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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억을 상속받았다-119화 (119/200)

119. 승우야, 내 친구 승우야

“··· 이게 뭐야.”

나는 지금 송림 프라자 1층, 승우의 가게 ‘만리향’ 앞에 서 있었다.

굉장히 바쁜 날들이었다.

자연히 운동을 나오기에는 시간이 빠듯할 수 밖에 없었고, 송림 프라자에 오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고윤아가 웃으며 내 팔이 많이 물렁물렁해졌다고 놀릴 정도였다.

뭐, 크게 상관은 없었다.

건물은 돈을 주고 따로 관리인을 쓰고 있으니 내가 돌보지 않는다 해도 그대로일 것이고, 최근에 저질러 놓았던 일들이 운동만큼이나 재미가 있었으니까.

어쨌든 그런 사정이다 보니 더더욱 이승우의 가게를 들를 일이 없었다.

겨우 짬을 내 센터를 나간다고 해도 마감 직전의 늦은 시간에나 가곤 했으니 당연히 승우 녀석은 영업을 마감한 뒤였다.

그래도 가끔은 친구에게 얼굴을 비춰야겠다는 생각에 지금 식당 앞에 선 내가 놀란 이유는 승우가 세워 놓았을 커다란 입간판 때문이었다.

- 급식 카드 절대 안 받습니다.

대관절 급식 카드가 뭔데?

그럴 수만 있다면 길을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묻고 싶었다.

그 문구는 커다란 볼드체로 입간판에 새겨져 있었다.

굵은 글꼴은 마치 이승우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만약 내가 급식 카드라는 걸 들고 있다면 엇 뜨거워, 싶어 바로 가게에서 등을 돌릴 것만 같았다.

급식.

사회적으로 그다지 긍정적으로 쓰이지 않는 단어다.

아니, 은어로서 급식의 의미를 생각하면 긍정적이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멸칭에 가깝다.

혹시 노 키즈 존처럼 학생들이 와서 밥을 먹는 걸 사절한다는 뜻일까?

철없는 아이들이 만리향에 와서 거하게 사고라도 친 걸까?

먹튀, 성인인 척 술 시키기···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갔다.

설마.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장담하건대, 험상궂은 승우 녀석의 얼굴을 보았다면 소란을 피울 정도로 간이 큰 학생은 몇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람에게 음식을 내놓는다는 것 자체에 엄청난 자부심이 있는 이승우가 미치지 않고서야 저렇게 가게를 운영할 리가 없다.

나는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입간판의 나머지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입간판의 마지막 온점까지 눈이 갔을 때 승우가 내 친구라는 것이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그렇지!

혹시나 했던 걱정은 온전히 기우에 불과했다.

정 없는 말로 시작한 처음과 달리 구어체로 쓰여 있는 아래의 내용들은 내 입가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떠오르게 했다.

- 얘들아, 삼촌이 밥 한번 차려줄게. 들어와서 먹고 싶은 것 편하게 이야기해라.

- 대신 나갈 때 조용히 사진이 있는 학생증이랑 카드 한 번만 보여줘. 계산은 필요 없어.

- 삼촌도 배고프고 어렵게 자랐어. 이렇게라도 너희들의 미래를 응원하고 싶다. 눈치 보지 말고 들어와.

“승우, 너 이 새끼···”

마음이 따듯해져 끈적한 눈물이 다 나올 것 같았다.

보아하니 그 급식 카드라는 것은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지급되는 일종의 바우처 같은 것인 모양이었다.

최근에 나는 물고 물리는 싸움에 골몰하고 있었다.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를 곤경에 몰아넣어야 했고, 가진 것을 빼앗아야 했다.

그 싸움은 배신과 비리로 점철되어 있었고 나 역시도 모든 음모의 설계자로서 때로는 어둠과 손을 잡아야만 했다.

그런데 이승우는 나보다 훨씬 훌륭한 일을 하고 있었다.

마음의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문득 승우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평화를 찾을 수 있는 베이스캠프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삶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

이것은 조건이 아니라 하나의 당위다.

승우와의 우정 역시 나에겐 그런 종류의 쉼터였다.

때마침 지금 시간은 잠깐 식당을 쉬는 브레이크 타임.

나는 배고픈 갓난아이가 젖을 찾듯 1초라도 빨리 자랑스러운 친구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야, 이승우.”

