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20화 (120/200)

120. 인생사 새옹지마

“오 대리. 나 이거 결재 못 해줘. 가져가.”

“예? 팀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수정했는데요···”

“이 사람아. 이거 봐봐.”

여기는 고왕 건설 건축사업본부 그룹사업 3팀.

티몬과 품바, 김영남 차장과 오준호 대리가 속한 이 팀의 팀장은 인상을 잔뜩 쓴 채 책상 위에 기안 서류를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졌다.

기안의 작성자인 ‘티몬’ 오준호 대리는 그의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이거 봐, 이거.”

팀장은 서류를 펼쳐 문구 하나를 가리켜 망치로 못을 박듯 손가락으로 찍어대었다.

그 문구에는 빨간색 펜으로 두 줄이 좍좍 그어져 있었다.

‘호영빌딩 7층 회의실’

MOU 체결을 위한 모임 장소를 적어놓은 문구였는데 일견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오준호 대리는 자기가 장소를 착각하는 실수라도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비밀은 금방 풀렸다.

“아니, 대리씩이나 되어서 기안문 작성 하나 제대로 못 하는 거야? 빌딩 7층이 전부 회의실이야? 통으로 쓰고 있냐고.”

“··· 아닙니다. 701호가 회의실인데···”

“그러니까 말이야! 왜 호수는 누락을 하냔 말이야. 그리고, 오 대리 내일 반차 올렸던데? 뭐 중요한 일이라도 있는 거야?”

“그게, 오후에 개인적으로 볼 일이···”

팀장은 됐다는 듯 오 대리를 향해 손을 휘휘 내저었다.

“회사가 난리가 났는데 개인적인 볼 일은··· 알겠으니까 가봐. 뭔 소리만 하면 갑질이라고 난리들을 치니 내가 그냥 입을 다물어야지.”

결재판을 들고 터덜터덜 제 자리로 돌아온 오준호 대리.

그는 앉기가 무섭게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오 대리의 옆자리인 ‘품바’ 김영남 차장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팀장은 요즘 예민함이 최고조에 이르러 있었다.

모(某) 상무의 직속 라인이었던 그는 자신의 든든한 빽이 최근 있었던 인사 개편으로 날아가 버리자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열심히 정치질하더니··· 옛말도 틀릴 때가 있네. 공든 탑도 때로는 무너지는구만.’

김 차장은 속으로 혀를 찼다.

가뜩이나 심사가 꼬일 대로 꼬인 팀장이 요즘 들어 유독 오 대리를 집중 타겟으로 잡고 갈구는 것에는 사실 이유가 있었다.

회사의 주인이 바뀌고 얼마 후의 일이었다.

팀장은 김 차장에게 밥이나 한번 먹자며 독대의 자리를 만들었다.

“형님. 동생 밑에서 고생 많으십니다. 그동안 저에게 섭섭한 거 많았죠?”

술잔에 소주를 따라주며 팀장은 김 차장을 ‘형님’이라고 호칭했다.

김 차장이 팀장으로부터 형님 소리를 들어보는 것은 거의 십 년만의 일이었다.

“공과 사는 당연히 구분해야지요. 섭섭한 거 없어요.”

“우리 회사에서 형님만큼 유능한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 형님이 융통성만 좀 있었어도 진작에 승진 했을텐데···”

사실 팀장은 김 차장의 입사 후배였다.

김 차장과는 다르게 일보다는 인간관계에 온 정력을 쏟은 팀장은 그 노력의 대가로 빠른 승진을 할 수 있었다.

뭐, 조직 생활에 그런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랴.

다만 그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의아함을 품으며 김 차장은 소주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마침내 팀장은 본심을 드러냈다.

“형님··· 예전에 형님이 해외 사업 기안 냈던 것들 있지요.”

“예. 팀장님이 시기가 좋지 않다고 반려하셨었죠.”

“그게 어디 제가 그런 건가요. 저도 위에 눈치 보는 거지.”

“그래서요?”

“그 아이템들 다시 한번 보여주세요. 위에 잘 보고할 테니까··· 형님도 올해는 꼭 부장 달아야죠.”

김영남 차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한영수 회장은 해외시장 진출 활성화가 제1의 목표라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조만간 그 의지를 실행으로 옮기기 위해 새로운 부서가 꾸려질 것이라는 소문이 회사안에 파다했다.

