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22화 (122/200)

122. 저는 그러면 안됩니까?

“어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이.

낡은 모자를 푹 눌러쓴 그는 펑퍼짐한 편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 옷들조차 곰처럼 커다란 남자의 체구를 가려주지 못했다.

“··· 은호 형님.”

그랬다.

남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장은호 회장이었다.

여의나루역 아래 한강 공원.

장은호는 이곳에서 나와 만나고 싶다며 연락을 취해왔다.

모름지기 사람은 변해도 계절은 변함이 없는 법이다.

여지없이 봄은 돌아왔다.

뉴스에서는 다음 주면 벚꽃이 만개할 것이라며 꽃소식을 알렸다.

지금 시간은 저녁 8시.

해야 진작에 서쪽으로 넘어갔지만, 날이 따듯하다.

이곳 한강 공원에는 그 봄의 기운에 이끌려 나온 많은 사람들이 산책로를 걷거나, 텐트 혹은 돗자리를 깔고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체격 좋은 사내 둘의 회합이 누구나 이름만 대면 아는 기업의 회장들의 만남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할 것이다.

할리 데이비슨 로고가 박혀있는 색 바랜 모자 아래로 장은호는 환하게 웃었다.

“이게 누구야. 여의도를 뜨겁게 만들고 있는 이슈의 주인공 아니신가.”

장은호는 두껍고 커다란 손으로 내 어깨를 잡았다.

그의 손에서 강한 힘과 온기가 느껴졌다.

“형님. 혹시 남들 눈 피하겠다고 그렇게 입으신 건가요?”

“뭐, 그렇지. 그런데 좀 오바 했나 싶어. 왜? 너무 추레해서 창피하냐?”

“그렇게 남들 눈 조심할 거면 왜 하필 여기인가요? 조용한 장소도 많을 텐데.”

“너랑 내가 무슨 음모를 꾸밀 것도 아닌데 뭐. 그리고 말이야···”

장은호는 내 어깨에 놓여 있던 손을 들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 끝은 이곳의 랜드마크라고 해도 좋을 커다란 편의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번에 어떤 유튜브 채널을 보는데 저기서 라면 사서 먹더라. 정말 먹어보고 싶었거든.”

그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소탈한 이유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한강 공원의 라면이 땡겼다는 것이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 곰 같은 사나이는 잰걸음으로 편의점을 향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설마하니 그가 라면 하나 먹자고 날 여기까지 불러냈을리가.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장은호가 나에게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는 나에게 있어 세상에서 유일한, 혈육의 정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형님. 저는 괜찮아요.”

편의점에 들어서서 당연하다는 듯이 라면 2개를 집는 장은호를 보며 내가 말했다.

“왜? 여기까지 와서 이걸 안 먹어? 내가 사줄게.”

“형님이 그 정도의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지만, 저 라면 원래 잘 안 먹어요.”

“뭐야. 운동하는 녀석이라 이거냐?”

“아니요.”

나는 부정의 뜻으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대학 다닐 때 삼시 세끼를 거의 라면으로 때우다시피 했거든요. 그때 완전히 물려버렸어요.”

장은호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온전히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눈에 슬픔, 또는 미안함 같은 감정이 깃드는 것 같았다.

“알았다. 그럼 다른 거라도 집어.”

“괜찮아요. 한강 공원에서 만나자기에 뭘 먹을 줄은 몰랐죠. 저녁 먹고 나왔습니다.”

“어허! 민망하게 나 혼자 먹으라고? 그러지 말고 빨리 하나 골라봐.”

“알겠어요. 그럼···”

나는 즉석식품 매대에서 훈제 닭가슴살을 하나 집어 들었다.

“전 이거면 괜찮아요.”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장은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

후루룩━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라면 용기를 품에 안고 나온 장은호.

야외에 설치해둔 간이 테이블에 앉기 무섭게 그는 며칠이라도 굶은 사람처럼 라면을 먹었다.

아주 쉬운 문제 하나.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라면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건 바로 남이 먹는 라면이라고 한다.

