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18화 (118/200)

118. 아버지의 마음

구 회장의 저택 앞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 하나가 튀어나왔다.

오 실장이라고 했던가.

3대 몇 치세요? 라고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이 건장한 체격의 남자는 내 차를 향해 머리가 땅에 닿을 듯이 인사를 했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안녕하세요. 실장님.”

회장님이라.

아직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익숙하지 않은 호칭이다.

자연스럽게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차 키를 주시면 제가 주차해드리겠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정원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예.”

내가 차에서 내리자 오 실장은 재빨리 거대한 저택의 대문으로 달려가 문을 열어주었다.

아마도 구 회장은 언론 보도를 보고 날 부른 것이겠지.

대단히 큰 이슈가 되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언론사들은 윤일중 회장의 은퇴에 대해 지면을 할애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더불어 나의 이름 역시도 당연히 언급되었다.

어느 이름 모를 신문사에서는 인터넷 기사로 ‘한영수, 그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보도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나의 지인 중 누구도 이 사건에 대해 연락을 취해오지 않았다.

물론 거기에는 내가 언론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조심한 탓이 가장 크리라.

얼마 전에는 평소 즐겨보던 탐사 프로그램인 ‘그것이 궁금하다.’에서 정식 인터뷰 요청이 오기도 했다.

당연히 거절했지만.

하기야, 내 사진이 어딘가에 대문짝만하게 걸린다고 하더라도 예전의 나를 알던 사람들이라면 선뜻 납득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천애 고아 한영수가.

고작 중소기업의 대리에 불과했던 자가.

하늘 아래 제집 한 칸 없던 녀석이.

그런 내가 연 매출 10조에 육박하는 기업의 회장이 되었다는 건 신데렐라조차도 구라치지 말라며 격한 반응을 보내기에 충분한 스토리였다.

대문을 통과하자 정원 분수대 옆 테이블에 구 회장이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현재로서는 나의 가장 든든한 동맹군.

“한 회장. 오셨는가.”

구 회장은 얼굴에 짙은 주름이 생기도록 웃으며 나를 반겼다.

밀짚모자에 목장갑을 낀 그는 무언가 소일거리라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회장님. 그간 격조하셨습니까.”

“그래. 이리와 앉아. 오늘은 날이 참 좋구먼. 이제 완연한 봄이야.”

“예. 하지만 봄날에 취해서 옷을 가볍게 입었다가는 감기 걸리기 딱 좋지요. 조심하셔야 합니다.”

“하하하━”

구기욱 회장은 호탕하게 웃었다.

우연이겠지만 그의 등 뒤에는 태양이 걸려있었고, 그 탓에 구 회장에게서 후광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시각적 착각을 느꼈다.

작디작은 체구로 돈의 왕국을 만든 남자.

그래, 구 회장은 틀림없이 자본주의가 낳은 거인 중 하나였다.

“자네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이구만. 어떤가, 대기업의 총수가 된 기분은?”

“회장, 총수. 그런 어깨 무거운 직함들은 아직 저에게는 무겁기만 합니다. 특히나 회장님이 절 그렇게 부르시니 더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어디, 회장이라고 다 똑같은 회장인가? 실상 나는 그냥 돈이나 좀 만지는 사람이고 자네야말로 이젠 진짜 회장 아니겠는가.”

나는 손사래를 크게 치며 구 회장의 말을 격하게 부정했다.

“저는 그저 아드님의 친구이자 동료일 뿐입니다. 더욱이 회장님의 큰 도움이 없었다면 이 일을 성공시키지도 못했을 것이구요. 그냥 영수라고 친근하게 불러주시는 것이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구기욱 회장은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회장님, 마음이 불편하시진 않습니까?”

“내가? 왜?”

의아하다는 눈으로 구 회장이 나를 바라보았다.

“윤일중 회장 말입니다. 알고 지내신 세월이 길지 않습니까. 이런 표현을 쓰고 싶지는 않지만 제가 윤 회장의 것을 모조리 빼앗은 셈입니다.”

구 회장의 마음속에 어떤 부채감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싶어 던진 질문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모든 것은 내가 안고 갈 테니 마음을 편하게 가지시라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구기욱 회장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이것 참 다행인걸?”

“예?”

“다행이라고 이 사람아.”

대관절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향해 윤일중 회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난 자네가 완전무결한 인간이라도 되는 줄 알았지 뭐야. 그런데 이런 순진한 소리도 하는 걸 보니 차라리 마음이 좀 놓이는 걸?”

