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파도가 밀려온다
고왕 건설의 사옥은 21층짜리 건물로 되어 있다.
원래 서울 강동구에 있던 구 사옥을 매각하고 종로구로 본사를 옮긴 것이 2012년이다.
고왕 건설에서 직접 건물을 시공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 회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기술을 집약한 고왕 그룹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건물의 꼭대기에는 회장실이 있다.
나는 지금 그 회장실의 통유리 앞에 서서 서울 도심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랑자대(夜郞自大)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변방의 약소국이 자신을 강대국으로 여긴다는 뜻으로 제 분수도 모르고 위세를 부리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만큼 옛사람들도 자만을 멀리하라 경고한 것이지만 이 자리에 서니 조물주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야말로 유치한 감상.
이 은밀한 오만을 누군가에게 들킬까 싶어 나는 몸을 돌렸다.
회장실은 뻐기기를 좋아하던 윤일중 회장의 취향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최고급 원목을 소재로 쓴 가구들이 고급스러운 빛깔을 반사해내고 있었고, 정중앙에는 구름 위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을 들게 만드는 소파들이 놓여 있었다.
모든 가구는 이탈리아 명품 가구 브랜드인 까시나의 것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똑같은 브랜드에서 나온 집무용 책상과 2백만 원을 훌쩍 넘는 허먼밀러 의자까지.
이 회장실의 주인이 되었을 때 이곳이 지나치게 호사스러운 것 아닌가 잠깐 고민을 했지만, 굳이 방을 갈아엎는 수고를 감수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여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삐━ 삐━
평범한 직장인이던 시절, 내 두 달 치 월급에 가까운 값을 하는 책상 위에 올려진 전화기가 벨을 토해내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예. 전화 받았습니다.”
“회장님. 비서실입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BH 인베스트먼트에서 오셨죠?”
“네. 맞습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전화가 끊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장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올림머리를 한 비서실의 직원은 두 손을 배꼽 근처에 대고 내게 인사를 했고, 그녀의 뒤에는 앨런 오닐이 서 있었다.
“앨런. 들어와요.”
“Hello, Chairman.”
앨런은 웃으며 회장실 안으로 들어왔고, 비서실 직원은 뒷걸음질로 물러나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전에도 와 봤지만, 여전히 훌륭한 공간이군요.”
“주인만 바뀌었지 제가 따로 손댄 것은 없습니다.”
머신에서 커피를 내리며 앨런에게 말했다.
비서실에는 누가 오든 알아서 준비할 테니 차를 내올 필요가 없다고 지시를 내렸었다.
사실 그들을 위한 배려라기보다는 누군가가 대화 중에 들어와 맥이 끊기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윤 회장이 비서들에게 어떻게 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사소한 일거리를 하나 줄여준 것만으로도 비서실에서는 나를 깨어있는 경영자로 직원들에게 홍보해주는 모양이었다.
“주인이 달라졌으면 제일 중요한 게 바뀐 게 맞습니다. 이야, BH 사옥의 대표이사실은 삭막할 정도로 사무적인데, 이런 공간도 미스터 한에게는 잘 어울리는군요. 마치 젊은 귀족 같습니다.”
“지금 혼자만 좋은데 있는다고 항의라도 하러 오신 겁니까.”
나는 농담과 함께 앨런 앞으로 커피를 내려놓았다.
좋은 원두의 향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럴 리가요. 요즘 보스의 얼굴을 통 볼 수 없지 않습니까. 우리를 버렸나 싶어서 직접 왔습니다.”
“아무래도 이쪽이 아직 어수선하니까요. BH야 프로들의 집합체인데 저야 돈 대는 것 말고 할 게 있나요.”
앨런은 안경을 쓱 올려썼다.
“그렇지 않아도 미스터 한의 은총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 때문에 요즘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은총이요?”
“Money. There are people who desperately want your money.”
내 돈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라···
“무슨 일입니까?”
“사방에서 채권단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공적으로 고왕 그룹을 인수하는 것을 모두가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자기들도 수렁에서 좀 건져달라는 거지요.”
“··· 기업을 사달라는 거군요. 몇 군데서나 연락이 왔습니까?”
“건설 쪽이 3곳, 소형가전제품 제조업체 1곳, 또 식품 제조업체도 있었네요. 지금도 계속 여러 곳에서 연락이 계속 오고 있고요.”
