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반석 위의 남자
강남 구 회장의 저택.
오전 5시 반.
세상은 여전히 어두웠다.
오늘의 해가 기지개를 켜기에도 이른 시간이었지만 세상에는 떠오르는 해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구기욱 회장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슬슬 노안이 오기 시작한 그는 돋보기안경을 코에 걸치고 있었다.
슬리퍼를 신은 발을 옮겨 거실로 나가니 마호가니 원목으로 만들어진 응접 테이블 위에 세 종류의 종이 신문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구 회장의 비서인 오 실장이 미리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안경을 올려 쓰고, 구 회장은 조간신문 하나를 집어 들었다.
요즘같이 어디서든 휴대전화 하나면 온갖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시대에 누가 종이신문을 보겠냐마는, 구기욱 회장은 자신의 오랜 습관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활자들을 읽어 내려갔을까.
갑자기 구기욱 회장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허···”
구 회장의 입에서 뜻 모를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한 세대에 획을 그을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부를 쌓은 그.
감히 말하건대 인생의 단맛, 신맛, 쓴맛을 모두 맛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구 회장이 새삼스럽게 놀랄만한 일이 있단 말인가.
지금 구기욱 회장은 간담이 서늘해진다는 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어제 오후 7시 고왕 건설 본사 다목적홀에서 윤일중 회장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윤 회장은 본인 소유의 고왕 그룹 지분 전부를 최근 고왕 건설의 최대 주주로 올라선 BH 인베스트먼트에 전부 양도 했음을 밝혔다.
기자들의 질문에는 침묵으로 일관한 윤 회장은 고왕 그룹의 미래를 위해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는 짧은 말로 기자회견을 마쳤다.
이에 경제 전문가들은···
기사의 양이 풍성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구 회장은 오 분, 아니 적어도 십분 이상을 그 기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괴물 같은 놈!’
구 회장의 머릿속을 한영수의 얼굴이 가득 채웠다.
자신을 찾아와 윤일중 회장을 밀어낼 방법에 대해 담담히 말을 할 때만 해도 그저 한영수를 재기가 제법인 가능성 있는 청년으로 보았을 뿐이다.
아들 구동일까지 엮어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 정말 속는 셈 치고 한영수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한영수는 정말 자기가 말한 걸 그대로 해냈다.
‘거기까지만 해도 난 놈인데, 윤 회장이 가진 지분을 모두 빼앗았다고···?’
하기야, 자신조차도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그 차 여사가 점찍은 놈이다.
한영수에 대해 생각을 하다 보니 구기욱 회장은 문득 자신에 대해서까지 돌아보게 되었다.
고왕 건설의 위기에 대해서 왜 더 심각하게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어쩌면 나는 단지 이름난 기업의 회장이 내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걸 즐기고 있었을 뿐일지도 모르겠군. 그래. 저놈에 비하면 난 졸부 짓이나 하고 있었던 거야.’
“허허허━”
신문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구 회장은 높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는 허탈함에 가까운 웃음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나의 시대는 이제 곧 저문다. 신화 속 인물로 서서히 사라져가겠지. 하지만 우리 동일이는···’
천재와는 감히 맞서려고 하지 마라.
한영수를 두고 구 회장이 아들에게 했던 조언이다.
이사회를 다녀와 신이 나서 조잘조잘 떠들던 그의 아들.
마치 구동일이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받아쓰기를 100점 맞았다고 시험지를 들고 뛰쳐와 자랑하던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
하나뿐인 자기 혈육에게는 굉장히 미안한 소리가 되겠지만 안타깝게도 동갑내기 두 녀석이 가진 달란트, 그릇의 차이는 너무나 명확했다.
하지만 한영수라는 우산 아래서 비를 피하다 보면 분명히 아들에게도 기회가 몇 번쯤은 오리라.
‘모자란 것은 내가 채워주면 될 것이고···’
구기욱 회장은 고개를 돌려 구동일이 자고 있는 방 쪽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
나는 고왕 그룹의 주요 임원들을 불러 모았다.
계열사인 고왕 리조트는 물론이요, 고왕 건설의 지배를 받는 자회사 ’GW 컨설팅’과 ’고왕 상사‘ 소속 임원들까지 모두 포함한 자리였다.
