 이 재밌는 걸 못 보고 가셔서 어떡합니까?’

물론 둘이 연합을 해봐야 여전히 링 위의 챔피언은 장은수 회장이었다.

이 강력한 챔프 앞에서 도전자들이 판을 뒤집기 위해서는 신묘한 수가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어쩌면···’

한영수.

만약 역전의 작은 가능성을 찾는다면 그건 한영수가 아닐까 생각하는 황 실장이었다.

우습지만 황 실장은 누구 못지않게 한영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원치 않아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지.

비록 떳떳하게 지켜본 것은 아니나 평범한 직장인에 불과했던 그가 신화를 써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그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다.

황 실장, 그도 한 명의 직장인이었으니까.

이 젊은 청년이 믿기지 않는 돈벼락을 맞고도 태산과 같은 부동심을 보여준 것만 해도 혀를 내두를 지경인데, 놀랍게도 자꾸만 주변에 그를 돕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걸 단순한 우연과 행운의 연속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분명한 건 저놈에게 뭔가 특별한 매력이 있다는 거야. 사람들을 혹하게 만드는.’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한영수가 아니었다.

최우선으로 계산해봐야 할 것은 바로 황 실장, 자신의 미래였다.

아주 멋진 비밀, 가치가 있는 비밀을 손에 쥐었다.

가치가 있는 것으론 흥정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귀한 것을 장은수 회장에게 바쳐봐야 돌아오는 것은 그저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뿐이겠지. 개값도 못 받는 거야.’

어차피 흥신소는 황 실장이 개인적으로 고용한 것이었다.

한영수와 장은호 회장의 만남을 숨긴다고 한들 장은수 회장이 그 사실을 알 도리가 없을 것이다.

‘다리라는 건 많이 걸쳐놓을수록 안전한 법이지.’

황 실장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는 휴대전화에서 자기 개인 노트북으로 배다른 형제의 만남이 담겨있는 사진을 옮겼다.

마우스 포인터에 찍힌 사진은 잠시 두 폴더 사이에서 갈 곳을 정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장은수’ 그리고 ‘한영수’라는 이름의 폴더 사이에서.

그리고 마침내 사진은 장은수 속으로 자리를 잡았다.

***

“회장님. 에메랄드 시티 관련 추가 정보입니다. 다음 달 말경 카타르 현지에서 프레젠테이션이 있을 예정입니다. 사업의 총책임자도 확인했습니다. 저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왕세자인 자심 빈 하미드가 맡을 것이 유력하다고 합니다.”

태상 건설의 경영지원 본부장은 장은수 회장에게 이 소식을 전해주게 되어 너무 기쁘다는 듯 두 손을 꼭 모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게 무슨 일인가.

장은수 회장의 반응은 그저 덤덤할 뿐이었다.

“본부장님이 헛물켰네요. 왕세자는 아닙니다.”

“··· 예?”

에메랄드 시티는 자신의 보스의 최대 관심사.

당연히 손뼉을 치며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던 본부장으로서는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왕세자가 총책임자를 맡지 않을 거라고요. 국왕의 둘째 아들인 아메드 빈 알리가 맡을 겁니다.”

본부장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멀겋게 눈을 뜨고 장은수를 바라보았다.

장은수는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작게 좌우로 젖더니 휴대전화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압둘라만 장관과 직접 통화했습니다.”

“··· 아.”

그제야 본부장은 알겠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압둘라만은 카타르 에너지국의 장관이자 국영 에너지 기업의 CEO.

왕족 가문은 아니었지만, 카타르 내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유력인사였다.

장영복 회장 생전 LNG선 수주 관련하여 태상과 인연을 맺었고, 당시 50억 달러 규모의 수주에 장은수 회장이 큰 역할을 했었다.

장영복 회장도 그 공을 높이 사, 태상 건설의 회장 자리를 마침내 큰아들에게 물려주었다.

본부장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회장은 잔뜩 들떠서 신이나 떠든 자신을 얼마나 바보로 볼 것인가.

참모로서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민망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앞으로도 새 소식 있으면 바로 알려주세요.”

본부장은 황망함을 감추지 못한 채 회장실을 나갔고, 그가 자리를 뜨자 장은수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치기 시작했다.

‘여기나 저기나 자리싸움한다고 지랄들이군.’

그때 갑자기 장은수의 머릿속에 어떤 얼굴이 스쳐갔다.

그 얼굴이 떠올랐다는 사실에 분개한 그는 손가락이 아닌 주먹으로 집무 책상을 쾅 내려쳤다.

한영수.

장은호도 아니고 한영수라니.

그 불쾌함을 도저히 몸으로 표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장은수였다.

황 실장은 최근 한영수의 행보에 대해 특이사항이 없다고 보고했다.

그저 BH 인베스트먼트와 고왕 건설을 오갈 뿐이라고 했다.

한영수에 대해 말할 때 황 실장의 눈동자는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보고할 게 없다라··· 황 실장도 너무 오래 써먹었지.’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한영수도, 황 실장도 아니다.

