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재석이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는 현재도 고왕 그룹의 No. 2다.
비록 윤일중 회장의 아들이 있다고 하지만 언젠가 회장 자리를 승계하기 전까지는 엄연히 그보다 이재석의 서열이 훨씬 높다.
그 말인즉슨 이 고왕 안에서 더 이상 그가 밟고 올라갈 계단이 없다는 것이다.
자리가 있다면 단 하나.
얼마 전 사장에 선임된 이종현의 자리뿐.
하지만 이재석도 분명히 알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거기에 그를 앉힐 일은 없다는 것을.
그렇다면 이재석은 무슨 카드를 내밀까.
돈?
오너의 부정을 폭로하는 내부 고발자가 되고 크게 한 몫을 땡기겠다?
그래. 지금으로서는 이게 가장 정답에 가까울 것이다.
“··· 잠깐만요.”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나는 이재석의 말을 끊었다.
몸값을 운운하며 짐짓 여유 있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내 사무실에 처음 들어왔을 때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던 그를.
어디 그것뿐이랴.
지금도 가만히 보니 서류 뭉치 위 이재석의 손이 닿았던 부분이 눅눅하게 젖어있었다.
이재석은 자신이 반생에 가까운 시간 동안 모셔온 보스를 배신하려고 하는 것이다.
아무리 살아남기 위해 뭐든 해왔다고 하지만, 그 역시도 절대 이 자리가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끌려다녀서야 되겠는가.
“물건도 확인하지 않고 거래를 하는 건 제 성미에 맞지 않습니다. 우선 보물단지처럼 안고 계신 그 서류. 그게 뭔지 설명부터 해주시겠습니까.”
“...”
이재석은 말이 없었다.
왠지 그 침묵의 의미를 알 것도 같았다.
제 안의 마지막 양심의 선을 넘지 못하고 주저하는 거겠지.
나는 그런 그를 조금 부추겨보기로 했다.
편하게 입을 뗄 수 있도록.
“지금 부사장님은 윤 회장 일가의 부정과 비리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것은 모두 차치하고 저는 고왕 건설의 이사장입니다. 그 문서에 뭐가 있는지 알아야겠습니다. 부사장님은 지금 배신을 하는 것도,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도 아닙니다. 올바른 일을 하시는 겁니다.”
이재석을 향해 나는 손바닥을 보였다.
양심의 가책 따위는 접어둬라.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얼마간 더 주저하던 이재석.
그는 마침내 결심을 내린 듯 내 쪽으로 두꺼운 종이 뭉치를 쓱 밀었다.
일견, 평범한 회계 서류였다.
최근 5년간 고왕 리조트의 매출과 고정비 따위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유심히 들여다보았지만, 숫자와 활자들로 가득 찬 이 서류에서 어떤 비리의 흔적을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 지금 보시는 건, 고왕 리조트의 ‘진짜’ 회계 장부입니다.”
내가 서류를 보는 시간이 길어지자, 힌트라도 주겠다는 듯 이재석이 입을 열었다.
그는 진짜라는 단어에 유난히 강하게 억양을 주었다.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이재석을 바라보았다.
“잠깐, 진짜라는 건···”
“예. 이중장부지요. 고왕 리조트는 아주 오랫동안 은밀하게 이중장부로 운영되었습니다. 윤 회장의 세금 세탁기나 다름없달까요. 매출은 과도하게 줄이고 빠져나가는 돈은 있는 대로 부풀려서 신고했습니다. 그뿐이 아니지요. 리조트 건설 명목으로 사들인 땅이 있습니다. 터만 닦아놓은 채 몇 년째 방치상태입니다. 사실상 법인 명의로 윤일중 회장 개인 재산을 구매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 탈세액이 얼마나 됩니까.”
“최근 5년간만 따졌을 때, 추정 150억가량입니다.”
허···!
이거면 윤일중 회장을 숨도 못 쉬고 조를 수 있다.
얼마 전 구동일이 내게 물었었다.
왜 윤일중 회장을 내치지 않느냐고.
그때 나는 명분이 필요하다는 애매모호한 답을 했었다.
이거다.