“완전무결한 인간이라니··· 그럴 리가요. 부족한 게 많습니다.”

“윤 회장은 날 속였어. 다 잘 되어가고 있다는 말로 내 눈을 가리고 귀를 막으면서. 거기다가 감히 내 돈을 더 가져다 쓰려고 했지. 하마터면 밑 빠진 독에 하염없이 물을 부을 뻔한 거야. 내가 그런 자에게 동정심을 느낄 것 같나?”

구 회장의 말투는 비정했다.

문득 윤일중 회장의 아둔함과 그가 회사를 경영하며 저질렀던 비리들이 떠올라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 솔직하게 말하지. 난 이미 자네를 거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차 여사님의 재산에 자네의 머리와 포부 정도면 누구와 싸워도 해볼 만하겠지. 하지만 자네 역시도 미혹에 빠지는 모습을 보이면 나는 당장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날 거야. 내 재산을 더 불려줄 수 있는 이를.”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내 말이 섭섭한가?”

“그럴 리가요. 분에 넘치는 칭찬에 따끔한 충고까지 해주셨으니 오히려 감사해도 모자라지요.”

석상처럼 굳은 얼굴로 내게 말을 하던 구기욱 회장.

그의 입꼬리가 슬쩍 씰룩대기 시작했다.

“못 당하겠구먼.”

구 회장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혼잣말을 했다.

“회장님, 그나저나 동일이는 집에 없습니까?”

“응. 지금 집에 없네.”

“설마 또 노동하러 나간 겁니까?”

“아니야. 그 일은 내가 이제 나가지 말라고 말했어. 기특하기는 한데 그러다 몸이라도 상하면 큰일이니까.”

나는 전적으로 그의 말에 동의했다.

구동일은 이미 자신의 아버지에게 충분히 증명해 보였다.

“우리 아들을 새 사람으로 만들어준 것은 내가 자네에게 백번, 천 번 감사해야지.”

“아니요. 회장님.”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구 회장의 말은 잘못되었다.

나는 구동일을 새 사람으로 만들어준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큰일을 겪고서도 그때뿐,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재산을 다 탕진하고 가족을 잃어도 단도를 못 하는 도박쟁이들.

감옥까지 다녀와서도 다시 마약을 찾는 약쟁이들.

그런 이들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동일이는 원래부터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단지 그가 모르던 세계를 보여준 것뿐입니다.”

“··· 그렇게 말해주니 참으로 고맙네.”

구 회장은 불현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언가 회한에 젖어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회장님. 무슨 고민이라도···”

“이보게. 자네는 내가 어떻게 이 많은 돈을 벌었는지 아는가?”

“방법을 물으시는 겁니까? 주식으로 종잣돈을 만드셨고 그걸로 부동산에 투자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니. 그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니야. ··· 잠깐 정원 좀 걷지 않겠는가?”

구 회장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말없이 그의 옆을 따라 걸었다.

“나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야.”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지나친 겸손이십니다. 세상의 누구도 강남의 현금왕이 운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시대가 그랬어. 난 운 좋게 그때 태어났을 뿐이고. 돌이켜보면 참 꿈같은 세월이구만.”

구 회장의 말은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었다.

일례로 그와 같은 연배의 사람들이 모두 부자가 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운을 따지자면 내 쪽이 할 말이 많았다.

비록 그 출생의 아픔 때문에 유쾌하게 떠들 수는 없지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500억을 상속받았다.

그 후로 기연들이 이어졌고 그 끝에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꿈조차 꿀 수 없는 재산을 거머쥐게 되었다.

물론 나는 굳이 그런 속마음을 구 회장에게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이 변했어. 온갖 좋은 것들이 넘쳐나지만 돈 벌 구멍은 점점 줄어들고 있지. 내 방식이 통한다고 이젠 자신 있게 말도 못 꺼내겠단 말이야.”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구 회장이 이리 뜸을 들이는 것일까.

나는 귀만 열어둔 채 그의 말을 집중해서 들었다.

“아들놈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동일이가 바뀐 세상에 맞게 살았으면 좋겠어. 내 돈을 물려받아 편하게 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 아들이 그러길 원치 않아. 재산이 아깝다는 게 아닐세.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뭔들 못 내주겠는가. 가진 모든 걸 쏟아부어서라도 지원할 수 있어. 다만 그걸 바탕으로 동일이가 무언가를 해보았으면 한단 말이야.”

