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달릴 수 없는 기차
흔히 말하길, 세상에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죽음과 세금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 말은 반만 맞고 반은 영 틀린 것 같다.
평범한 우리네의 삶이야 나라에서 떼가면 떼가는 대로 눈을 감고, 푸념하면서 사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만도 않다.
흔히들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상점에서 현금으로 결제를 하면 몇천 원이라도 깎아준다며 우리에게 아주 작은 유혹을 던지는 것을.
물론 대부분의 자영업자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선량한 시민일 뿐이다.
그들을 향해 탈세범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지나친 매정함이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만큼 조세를 피하고자 하는 노력을 우리의 지척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소리다.
하물며 평범한 직장인들의 연봉 이상을 꼬박꼬박 세금으로 내야 하는, 많은 것을 가진 자들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이쯤에서 솔직히 고백하건대, 고액 세납자와는 평생 인연이 없을 것 같던 나도 두 차례의 증여 과정 중에 주변에서 마음을 흔들기도 했다.
고윤아가 말하길, 생부는 나에게 깨끗한 돈을 전달하라 지시했다지만, 복희 할머니 때는 조금 달랐다.
수조 원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는 과정에서 집행인이었던 유태성 변호사는 내게 넌지시 몇 가지 방법들을 전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그 당시엔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일 정신이 아니었다.
멘탈이 완전히 부서져 있던 나는 유 변호사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그저 고개를 좌우로 저었었다.
그것에 대해 후회는 하지 않는다.
남들도 알음알음 다 하는 것을 왜 하지 않냐고, 누군가는 나를 향해 바보라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복희 할머니가 내게 주신 유산은 절대 천박한 돈이 아니다.
당신의 삶의 궤적이 남긴 발자취이자 평생을 공들여 쌓은 탑이다.
백번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다른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남다른 준법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결단코 그 발자취에 때가 타게 만들고 싶지 않을 뿐이다.
혀가 좀 길어졌지만, 어쨌든 탈세는 명백한 범죄.
그것도 탈세액이 연간 10억을 넘어가는 경우는 최소 5년 이상의 징역에서 최대 무기징역까지 처해질 수 있는 나름 중한 범죄다.
그런 점에서 저 천진난만한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대신해 투사를 자처하고 있는 아들은 굉장한 위기에 놓여있었다.
벼랑 끝에 서 있다는 것을 본인들만 모르고 있을 뿐이지.
어제까지도 괜찮았으니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아무 일 없을 것이라는 헛된 믿음.
보통 인간을 큰 곤경에 빠트리는 것은 그런 헛된 믿음들이다.
“회장님. 제가 재미있는 소문을 하나 들었습니다.”
“··· 소문?”
“지분싸움을 준비하신다고요?”
순간 윤일중 회장의 콧잔등이 움찔거렸다.
“어떤 입이 싼 놈이···”
“역시나 제가 들은 말이 사실이었군요.”
큼━
윤 회장은 헛기침을 한번 했을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런데 회장님, 지금 고왕 건설의 대주주 중에 회장님께 지분을 넘기겠다는 이는 없을 겁니다. 임시주총에서 다들 제 손을 들어주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시장에서 주식을 사들이셔야 할 텐데···”
나는 윤 회장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이보세요, 회장님.
결코 오만방자하게 굴 의도는 없다만, 진짜 여유라는 건 이런 겁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중으로 손해를 보면서 그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어디서 들었다니까 하는 말이지만, 나도 어차피 숨길 생각은 없었소이다. 누구와는 다르게 말이야. 고왕 건설은 대를 이어온 우리의 가업이요. 한 이사장이 살아온 세월 수보다 훨씬 긴 역사가 있다고. 내가 그걸 어떻게 남의 손에 넘기겠습니까. 당연히 되찾아야지.“
윤일중 회장은 잔뜩 무게를 잡고 근엄하게 말했다.
헐렁한 병원복을 입고 있는 그에게서 위엄을 찾기란 사막에서 바늘 찾기보다 어려웠지만, 잔뜩 내리깔은 그의 음성은 결연한 의지마저 느껴지게 했다.
“뺏기지 않으셨습니다. 여전히 고왕 그룹의 회장은 윤일중 회장님 아니십니까.”