가게 문을 열고 큰 소리로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그 탓에 카운터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승우의 여자친구 은주가 놀라 얼른 일어났다.

“저희 가게 지금은 쉬는··· 어? 영수 오빠다.”

은주의 눈이 똥그래졌다.

“은주야. 저거 뭐야?”

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한번 흔들어 보이곤 그 손을 그대로 방향만 바꾸어 입간판을 가리켰다.

은주의 눈이 내 손을 따라왔다.

“응? 오빠, 뭐 말하는 거야? 밖에 뭐 별거 없는데?”

“급식 카드 안 받습니다.”

“아··· 그거?”

은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다소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동 급식 카드라는 게 있나 봐. 나라에서 학교 밖에서 밥을 먹기 어려운 형편인 애들한테 주는 카드래. 일전에 어떤 학생이 그걸로 계산하려고 하더라고. 그때 처음 알았어.”

“요즘에는 그런 게 있구나. 그런데 아무 식당에서나 쓸 수 있는 거야?”

“그럴 리가 있어? 가맹점포에서만 쓸 수 있지. 우리는 애초에 저런 것도 있는 줄 몰랐으니 당연히 가맹점이 아니었고. 아이가 계산이 안 되니까 얼굴이 새빨개져서 많이 당황하더라고. 자기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래서 그냥 가라고 했지. 맛있게 먹었으면 됐다고.”

은주도 제 짝 못지않게 선한 사람이다.

그녀가 얼굴이 붉어진 아이를 앞에 두고 어떤 행동을 했을지 눈에 선하게 보였다.

“그런데 오빠, 참 그렇다? 방학 중이라 하루에 두 끼를 지원해주는 건 좋은데, 한 끼에 오천 원이 고작이라는 거야. 어휴··· 요즘 물가도 진짜 장난 아닌데, 그걸로 뭘 사 먹을 수 있겠어.”

“··· 가만. 그런데 오천 원이면 여기서 시켜 먹을 수 있는 거라곤 군만두뿐이잖아.”

내 말을 듣기가 무섭게 은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가게 짬뽕이 먹고 싶어서 점심을 건너뛰었대. 한 끼를 굶으면 만원을 쓸 수 있으니까. 가게 마감하고 있었던 일을 그대로 오빠한테 얘기했지. 영수 오빠도 알겠지만, 저 울보가 그냥 있었겠어? 소 같은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더라. 다음날 바로 저 간판을 만들어 오더라고. 내가 못 살아.”

말투는 승우를 타박하는 모양새였지만, 은주의 표정은 달랐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게 우리 오빠야. 멋지지?’라는 애정이 듬뿍 담겨있었다.

하기야, 이승우의 매력에 대해서는 나보다 그녀가 훨씬 더 잘 알고 있으리라.

그렇기에 그 긴 세월 동안 함께 발을 맞춰 걸어올 수 있었을 것이고.

“··· 오, 새끼. 왔냐.”

그때 주방 쪽에서 이야기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우리에게 다가온 그를 향해 나는 해쭉 웃으며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헤드록을 걸었다.

“아야야··· 대낮부터 뭘 잘못 먹었냐? 남의 영업장에서 왜 지···, 난리야.”

이승우는 은주의 눈치를 보더니 내뱉으려던 걸쭉한 육두문자를 슬쩍 수정했다.

“야, 너는 어떻게 저런 기특한 생각을 다 했냐.”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가슴팍을 슬쩍 밀어 나를 밀쳐내면서 이승우가 되물었다.

“영수 오빠가 입간판 봤나 봐.”

은주가 나를 대신해 대답했다.

“아··· 뭐 대단한 거라고.”

이승우는 머쓱한 듯 손가락으로 코 밑을 비벼대었다.

“대단하지. 내가 근래 들었던 이야기 중 가장 멋진 이야기인데.”

“야. 우리도 어렸을 때 먹고 싶은 거 얼마나 많았냐. 그때 생각하면 배곯는 애들을 어떻게 모른 척해. 내가 고작 음식 장사나 한다고 그렇게 팍팍하게 살고 싶진 않다. 걔들한테 짬뽕 몇 그릇 내준다고 나 안 망해.”

고작이라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올바르게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바닷가의 조개껍데기처럼 널렸다는 소리가 목 끝까지 찼다.