장은수는 눈을 감고 머릿 속에서 쓸데없는 생각을 몰아내려 노력했다.

이런 거대한 프로젝트를 왕세자가 아닌 차남이 맡는다는 것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 일의 성패에 따라 차기 카타르의 국왕이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가 알고 있는 정보는 하나 더 있었다.

바로 국왕의 차남인 아메드 빈 알리가 올 상반기 중으로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라는 것.

여러 라인으로 교차 검증을 해보니 무려 대통령과 간담회가 있을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건 장은수의 예상이지만 틀림없이 국내 기업인과의 만남의 시간도 있으리라.

‘5대 기업 총수들 정도겠지?’

장은수는 그 자리에서 28살 먹은 왕자를 구워삶을 계획이었다.

확실히 눈도장을 받아 중동의 돈 잔치에서 큰 몫을 챙겨가리라.

미국과 유럽, 혹은 일본의 건설사까지는 어쩔 수 없더라고 국내의 다른 기업에는 조금의 파이도 양보할 생각이 없는 그였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장은수는 휴대전화를 들었다.

다이얼 버튼을 누르자 액정에는 장은우의 이름이 떴다.

“··· 여보세요.”

전화 연결음이 아주 오랫동안 울리고 나서야 장은우는 오빠의 전화를 받았다.

“나야.”

“오빠. 지금이 몇 시인 줄 알아?”

“지금? 오후 여섯 시.”

“아니! 여기 시간 말이야. 여긴 지금 새벽 한 시라고. 우리가 이 시간에 통화할 정도로 사이좋은 남매였나?”

쏴붙이는 장은우의 말이 재밌어 장은수는 잠시 끌끌 대며 웃었다.

“환락으로 가득한 밤이 없는 도시는 좀 어때? 우리 장 사장의 취향에 좀 맞는가?”

“화려해. ··· 그리고 천박하고.”

장은우는 지금 라스베이거스에 있었다.

그곳에서는 한 명품 브랜드의 S/S 성대한 런칭쇼가 있었고 그녀는 VIP 자격으로 초대를 받았다.

“이왕 간 김에 여기 일은 모두 잊고 실컷 놀다가 오라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하나도 안 와닿으니까. 용건이 뭔데? 빨리 말해.”

“왜, 옆에 누구라도 있는 모양이지?”

장은수는 잠시 전화기에서 귀를 떼었다.

장은우가 비명과도 같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질렀기 때문이었다.

“그래. 너 미치는 꼴 보면 안 되지. 짧게 말할게. 지금 런칭쇼 말이야. 수석 디자이너랑 자랑스러운 내 동생이 아주 각별한 사이라지?”

“칼 마티유.”

장은우는 똑 부러지는 발음으로 디자이너의 이름을 말했다.

장은수는 동생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썩소를 지었다.

‘그래. 네가 내 앞에서 내세울 거라곤 고작 그런 것뿐이지. 은우야. 셰익스피어인 척하지만 네가 쓰고 있는 건 세상 물정 모르는 여고생의 일기장이야. 왜 그걸 모를까?’

“그래. 그 백발의 멋쟁이 노인네 말이야. 아무튼 네 인맥이라면 거기서 아주 특별한 물건들도 구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그래서?”

“뭐가 좋을까··· 가방으로 하자. 제대로 된 가방 하나만 구해서 한국 들어와. 비용이 얼마가 들든 내가 지불할테니까.”

“오빠.”

장은우는 목소리를 높여 깔깔 웃었다.

“오빠는 역시 천상 장사꾼이다. 돈이면 다 될 것 같지? 세상에는 돈으로는 절대 구할 수 없는 것들이 있거든. 물건이라고? 난 작품이라고 불러.”

“그래! 작품! 난 정확히 그런 걸 원해.”

슬쩍 속을 긁어보았음에도 장은수가 반색하며 기뻐하자, 오히려 당황스러운 건 장은우 쪽이었다.

장은수의 이런 반응은 절대 흔치 않은 일이었다.

“··· 뭔데, 누구한테 선물이라도 하려고?”

“조만간 아주 훌륭한 비즈니스 파트너를 만날 것 같거든. 돈이 썩어날 정도로 많은 작자니 네 말처럼 돈으로 절대 구할 수 없는 걸 선물하고 싶어.”

“맨입으로?”

“뭘 원하는데.”

“··· 나 한국 들어가면 컨템포러리 브랜드 하나 본점에 오픈할 거야. 그런데 여기 와서 런칭쇼 보니 나도 막 영감이 솟네. 시저 홀 쓰게 해줘. 대한민국에서 유례가 없었던 쇼를 해보려고 하니까.”

‘아버지가 들었으면 네 따귀를 한 대 갈겼을 거다.’

“그래. 오빠가 되어서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지. 알겠다.”

장은수는 목소리 하나 변하지 않고 속마음과 다른 말을 뱉었다.

고명딸 장은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