윤 회장에게 그의 일가가 가진 지분을 모두 양도받는 조건으로 400억을 넘겨주었다.
지분의 원 가치와 비교하자면 양도소득세를 포함한다고 해도 반의반에도 못 미치는 돈이었다.
부자가 나란히 콩밥을 먹는 것만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하던 윤일중 회장.
400억을 제시하며 이걸 받고 조용히 떠나라는 내게 윤 회장은 어떤 협상이나 흥정을 감히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패배의 굴종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섭섭지 않게 챙겨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자 그는 은연중에 감사하는 기색까지 내비쳤으니까.
저 400억이라는 돈만으로도 윤 회장은 물론이요, 그의 자식과 손자까지도 삶을 영위하는 데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아니, 어디 그뿐이겠는가.
저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재산과 뒤로 빼돌린 것까지 합한다면 더는 재벌이라고 불리진 못할망정 여전히 대한민국의 상위 0.1%의 부자일 테다.
이렇게 생각하면 윤일중 회장의 일방적인 패배라기엔 무언가 찜찜한 결말이다.
하지만 애초에 내가 원했던 것은 정의가 구현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윤 회장이 싸질러 놓은 일들이 파헤쳐져 이제 막 새 출발 하려는 이곳에 검경이 기웃대는 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피하고 싶다.
“안녕하십니까. 고왕 그룹의 임원 여러분.”
나는 이곳에 모인 모두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상석에 앉아있었다.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이종현 사장을 비롯해 내가 고용했다고 표현해도 좋을 고왕 건설의 새 얼굴들도 마찬가지였다.
말장난을 조금 치자면, 이 침묵은 절대 고요하지 않았다.
마치 폭풍전야의 그것처럼.
“모르시는 분은 없을 거로 생각하지만, 윤일중 회장님께서는 본인이 소유하시던 고왕 그룹의 지분을 전부 내려놓고 은퇴를 결심하셨습니다. 건강상의 문제로 최근 괴로움이 있으셨다고 합니다. 이 자리를 빌려 윤 회장님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건강상의 문제’와 ‘노고에 감사’
이 말을 믿는 순진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만 끝까지 투쟁을 불사하던 회장의 의지를 벼락같이 꺾어버린 비결에 대해서는 이재석 부사장을 제외하면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하는 것은 종종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지금 나를 보는 임원들의 눈에는 그런 종류의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오랜 경륜과 인맥을 가진 윤 회장님이 계속 회사의 큰 어른으로 남아 주시기를 바랬으나··· 고왕의 미래를 생각하는 회장님을 결단을 감히 제가 말릴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자리를 비워놓을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하여, 추후 이사회의 승인을 얻어 저 한영수가 고왕 그룹의 3대 대표이사로 취임하고자 합니다.”
어디선가 작게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구나.
아마도 그 숨결에는 이런 마음이 담겨있지 않았을까?
회장이니 총수니, 권위적인 단어를 사용해서 임원들에게 위압을 주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표이사라는 그나마 완곡한 느낌의 직함을 꺼내 들었다.
이어지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경험이 부족한 저를 미덥지 못하게 바라보는 임원분들도 분명히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감내하겠습니다. 사실 이곳에 모인 임원분들에 비하면 저는 새파란 애송이가 맞지요.”
임원들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으나, 나를 따라 웃는 이는 없었다.
“예. 저는 사람 잡는 선무당이 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전문 경영인으로 이종현 사장님을 모신 것도 그것의 일환입니다. 따라서 저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시고 우리 그룹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임원 여러분들께서 힘을 쏟아주셨으면 한다는 부탁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나의 겸손함에도 무거운 좌중의 분위기는 풀어질 기미가 없었다.
“이사장님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때, 손을 들고 처음으로 입을 연 남자가 있었다.
무거운 침묵을 깬 용기 있는 남자의 정체는 고왕 건설의 재무 책임자 조 상무였다.
“예, 상무님.”
“이사장님께서는 이미 누누이 사업 조직 개편에 대해 의지를 보이셨습니다. 이제 대표이사의 자리에 오르시게 되면 그 의지는 더 탄력을 받게 되겠지요.”
조 상무는 자신의 반대편에 앉아있는 이종현 사장을 비롯해 태상 건설에서 고왕 건설로 직을 바꾼 이들을 흘낏 바라보았다.