세상의 진미라는 진미는 모두 맛보았을 장은호가 진공청소기처럼 면발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라면 광고를 한편 찍어도 될 것 같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침을 흘리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아니, 실제로 나는 침을 꿀꺽 넘어갔다.

닭가슴살을 쥔 손이 살짝 떨렸던 것도 같다.

“어흐, 국물이 진짜 기가 막히네. 날도 선선하니까 더 죽여준다.”

추임새까지 넣어가며 라면 국물을 들이켠 장은호.

그는 반쯤 베어 문 닭가슴살을 쥐고 있는 나를 가련하다는 듯, 한번 흘낏 보고선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었다.

“먹고 싶지? 자식··· 자, 너도 한 젓가락 해.”

장은호는 내 쪽으로 라면 용기를 쓱 밀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왜, 내가 먹던 거라서 좀 그래? 뭐 어떠냐. 형제끼리.”

혈육의 정에 목말랐던 건 그도 마찬가지일까?

유독 ‘형제끼리’라는 말에 장은호는 강조를 두었다.

“나와서 먹어서 그런가, 기가 막힌다니까. 형 말 믿고 한번 먹어봐.”

과거까지 들먹이며 안 먹겠다고 손사래까지 쳤었다.

무슨 염치인가 싶었지만, 내 손은 머리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 그러면 딱 한 젓가락만.”

아.

미미(美味)!

면발이 입에 들어가는 순간 이 형님이 왜 이리 유난을 떠나 알 것 같았다.

특별한 것 없는 라면임에도 장은호의 말처럼 밖에서 나와 먹는 탓인지 정말 맛이 기가 막혔다.

나 같은 헬창을 아주 쉽게 타락시켜버리는 완벽한 배덕의 맛.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기까지 와서 퍽퍽한 닭가슴살을 씹고 있는지 내 머리통을 한대 깡! 내려치고 싶었다.

“··· 형님. 잠깐만 기다리세요. 나도 하나 끓여서 올 테니.”

뜨끈한 국물이 속을 데우자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사이좋게 라면을 해치운 우리는 잠시동안 말없이 공원의 분위기를 즐겼다.

장은호는 얼굴에 미소를 띈 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고,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만약 우리가 평범한 형제였다면, 제법 우애 좋은 사이였겠지.

가끔 이렇게 함께 바람도 쐬러 나오고, 소주도 같이 한잔하고 말이야.

친구에게도 말 못 할 마음속의 고민도 털어놓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재벌 중의 하나이자,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는 자동차 그룹의 오너.

그리고, 고작 라면 한 그릇에 행복해하는 이 남자에게 진정한 형제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형님. 저 윤아랑 만나기로 했어요.”

분위기에 휩쓸렸을까.

나도 모르게 사적인 이야기를 털어놓고 말았다.

“윤아?”

장은호는 눈이 동그래져 나에게 반문을 했다.

아마도 그에게는 윤아라는 이름보다 고 변호사라는 호칭이 더 익숙하겠지.

“고윤아 변호사 말이에요.”

“하하하! 역시 그렇게 되었구나. 축하한다. 나랑 와이프가 내기를 했었어. 사귀는 건 당연하고, 그 시기가 언제쯤일지. 내가 이겼네.”

장은호는 박장대소하며 손뼉까지 쳤다.

“잘했다. 고 변, 정말 멋진 여자지. 예쁘고, 똑똑하고, 심지까지도 단단하고. 틀림없이 너에게 큰 힘이 되어줄 거야. 그런데 너··· 그것만 사고를 친 게 아니더구나.”

그 사고가 뭘 말하는 것인지 나는 빠르게 눈치를 챘다.

“태상 그룹, 아니지요. 형님의 태상 자동차와도 비교가 안 되는 작은 회사입니다.”

엄살 아닌 엄살을 부리자 장은호는 검지 손가락을 펴고 그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작기는! 고왕 그룹이 절대 그런 구멍가게 취급받을 곳은 아니지. 그건 그렇고 나한테서 받아 간 명단을 아주 유용하게 썼더군. 도대체 어디에 쓰려나 했는데, 너는 계획이 다 있었구나.”