“돈 많은 사람들은 기부도 엄청나게 하잖아. 그런 거에 비하면 초라하고 부끄럽지. 사실 저것도 남사스러워서 치워버리고 싶은데, 그러면 애들이 알 수가 없으니까···”

아니야. 승우야.

내가 보니까 네가 말하는 대단한 사람들은 기부와 봉사조차 절세와 불법 증여의 수단으로 쓰곤 하더라.

하지만 이 자리에서 어찌 세상에 대해 어쭙잖게 아는 척을 하며 비관적인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누구보다도 멋진 내 친구의 어깨를 한 대 툭 쳤다.

“야. 나도 본 좀 받아야겠다.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 헬스장 이용할 수 있게 말이야.”

“너희 헬스장 가끔 올라가 보면 근육맨들 때문에 숨이 턱턱 막히더라. 애들이 거기 가면 제대로 운동이나 하겠냐.”

“너가 몰라서 그렇지, 그 사람들이 얼마나 친절한데. 아마 다들 앞다퉈서 애들 운동 알려주려고 난리일걸? 뭐, 공간이 좁으면 까짓것 2호점 하나 내지.”

“새끼··· 건물주라고 허세는.”

허세가 아니라 현실입니다만.

“그나저나 좋은 일하는 건 훌륭하다만, 가게 운영에 지장 있는 거 아니야? 손님들도 받아야 하는데.”

이승우는 손가락으로 정수리를 긁적거렸다.

“그래서 처음에는 브레이크 타임에만 애들을 받을까도 했어. 그런데 세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누가 밥을 먹냐.”

“하긴, 개학하면 그때는 학교에 있을 시간이니까.”

“그렇지. 그리고 그것도 그건데. 일반 손님 안 받는 시간에만 따로 받으면 오히려 애들이 상처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더라. 한창 민감한 나이잖아. 그 뭐라고 하더라··· 혹시라도 애들한테 그런 걸 새기게 될까 봐.”

더듬더듬 말이 비는 곳을 내가 보충해주었다.

“··· 낙인.”

“그래! 낙인! 역시 한영수, 똑똑해.”

이런 속 깊은 녀석 같으니라고.

아이들을 돕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짧은 시간 동안 이승우가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는지 알 수 있는 단면이었다.

“그런데 요즘 영악하고 못된 애들도 많잖아. 그러니까···”

이승우는 내 말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학생증도 같이 보고 있어. 그리고 설령 질 안 좋은 녀석들이 날 속이려고 한다고 해도 말이야···”

승우는 활짝 웃었다.

마치 태양처럼.

“뭐 어떠냐. 걔들은 애들 아니냐? 너도 알겠지만 나도 학교 다닐 때 모범생은 아니었는걸.”

“··· 알지. 그래, 잘 알지.”

··· 이런.

정말 한 방 제대로 맞았다.

친구가 좋은 일을 하는데 어찌 모른 척을 할까.

장학재단을 움직여 이승우를 응원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널 돕겠다며 직접 찬조하려 한다면 분명 승우 녀석은 단칼에 거절할 것이다.

제발 괜찮으니까 월세를 내지 말라고 애원하다시피 사정을 해도 한사코 꼬박꼬박 돈을 입금하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내 존재를 숨기고 장학재단을 통해 후원한다면 이승우가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 훈훈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언론을 통해 미담 기사도 하나 낸다면 홍보 효과도 톡톡히 볼 것이고.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이리와, 앉아.”

이승우는 다정하게 손을 끌어 나를 의자에 앉혔다.

“밥은 먹었냐? 뭐라도 해줄까?”

“조금 전에 네가 세시부터 다섯 시 사이에 누가 밥을 먹냐며.”

“··· 아, 맞다.”

이승우는 껄껄 웃었다.

예상은 했지만, 태평하게 나를 대하는 것을 보니 이승우는 그간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하긴, 스포츠 기사면 모를까 경제면을 꼼꼼히 살펴보는 승우의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친구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요동쳤다.

나는 이제 아주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나에게 있어 누구보다도 소중한 사람이자 형제와 다름없는 네게 무엇이든 해줄 수 있다고.

말만 하라고.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오늘만큼은 내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된다.

조만간 승우와 둘이서 조용히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으리라.

나와 승우, 그리고 은주는 모처럼 한담을 나누며 가게가 떠나가라 웃었다.

인생사 새옹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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