지금 나는 그를 몰아낼 충분한 명분을 얻었다.
“이거, 믿어도 되겠습니까?”
돌다리도 두들겨본다는 심정으로 이재석에게 말했다.
혹시 아는가.
부끄러움도 모르고 꾀병으로 드러눕는 양반이다.
이것도 그런 윤일중 회장이 꾸민 음모의 일환일지도 모른다.
그 경우라면 자칫 비리의 증거라고 이것을 들이밀었다가 오히려 곤란한 지경에 빠지는 건 내쪽이다.
“창비 물산이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그쪽을 알아보시면 이게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창비 물산이요?”
“고왕 리조트에 자질구레한 비품들을 대고 있는 회사지요. 참 신기한 것이 이 회사는 거래를 고왕 리조트랑만 한단 말이지요. 그래도 장사가 되는 모양입니다.”
잠깐···
퍼뜩 감이 왔다.
이재석의 말에서 무언갈 깨달은 나는 다시 고개를 서류에 파묻었다.
사람의 눈과 뇌란 얼마나 무신경한가!
비로소 숫자들에게서 의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샴푸가 단가가 5만 원··· 휴지는 3만 원···”
나도 모르게 과도하게 부풀려져 있는 비품들의 가격을 읊어 내려갔다.
적게는 시중가에서 서너 배, 많게는 열 배까지도 책정이 되어 있었다.
“창비 물산은···”
“예. 일종의 유령 회사지요. 그 차액들이 어디로 흘러갔는지는 굳이 제 입으로 말씀드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만약 인간을 만든 신이 정말 있다면 그에게 묻고 싶어졌다.
이미 남 부럽지 않게 많은 것을 가졌으면서도 이런 치졸한 방법으로 더 움켜쥐기를 바란단 말인가.
“좋습니다. 이 서류의 진위와 부사장님의 진심에 대해서는 더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원하는 걸 말하라.
나는 이재석의 두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5억. 현금 5억을 내주셨으면 합니다.”
··· 역시 돈이었나.
그래, 차라리 그편이 깔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승낙의 의미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지분싸움으로 생길 출혈과 비교하자면 5억은 어쩌면 싸게 먹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부사장님. 저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말한다고 모든 게 뚝딱 나오지 않습니다.”
“아니요. 이건 제 거취의 문제입니다. 저를 고왕 리조트 사장으로 보내주시지 않겠습니까?”
의아한 제안이었다.
말이 사장이지, 거기로 간다는 건 사실상 이재석의 위치를 생각하면 좌천이나 다름이 없다.
“어차피 에이스가 이사장님의 손에 들어간 이상, 윤덕호 사장도 아버지와 함께 물러나야겠지요. 그 빈자리를 제가 채우겠습니다.”
“의미를 모르겠군요.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사장님이 만약 우리와 뜻을 함께한다면 저는 유임을 부탁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지금 저에겐 회사를 잘 아는 사람도 필요하니까요. 그런데 왜 고왕 리조트입니까?”
“용의 꼬리 노릇은 이제 지겹습니다. 마지막으로 뱀의 머리가 되어 보고 싶은 마음이라면 이해하실까요? ··· 그리고, 아무리 이런 저라도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 건가.
자연스럽게 좌천의 모양새로 떠나면서 내부 고발자의 용의선상에서 벗어나겠다는 의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이재석 부사장은 보통이 아니었다.
“만약 이 문서가 제 손으로 넘겨진 것이 탄로 난다고 해도 이사장님과 저만 입을 맞추면 되겠지요. 아까 이사장님이 말씀하셨지요? 올바른 일이라고. 저는 사리사욕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왕 리조트의 신임 사장으로서 그간에 행해진 부정을 뿌리뽑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이 자도 날카로운 칼이구나.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이중삼중으로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는 이재석을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배신자는 또 배신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 이재석이라는 칼을 한번 잡아보기로 했다.
그 칼을 계속 쓸지, 아니면 부러트려 버릴지는 한번 휘둘러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으리라.
“좋습니다. 다만 고왕 리조트의 폐단을 뿌리 뽑는 차원에서 엄격한 감사부터 하겠습니다.”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 이사를 하려면 입주 청소부터 해야지요.”