팀장은 그런 분위기를 눈치 빠르게 읽고 제 손으로 죽여버린 김 차장의 자식들을 다시 살려내라는 것이었다.

손 안 대고 코 풀려는 팀장의 검은 속이 빤히 보이는 김 차장이었다.

“그땐 그렇게 면박을 놓더니 이제 와서 다시 올리라니요.”

“그건 제가 사과 합니다. 형님 오늘 서운한 거 있었으면 다 풀고 같이 잘해보십니다. 예전처럼요.”

“... 예전처럼.”

김 차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너와 나 사이에 무슨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고 예전이냐.’

“경모야.”

김 차장은 팀장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

팀장은 대답이 없었다.

형님, 형님 하며 너스레를 떨던 게 언제냐는 듯 정작 김 차장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불쾌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예전하니까 생각이 난다. 내가 삼 개월 동안 집에도 못 가면서 준비했던 거. 네가 쓱싹했었지. 그땐 그냥 내가 멍청해서 뒤통수 맞았다고 생각하고 말았어. 그런데 이젠 대놓고 똑같은 짓을 하려고 그러네. 날 너무 호구 취급하는 거 아니냐?”

“...”

“나 날리겠다고 구조조정 명단 받을 때 제일 위에 이름 올렸다며. 듣기 싫어서 귀를 틀어막아도 그런 소리가 들려오더라. 왜 그렇게까지 나를 미워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그냥 일만 하자.”

소주를 한잔 자작하고 김 차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팀장님.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계산은 제가 하겠습니다.”

그날 이후부터였다.

팀장이 오 대리에게 온갖 트집을 잡기 시작한 것은.

이유는 단 하나.

오 대리가 김 차장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저러다 오 대리가 팀장의 멱살이라도 잡아버리면 어쩌나.

그 모습을 안 보기 위해서라도 김 차장은 오 대리에게 슬쩍 아이템 몇 개를 넘겨줄 생각이었다.

팀장이 그토록 원하는 그것을.

‘그나저나 언제쯤 뒤숭숭한 분위기가 좀 가라앉을까.’

윤일중 회장 시절 기획되었던 구조조정을 신임 회장이 전면 백지화 시키면서 많은 직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여전히 회사 내 분위기는 살얼음 장을 걷는 것 같았다.

한영수 회장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으니 온갖 소문들이 돌았다.

누군가는 자신 있게 회장이 돈 많은 집의 자식으로 미국 유학파라고 말했으며, 다른 누군가는 부동산 투기로 떼 돈을 번 젊은 자산가가 틀림없다고 떠들었다.

그중 가장 걸작이었던 건 회장의 잘생긴 외모를 둘러싼 추문이었다.

회장이 다름 아닌 호빠 출신이라는 것이다.

돈 많은 강남 사모님들을 모시던 그가 은밀하고 확실한 정보를 얻었고, 그 정보로 주식 투자에서 홈런을 제대로 한방 쳤다는 제법 그럴듯한 뒷말까지 따라 붙었다.

남 말 하기 좋아하는 누군가가 만들어냈을 소문은 사람들의 입을 거치며 점점 살을 붙여갔다.

어쨌든, 김 차장은 이 비밀스러운 오너가 싫지 않았다.

평소 그가 생각하고 있던 회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한영수 회장의 비전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부서의 모든 직원이 불에라도 덴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놀랍게도 한영수 회장과 이종현 사장이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남직원들은 바짝 긴장해 차렷 자세를 취했고, 여직원들은 내심 젊은 회장의 빛나는 외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딴생각에 잠겨있던 김 차장과 계속해서 투덜대고 있던 오 대리는 남들보다 한 발짝 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님! 사장님!”

팀장은 헤어졌던 가족이라도 만난 것처럼 단박에 몸을 숙이고 앞으로 나섰다.

“이경모 부장님이시죠. 반갑습니다.”

한영수 회장은 빙긋 웃으며 팀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예. 그룹사업 3팀을 맡고 있습니다.”

“그룹사업 3팀··· 작년부터 모듈러 주택 사업을 주력으로 하고 있지요?”

“맞습니다. 아직 시장이 크지는 않지만, 건설 업계의 새 먹거리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친환경 시공이기도 하고요.”

모듈러는 주요 골조를 포함해 기본 마감재를 공장에서 사전 제작하고 현장에서 조립하는 공법.