“시기가 좋았지요. 때마침 태상 건설에서 훌륭한 인재들을 많이도 내보내셨으니까요. 이건 장은수 회장님께 감사 인사라도 하고 싶습니다.”

“녀석··· 말은··· 정말 훌륭한 수였어. 태상에서 쫓겨난 선배들에게는 정말 어려울 때 네가 동아줄을 내려준 셈이지. 당연히 그들은 너에게 충성을 다 할 테고. 그 덕에 초짜인 네가 고왕 건설에서 고립되는 일도 없을 것이고.”

“그렇게까지 노림수가 깊었던 건 아닙니다. 다만 일할 사람들이 필요했고, 이미 장영복 회장님께서 직접 검증한 사람들이라면 저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죠.”

“...”

장은호는 손을 올려 모자를 고쳐 썼다.

“너,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 아니였냐?”

“··· 그건 개인적인 사감입니다. 이 판에 들어온 이상 경영의 신에게 배울 게 있다면 당연히 배워야죠.”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던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굵은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형이 너에 대해서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오늘 보자고 한 건 조심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서였어.”

형이라고 함은 당연히 장은수 회장을 말하는 것.

“놀랍네요. 제가 벌써 그 정도가 된 겁니까?”

농담처럼 웃으면서 말했지만, 장은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왜 하필 고왕 건설이었지? 고왕 건설은 태상 건설의 경쟁사 중에 하나야. 일전에 고 변이 로펌에서 쫓겨난 일로 네가 화를 냈었지. 설마하니 그 이유 때문인가? 형과 정면으로 싸워보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윤아 때는 확실히 화가 났었죠. 힘이 있다고 해서 남의 인생을 그렇게 함부로 흔들다니···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이유 하나만으로 기업을 인수하지는 않을 겁니다. 살아날 수 있는 기업이었고 저에겐 살릴 수 있는 돈이 있었을 뿐입니다.”

“형은 제왕병에 걸렸다고 해도 좋을 정도야. 누군가와 무얼 나누는 걸 아주 싫어하지. 심지어 아버지와도 대립각을 세웠을 정도니까. 그런 형이라면 경쟁사에는 말할 것도 없겠지. 특히나··· 아니야. 미안하다. 이런 생각은 옳지 않은데.”

장은호는 주저하며 말을 아꼈다.

물론 그 끊긴 말속에 무엇이 있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이었다.

어쨌든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형제 대신 내 손을 잡아주고 있는 장은호였으니까.

설령 그것이 본인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을지라도 말이다.

“··· 그런데 저는 그러면 안됩니까?”

장은호는 입을 일자로 굳게 닫은 채 아무 대답이 없었다.

“형님께서 제가 장영복 회장님을 많이 닮았다고 하셨었죠? 예.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이제 큰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태어난 이유를 세상에 확실히 증명할 겁니다.”

“형은 비정한 남자야. 그리고 윤일중 회장처럼 허술하지도 않고. 어쩌면 네가 가진 모든 걸 빼앗을 수도 있어.”

“형님도, 장은수 회장도 태어났을 때부터 손에 많은 것이 쥐어져 있었겠지요.”

“··· 부정하진 않겠다.”

“저는 빈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하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 숨지 않겠습니다.”

나는 뜨거운 목소리를 뱉어냈다.

장은호는 옅은 한숨과 함께 눈을 지그시 감았다.

***

찰칵━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옷으로 무장한 남자가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커다란 대포 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을 볼 때, 남자는 사진 촬영에 꽤 전문적인 솜씨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카메라의 뷰파인더가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언 듯 한강의 야경을 찍는 것처럼 보였지만, 남자가 찍고자 하는 피사체는 처음부터 명확했다.

“··· 잘 나왔네.”

카메라의 후면 LCD 화면에는 막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한영수와 장은호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승냥이들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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