“새롭게 오신 분들도 계시니 어찌 인사이동이 없겠습니까. 실례가 아니라면 그에 대해 이사장님의 생각을 여쭙고 싶습니다.”
조 상무가 총대를 멨군.
임원들 몇이 조 상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가려운 곳을 긁어준 조 상무에게 감사라도 표하고 싶으리라.
“예. 인사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지요. 다만 제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일도 아니고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물론 임원진만 한정하면 생각해둔 바는 있습니다.”
꿀꺽━
참을성 없는 누군가가 목구멍으로 침을 꿀꺽 넘겼다.
나의 눈이 이재석 부사장을 향했다.
윤일중 회장을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운 은밀한 협력자를.
“우선 고왕 리조트 문제입니다. 전임 사장님께서 윤 회장님과 함께 물러나면서 공석이 된 그 자리에 저는 이재석 부사장님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누군가는 입을 꾹 다물고 볼을 씰룩거렸고, 또 다른 누군가의 미간은 보기 흉하게 찌푸려졌다.
그들이 보기에 이재석이 고왕 리조트로 옮겨가는 것은 의미가 명백했다.
틀림없는 좌천.
“제가 보기에 고왕 리조트는 충분히 수익을 낼 수 있는 사업임에도 유난히 위축된 감이 있습니다. 이재석 부사장님이라면 틀림없이 리조트 사업을 훌륭하게 살려내실 거라고 믿습니다.”
이것은 단지 허울 좋기만 한 말이 아니었다.
고왕 리조트는 탈세를 위해 다년간 고의로 매출을 적게 신고해왔다.
이 말인즉슨, 리조트는 실제보다 지나치게 가치 절하를 당해왔다는 것이고 단지 정상적으로 회계장부를 작성하는 것만으로도 사정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 이재석 부사장이 놀라운 성과를 낸 것으로 비춰질 것이다.
모두의 이목이 나, 혹은 이재석에게 집중되던 가운데 이제 곧 새로운 자리로 떠나게 될 이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 보내주신다면 가겠습니다.”
단 두 마디의 짧은 말이지만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결코 짧지 않았다.
부사장도 두말하지 않고 좌천을 받아들이겠다는데 이 자리의 누가 자기 인사에 대해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모두의 생각이 거의 비슷했으리라.
임원들의 얼굴은 허옇게 질리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새로운 회장의 혀가 칼춤을 추며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위로가 조금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머지 인사에 대해서는 제가 이 자리에서 일일이 말씀드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하나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여기 계신 임원분들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능력과 성실함을 갖추신 분들은 아무 걱정 없이 맡은 업무에 열중하시면 되겠습니다. 일이라는 게 연속성이 중요하니까요.”
적어도 정치적인 이유로 당신들의 밥그릇을 깨지 않겠다는 하나의 선언이었다.
“다만, 아까 조 상무님도 말씀하셨지만 새롭게 합류하신 분들이 지금 이 자리에도 계십니다. 만약 출신을 운운하며 임원들 사이에 파벌이 생긴다면 그건 절대로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모로 어려운 시기입니다. 한마음으로 뜻을 모아주셨으면 합니다. 저도 아낌없이 지원하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갖추어 허리를 숙였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애초에 간단한 인사로 끝내려던 자리였기에 대담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임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에도 나는 잠시 자리에 앉아있었다.
온갖 상념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BH 인베스트먼트가 쥐고 있는 고왕 건설 지분 37%에 구 회장의 우호 지분 13.3%.
그렇게 누구도 함부로 흔들 수 없는 반석 위의 높은 곳에 내가 앉게 되었다.
내 입사 지원서조차도 받길 거절했던 이 회사의 왕좌에 말이다.
하지만 이 자리가 과연 몇 퍼센트의 숫자, 그것만으로 정의되는 것일까?
임원들은 고왕의 작은 일부일 뿐이다.
그룹 전체의 직원 수를 따지자면 거의 8천 명.
그 직원들의 가족까지 따지면 내가 책임져야 할 입의 숫자는 아득하기만 했다.
과연 내가 그들을 낙원으로 데려갈 수 있을까.
그때였다.
슈트 상의 안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문자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 한 대표. 문자 확인하면 연락 좀 주겠나? 혹시 시간 되면 자네를 좀 봤으면 해.
구 회장의 호출이었다.
아버지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