팀장은 회장이 직접 그룹사업 3팀이 도맡아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말을 하자 잔뜩 신이 났다.

그는 밤새 떠들기라도 할 것처럼 회장 앞에서 능숙하게 즉석 브리핑을 시작했다.

한영수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팀장의 말을 유심히 들었다.

“우리 회사의 자랑인 PC 공법과 연계를 시키면 훌륭한 작품이 나오겠군요.”

“맞습니다. 회장님. 그리고 또···”

김영남 차장은 한영수 회장이 팀장과 주고받는 대화를 들으며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취임한 지 이제 겨우 한 달.

그런데도 한 회장은 그룹사업 3팀의 미미하다 싶은 업무까지도 제법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데···”

한영수 회장은 누군가를 찾기라도 하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한동안 방황하던 한 회장의 시선은 정확히 김 차장 앞에서 멈췄다.

김영남 차장은 설마 자기를 보겠느냐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틀림없이 한영수 회장은 그를 보고 있었다.

“으···”

한 회장과 그다지 좋은 시작으로 인연을 맺은 것이 아닌 오 대리가 옆에서 신음을 내뱉었다.

뚜벅뚜벅━

한영수 회장은 구두 굽 소리를 내며 김 차장을 향해 걸어왔다.

“김영남 차장님. 맞으시죠?”

한 회장은 웃으며 김 차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김영남 차장은 엉겁결에 그 손을 잡으며 허리를 숙였다.

“옆에는 오준호 대리님이시고요. 기억하실지는 모르지만, 일전에 식당에서 뵀었죠.”

“저··· 회장님 그때는 제가 실례를 했습니다.”

오 대리는 거의 울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한영수 회장에게 알아서 자진 납세를 했다.

김 차장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며 얼른 오 대리에게 눈짓을 보냈다.

“아니요. 사실 그때 실례는 제가 했지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두 분이 나누시는 말씀을 좀 들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팀장은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저었다.

마치 저 둘이 언젠가 사고를 칠 걸 알고 있었다는 듯.

“김 차장님.”

“예. 회장님.”

티몬과 품바.

이 둘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설마하니, 식당에서 흘겨봤다는 이유로 해코지라도 하려는 걸까?

하지만 한영수 회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앞으로 회사의 미래를 책임질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을 팀을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차장님은 해외 사업에 아이디어가 많으신 것 같더군요. 팀에 합류해주셨으면 합니다.”

한영수 회장과 이종현 사장을 제외한 모두의 입이 순간 떡 벌어졌다.

‘미래’, ‘중요한’, ‘합류’

의미심장한 단어들이 회장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단어들이 심지어 김 차장을 향하다니!

다른 이들 못지않게, 김 차장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누군가에게 호되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것 같았다.

“새로 만들어진 팀은 사장님께서 직접 진두지휘를 하실 겁니다. 꼭 오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겠습니다.”

평범한 직장인에게 한번 올까 말까 한 엄청난 기회.

평생 그런 일과는 인연이 없을 것 같았던 김 차장은 얼떨떨할 뿐이었다.

“진행할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따로 파일을 갈 겁니다. 고민해보시고 담당자에게 연락해주세요. 그럼 또 뵙겠습니다.”

한영수 회장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김 차장에게 등을 돌렸다.

“··· 회장님!”

그때였다.

김 차장이 한영수 회장을 불러세웠다.

회장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김 차장을 돌아보았다.

“혹시··· 그 팀에 자리 하나 더 있습니까?”

미쳤다고 해도 무방할 당돌한 발언이었다.

진귀한 구경의 연속이었다.

팀장을 제외한 그룹사업 3팀의 직원들은 당장이라도 팝콘을 사러 가고 싶은 욕망을 억눌러야만 했다.

“제가 만들었던 사업 아이템들은 모두 옆에 있는 오대리와 함께 한 것입니다. 저보다 훨씬 능력이 있는 직원이고··· 그리고 또···”

한영수 회장은 김영남 차장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와 동시에 김 차장의 혀는 마비라도 된 듯 꼬이기 시작했다.

꿀꺽━

누군가의 목구멍으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이런 말씀은 좀 그렇다만··· 제가 듣기에 김 차장님과 오 대리님. 두 분이 꽤나 재미있는 별명으로 불리더군요.”

한영수 회장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알겠습니다. 함께 넘어오시지요.”

파도가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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