구 회장은 걸음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자네처럼 말이야.”

구 회장의 눈을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내 몸이 재가 되어 모조리 타버릴 것 같아 나는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옆에서 지켜보니 동일이는 무언가 해내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BH 인베스트먼트에서 동일이가 할 일은 많지 않습니다. 이제 슬슬 회장님을 도와가며 일을 물려받는 것도 그림이 좋지 않겠습니까?”

“난 내 아들이 나처럼 되길 원하지 않네.”

태양 빛이 반사되어 구 회장의 얼굴의 주름이 선명하게 음영을 드러냈다.

그 주름은 고집스러운 대가의 풍모를 만들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날더러 강남 현금왕이라고 일컫는 소리 따위야 장난 같은 말에 지나지 않아. 뒤에서는 날 더러운 돈 안고 있는 노인네로 손가락질하는 것도 알고 있고. 뭐, 여기까지 오는 데 깨끗한 짓만 한 것도 아니니 그에 대해 분을 품고 있지는 않네. 하지만··· 동일이 놈은 나와는 달랐으면 좋겠어.”

넌 나처럼 살지 말아라.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한 번쯤은 한다는 말이다.

구 회장 역시도 그들처럼 어쩔 수 없는 아버지였다.

“동일이에게 내가 알려줄 수 없는 경험을 쌓게 해주고 싶어. 그래서 말이네만··· 내가 자네에게 하나 부탁을 하고 싶은 게 있어.”

“말씀하시지요.”

“고왕 그룹. 적당한 자리에 내 아들을 좀 써줄 수 있겠는가?”

아아··· 이 말을 하기 위해 나를 오늘 부른 것이었나?

“청탁이군요.”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권리라고 말하고 싶네만. 나는 여전히 고왕 건설의 대주주야. 그리고 자네에게 큰 도움을 준 것을 부정하진 않겠지.”

당연히 구 회장이 내게 해준 것에 비하면 사소한 부탁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제 막 회장 자리에 올랐는데 벌써 내 주변 사람을 낙하산으로 내려보낸다는 인상을 회사에 심어주고 싶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구 회장이 말했다시피 그는 고왕 건설의 대주주 아닌가?

나와 가까운 곳에서 구동일을 일하게 한다면 틀림없이 직원들에게는 큰 부담이 될 것이다.

그때, 문득 제법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회장님. 고왕 그룹에는 리조트 사업도 있습니다.”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지.”

“하지만 그 사업에 대해 모르고 계시는 것이 있습니다. 고왕 리조트는 그간 윤일중 회장의 비자금 창구나 다름없었습니다.”

구 회장의 왼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얼마간 생각을 정리하던 그는 이제야 모든 걸 알겠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자네가 그 사실을 알아내고 윤 회장을 압박했어. 그래서 윤 회장이···”

“예. 정확하십니다. 내부자가 준 정보였습니다.”

“내부자라고 함은?”

“고왕 건설의 이재석 부사장이었습니다.”

“··· 그랬구만. 그런데 혹시 이 이야기가 내 아들과 어떻게 닿을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저는 이재석 부사장을 고왕 리조트의 사장으로 발령을 낼 예정입니다. 그리고 그간에 리조트 사업안에서 벌어졌던 비리와 부정들을 깨끗하게 치우라고 명할 겁니다. 동일이가 그 일을 같이하도록 자리를 만들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어차피 온전히 내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이재석을 견제하기 위해 누군가가 필요했다.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열정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한 지금의 구동일이라면 그 일을 훌륭하게 해낼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윤 회장이 오답을 잔뜩 찍어놓고 나갔습니다. 동일이가 그 오답들을 옳게 고치는 과정에 참여한다면 틀림없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겁니다.”

“··· 그 이재석 부사장은 어떤 사람인가?”

“계산이 굉장히 빠릅니다. 자기 보신에 있어서는 특출나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말은 좋다만 결국 배신자 아닌가.”

“회장님.”

아버지의 심정으로 구 회장은 나의 입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런 음험함까지도 동일이가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재석 부사장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은 길어야 5년에서 6년입니다. 혹시 모르는 일이지요. 동일이가 그의 뒤를 이어 사장 자리에 오를 수 있을지도.”

마침내 구 회장의 얼굴에 만족의 기색이 떠올랐다.

승우야, 내 친구 승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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