“허! 웃으라고 한 말이오? 그것 참 재미없는 농담이군. 나를 사지 불구로 만들어 놓고? 그저 아직 내가 쥐고 있는 나머지 지분이 무서웠던 거지.”
“저를 무슨 지독한 악당인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회장님만큼이나 저도 회사에 대한 마음은 진심입니다.”
“아니.”
윤일중 회장은 세차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지. 고왕은 내 인생이었으니까. 회사를 생각하는 마음이 어찌 나와 이사장이 같을 수 있겠소?”
앞뒤 뚝 잘라놓고 말만 들어보면 윤 회장의 애절함은 그 어떤 비극의 주인공 못지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소중한 걸 왜 그리 함부로 다루셨답니까.
“제가 지분을 양도받는 조건으로 해드린 것들이 있습니다. 그걸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이봐요! 이사장!”
윤덕호는 브레이크와 깜빡이가 모두 달리지 않은 채 세상에 나온 불량 자동차처럼 급하게 끼어들었다.
“애초에 이사장이 이런 식으로 수작을 부릴 줄 알았다면 그쪽 도움을 받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고작 3천억짜리 채권 가지고? 우리 고왕 그룹의 연 매출이 얼마인지나 압니까? 우리라고 그런 돈 못 만들 것 같아요?”
“무슨 재주를 부린 건지 몰라도 대출 연장 승인을 받아낸 건 회장으로서 고맙게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탓에 주가가 제법 올랐잖아요. 이사장도 솔찬히 재미 좀 보지 않았습니까. 꼭 누굴 위해서 큰일을 했다는 것처럼 말하면 조금 섭섭한데. 허허.”
부자는 아주 합이 잘 맞는 짝이었다.
마치 물 만난 고기와 같았다.
돈 나올 구멍이 생기니 자신감도 함께 살아난 모양이었다.
쓸쓸히 퇴장했던 이사회의 치욕을 잊지 않겠다는 듯 그들은 쉴 새 없이 나를 협공했다.
“··· 맞습니다. 회장님의 말씀이 영 틀린 것만도 아니지요.”
허허허허━
윤 회장의 입에서 병실을 한번 울릴 정도로 큰 웃음이 튀어나왔다.
트레이드 마크와 다름없는 가식적인 웃음이 아닌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그것이었다.
내가 자기 말을 수긍하자 인생에서 가장 큰 업적을 거두기라도 했다는 듯 윤일중 회장은 즐거워했다.
윤덕호 역시도 만족했는지 옆에서 몇 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이사장에게 한 방 먹은 건 인정합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페어플레이합시다. 나 윤일중이를 너무 띄엄띄엄 보지 말아요. 이제 모든 걸 다 걸 생각이니까.”
윤일중 회장이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요.”
이제 이 부자의 어린애 같은 말싸움에 장단을 맞춰주는 것도 이제 싫증이 났다.
“허! 이 사장이 뭐라고 말해도 이미 기차는 달리기 시작했어요. 난 더할 말 없으니까 잘해보세요.”
참으로 빈곤한 상상력의 소유자다.
내가 만약 윤 회장의 입장이었다면, 나는 가장 먼저 왜 윤덕호를 굳이 배석시켰는지부터 고민할 것이다.
지금 윤 회장은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태상의 돈이 잠자고 있던 그의 승부 근성을 깨우기라도 했는지, 윤 회장은 노욕에 불타고 있었다.
“기차를 당장 멈추셔야 할 겁니다. 아니, 애초부터 달릴 수 없는 기차였지요.”
이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해줄 전가의 보도.
나는 마침내 가방에서 리조트의 이중장부를 꺼내 들었다.
“윤 사장님이 한번 보시겠습니까? 이게 뭔지 제일 잘 아실 분이니까요.”
불신에 가득 찬 눈으로 날 보며 서류를 받아든 윤덕호.
그의 눈에 새로운 감정이 깃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못 볼 거라도 본 듯 윤덕호의 동공이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왜, 뭔데 그래?”
심상치 않은 아들의 모습에 윤일중 회장이 다급하게 말을 했다.
“고왕 리조트의 회계 장부입니다. ‘진짜’ 회계 장부지요.”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입을 열지 못하는 윤덕호를 대신해 말했다.
이재석이 내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는 ‘진짜’에 잔뜩 힘을 주었다.