상어가 피 냄새를 맡듯, 돈 냄새를 맡고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구나.
갑자기 내가 세상의 중심으로 불쑥 발을 들이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아까 창밖을 내다보며 젖었던 감상과 달리 무조건 경계해야만 하는 종류의 위험신호였다.
나는 언제라도 깨질 수 있는 얼음장 위를 걷는 기분으로 앨런에게 말했다.
“그 회사들 리스트 전부 바로 좀 저에게 보내주세요. 검토해보겠습니다.”
내 말에 즉답하지 않고 앨런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왜 그러세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미스터 한. 혹시 제갈공명이 왜 죽었는지 아십니까?”
뜬금없이?
나와 피부색만 같을 뿐이지, 정신은 외국인과 다를 게 없는 그에게서 삼국지 이야기가 나오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지금 상황에.
“앨런의 입에서 제갈공명이라는 인명이 나오다니··· 이거 뭔가 좀 어색하네요.”
“오! 제가 동아시아 쪽에서 아주 오랫동안 일을 했었다는 걸 잊으셨나 봅니다. 어떤 곳에서 돈을 벌려면 그곳의 문화부터 알아야지요.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제가 아주 좋아하는 고전입니다.”
“그래서, 제갈공명이 왜 죽었습니까?”
앨런이 가진 장점 중 하나는 필요에 따라 분위기의 완급을 조절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숫자들의 전쟁터를 수없이 넘나들며 쌓인 경험에서 나오는 여유가 아닐까?
나는 앨런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왜 위대한 전략가가 오장원에서 별이 되었는지, 나는 앉은 자세를 고치고 앨런에게 물었다.
“제갈공명은 황제를 대신해 모든 국정을 혼자 처리했다고 합니다.”
“그랬죠. 유선은 무능한 황제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니까. 그에 비해서 제갈공명은 너무나 유능한 사람이었구요.”
“맞습니다. 심지어 잘못을 저지른 병사에게 매를 치는 사건조차 친히 심문할 정도였다고 하니까요. 잠은 적게 자고 일은 많이 했으니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과로와 스트레스가 그 위인을 죽였다고 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어떠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이는 앨런.
나는 고개를 숙이고 쿡쿡 웃었다.
앨런이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맹추는 아니다.
“감히 제갈공명과 저를 비교해주시다니 이런 영광이 없네요. 하지만 저는 스트레스도 없고 잠도 잘 자고 있어요.”
“모든 일을 혼자서 책임지고 결정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람을 쓰세요. 보고를 받으세요. 미스터 한은 이제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하는 위치입니다.”
앨런의 표정은 자기 말을 허투루 듣지 말라는 듯 사뭇 진지했다.
“그래요. 일찍 죽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 앨런의 말을 들어야겠네요. 그럼 보고해주세요. 간략하게.”
“예. 알겠습니다.”
이제야 말이 통한다는 듯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여태껏 BH 인베스트먼트에 접촉해온 자들은 모조리 다 깡통입니다. 눈 씻고 찾아봐도 구미가 당기는 것이 없더군요. 하나같이 부채비율은 200%를 넘어가고···”
앨런은 양 눈썹을 좁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채권단 쪽에서도 우리가 혹할만한 조건을 내걸었을 텐데요?”
“뭐, 입을 모아 부채비율을 조정하겠다고는 말하긴 하는데··· 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양가는 하나도 없습니다. 살릴 가치가 없어요.”
앨런의 말투는 단호했다.
이 정도까지 딱 잘라서 말한다는 건 더 언급할 가치도 없다는 뜻.
“알겠습니다. 그래도 진흙 속에서도 연꽃은 피는 법이니까요. 수고스럽더라도 체크는 다 해주세요.”
“예. 단기적인 자본 변통이 문제인 흑자도산 업체 위주로 리스트를 정리해 놓겠습니다. 쓸만한 거는 그런데서 나오는 법이네요. 혹시 미스터 한이 눈여겨보는 업종이라도?”
“한번 고민해보겠습니다. 자율 주행이나 AI 업계에 관심이 가긴 하는데 과연 입맛에 맞는 회사가 국내에 있을지··· 아, 그건 그렇고 저번에 최화란 이사랑은 한잔했어요?”