“··· 어, 어, 어?”
윤일중 회장이 짐승처럼 끙끙대기 시작했다.
“참 뒤로 많이도 빼돌리셨더군요. 국세청도 참 답답합니다. 모범 납세자로 이름을 올리셨던데, 그건 돈 주고 사는 겁니까?”
“이걸 어떻게!”
마침내 굳게 닫았던 입을 열고 윤덕호가 소리를 질렀다.
다급한 마음에 나온 자충수였다.
스스로 모든 사실을 인정해버린 셈.
자신도 아차 싶었는지 윤덕호는 곧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고왕이라는 이름을 그리 아끼신다는 분이 사업 하나를 탈세의 창구로 쓰시다니··· 세상 사람들이 알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난··· 난 모르는 일이야!”
“아버지!”
오호라. 아들을 손절치시겠다?
위기 앞에 본성이 나온다더니, 그리도 끈끈했던 부자 관계는 단박에 박살이 났다.
“그룹의 가장 높은 어르신이 다년간 행해졌던 이런 부정을 몰랐다면, 그것도 문제겠지요.”
“이보시게, 한 이사장···”
“뭐, 좋습니다. 정확한 사실관계는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확인해주겠지요. 횡령이니, 배임이니하는 그런 죄까지 포함해서요.”
“이 새끼가!”
윤덕호가 서류를 내던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멱살을 잡았다.
나는 지긋이 윤덕호의 손목을 쥐고 힘을 주었다.
재본 지 조금 시간이 지났다만, 내 악력은 70이 넘는다.
“회장님. 이렇게 효심이 깊은 아드님이야 끝까지 아버지를 감쌀지 모르지만, 창비 물산 쪽은 괜찮겠습니까? 조사가 시작되면 그쪽도 탈탈 털 텐데.”
나는 가볍게 윤덕호의 손을 뿌리치고 옷매무새를 다시 가다듬었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
그런 뉘앙스로 창비 물산을 슬쩍 입에 담았다.
새하얀 안색으로 부들부들하는 윤일중 회장.
이제야 그에게서 병자의 모습을 조금은 찾을 수 있었다.
“··· 이사장.”
“덮을 생각은 하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이 병실을 나서는 순간, 아무도 자료를 못 건드리게 조치를 취할 거니까요. 하기야, 워낙에 싸놓은 것이 많으니 그걸 다 숨기는데도 한세월 걸리겠더군요.”
“잠깐만, 잠깐만···”
윤 회장은 퍼뜩 침상에서 내려와 두 손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그는 바로 아래 있던 슬리퍼도 꿰어신지 못한 맨발이었다.
“우리 이야기 좀 합시다. 내가 뭘 해주면 되겠소?”
“서로 좋은 이야기가 오고 갈 기회는 많았습니다. 평화보다는 전쟁을 원한 건 회장님의 쪽입니다.”
“이번 한 번만 눈 감읍시다. 내가 깨끗하게 청소해 놓을 테니··· 경영권을 가지고 더 이상 시비도 하지 않겠소.”
“··· 그거 가지고 되겠습니까?”
결착이 났다.
이제 윤일중 회장은 죽으라는 말 빼고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거절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말만 하시오.”
“가지고 있는 고왕의 지분. 모두 넘기고 조용히 나가주셨으면 합니다.”
윤일중도 윤덕호도 입이 땅에 닿을 듯 떡 벌어졌다.
“이제는 똑똑히 아시겠지만, 회장님은 지금 비참한 상황입니다. 제 말을 따르지 않으면 더욱더 비참해지실 거구요. 저를 원망하시면 안 됩니다. 이건 모두 회장님이 뿌린 씨앗입니다.”
“...”
침통한 얼굴의 부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남은 지분 모두 넘기시면 퇴직금 조로 얼마는 챙겨드리겠습니다. 병원에 오래 누워계시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털고 일어나서 기자회견을 하세요. 모양새 좋게 물러나시란 말입니다. 이게 제가 마지막으로 베풀어 드릴 수 있는 자비입니다.”
윤일중 회장은 고개를 툭 떨궜다.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에서 진정시킬 수 없는 떨림이 느껴졌다.
“··· 알겠소.”
선택의 여지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음을 깨달은 윤 회장은 힘없는 목소리로 백기를 들었다.
반석 위의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