큼━
앨런은 커피를 마시다가 사례라도 걸린 듯 콜록대었다.
“예··· 뭐. 말재주가 참 좋은 사람이더군요. 제 손의 흉터를 보고 꽃이 핀 거 같다고 말하더군요. 이걸 그렇게 봐주는 사람은 또 처음이었습니다. 자기 이름에도 한자로 꽃 화자가 들어간다며···”
그날 틀림없이 무슨 일이 있었겠구만.
뻔하게 예상할 수 있는 성인 남녀의 술자리를 떠올리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조심하세요. 최 이사, 정말 무서운 사람이거든요?”
“아무튼···”
앨런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오늘 제가 해야 할 정말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앨런은 새어나가면 큰일이 나는, 내밀한 이야기라도 할 듯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최화란에 대해 떠들면서 잠시 풀어졌던 분위기의 텐션이 다시 올라왔다.
중요한 이야기?
나 역시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앨런의 입을 바라보았다.
“··· 에메랄드 시티.”
과연 앨런의 입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에메랄드 시티요···? 뭐 좀 건진 게 있습니까? 이쪽에서도 모든 촉각을 세우고 있어요. 아직 그렇다 할만한 이야기가 없는데.”
사실이었다.
중동 전담팀을 꾸리고 이종현 사장을 비롯한 중동통들을 풀어 무언가라도 건져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손에 걸리는 것은 바람처럼 실체가 무성한 소문뿐이었다.
“저도 밥값은 해야지요. 고용주가 가려운 곳을 긁어드리는 게 고용인으로서 책무가 아니겠습니까. 월가 쪽 라인을 통해서 입수했습니다.”
“그래서요?”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져 말이 빨라졌다.
“사실 월가의 경제 전문가들은 에메랄드 시티에 대해서 반신반의하고 있던 입장이었습니다. 뭐랄까, 지나치게 공상적이랄까요? 그런데 다음 달 중에 카타르 현지에서 에메랄드 시티 프로젝트의 발표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모두의 불신을 깨버릴 보증 수표가 참석할 예정입니다. 바로 카타르의 국왕 셰이크 알리 빈 모하메드 입니다.”
카타르의 국왕!
유럽 최고의 명문 구단 중 하나인 AS 파리의 구단주이자 개인재산만 한화로 1,000조 이상의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세계적인 갑부.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부자들의 재산을 모두 합친다고 하더라도 그의 재산에는 어림도 없다.
“심지어 이 프로젝트의 진두지휘를 왕세자가 직접 할 거라는 확실한 소스도 있었습니다. 예. 카타르가 가진 부에다 정치적인 의미까지 모두 고려하면 에메랄드 시티는 더 이상 누군가의 소설이 아니라는 겁니다.”
“시기가 묘하군요. 이제 막 고왕 건설을 인수했는데···”
“왜 그러십니까. 미스터 한, 설마 겁이라도 나는 겁니까.”
앨런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크게 저었다.
“그럴 리가요.”
“그럼요. 내가 아는 미스터 한이라면 절대 그럴 리가 없죠. 벌써부터 움츠러들면 안됩니다. 천문학적인 돈의 파티가 시작될 겁니다. 그 파티에 초대장만 받아도 잭폿이 터지는 거고요. 중동은 전통적으로 한국의 건설사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왕 건설도 반드시 호기를 잡아야 합니다.”
쿵, 쿵···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감기라도 걸린 듯 달뜬 열기로 체온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저 멀리서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큰 파도가.
그 파도는 미리 대비한다면 날 해안가까지 무사히 밀어줄 것이며, 손을 놓고 있는다면 검고 깊은 바닷속으로 나를 집어삼키리라.
"앨런. 지금 한 이야기. 남들보다 빠른 정보가 맞죠?"
"어차피 에메랄드 시티에 대한 썰이야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지 않습니까. 하지만 조금의 디테일이 포함되어 있다는 걸 생각하면 빠른 게 맞습니다."
“국내외를 따지지 말고 에메랄드 프로젝트의 수혜를 입을 종목들만 따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주세요. 건실한 놈들로만요.”
“Yes. sir.”
두말하면 잔소리라는 듯 앨런이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저는 그러면 안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