이재석은 슈트 주머니를 뒤적여 USB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파일 형태로 저장해둔 장부입니다. 어쨌든 저와 이사장님의 오늘 대화는 이것을 이사장님이 어떻게 쓰느냐에 달렸습니다. 당연히 알고 계시겠지만, 만약 이사장님이 윤 회장을 몰아내지 못한다면 오늘 일을 저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부정할 것입니다.”
***
윤일중 회장이 입원해 있는 병실 앞.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 나는 병실 문을 똑똑 두들겼다.
“예. 들어오세요.”
안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화려한 장식의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병실은 여기가 병원 안인지 특급호텔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호사스러웠다.
“아니···”
목소리의 주인공은 윤 회장의 첫째 아들 윤덕호였다.
“윤 사장님. 평일 낮에도 윤 회장님의 간병을 도맡고 계시다니 효심이 정말 지극하시군요.”
내 말을 듣고 윤덕호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여기를 왜 온 거요? 면회 사절한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
“예. 하지만 꼭 회장님께 드려야 하는 말씀이 있어서요. 제 변호사와 함께 올까도 생각했지만, 혼자 오는 것이 그래도 최소한의 배려인 것 같아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변호사···? 배려···?”
윤덕호는 인상을 잔뜩 쓴 채로 내가 한 몇 마디 낱말만을 캐내, 따라 읊었다.
“이사장과 할 이야기 없으니까 나가세요. 안 나가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제기랄, 이 병원은 보호자에게 확인도 안 받고 아무나 들여보내고 말이야. 형편 없구만!”
아무나라.
나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나가라고 등을 떠미시면 발이 달렸으니 못 나갈 것은 없다만, 아마 나중에 크게 후회하실 겁니다.”
“이 사람이! 당신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윤덕호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튀어나오려던 찰나, 병실 안쪽에서 윤일중 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데 이리 시끄러워?”
두 팔을 허리에 댄 채로 잠시 나를 노려보던 윤덕호는 목소리를 쫓아 병실 안의 또 다른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그 방의 문이 열렸다.
문 틈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윤일중 회장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그리고 윤덕호가 나의 면회에 대한 허락을 윤 회장으로부터 득했는지, 여전히 미간을 좁힌 채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 건강은 좀 어떠십니까.”
몸 상태를 묻기에는 윤일중 회장은 혈색이 너무나도 좋았다.
어쩌면 이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환자 중 가장 상태가 좋은 이가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까지 들었다.
“공사다망하신 이사장께서 어떻게 여기까지 행차를 하셨습니까.”
“진작에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제가 조금 불편하셨나 봅니다.”
“편하다면 거짓말이겠지요. 여기 드러눕게 하는데 이사장이 크게 한몫했으니까요. 허허.”
윤일중 회장은 입술을 삐죽대며 웃고 있었다.
“병원 밥도 먹다 보면 먹을 만하더이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언젠가 이사장도 여기서 밥을 먹는 날이 오지 않겠소?”
“글쎄요. 저는 아직 젊으니까요.”
“그렇지. 우리 이사장이 참 젊지요. 부럽습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아래도 좀 내려다봐야 할 겁니다. 젊다고 고개 빳빳이 들고 다니다간 언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지 몰라요.”
지저분한 농담까지 던질 정도로 여유를 되찾은 그였다.
어리석은 사람.
그는 자신의 재기를 의심하지 않고 있겠지.
하지만 과연 오 분 뒤에도 윤일중 회장은 내 앞에서 지금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수 있을까?
“회장님. 오늘 찾아뵌 것은 안부 인사도 있지만, 꼭 드려야 할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허허, 난 이사장이 무슨 말만 한다고 하면 그렇게 겁이 나. 왜 오늘은 또 뭡니까?”
윤일중 회장은 제 아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자리를 피해달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아니요. 이왕이면 윤덕호 사장님도 이 자리에 계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장님과도 연관된 이야기니까요.”
두 부자의 눈이 나에게 몰렸다.
전성기 한정 전설적인 복서인 마이크 타이슨은 세상에 재미있는 어록을 많이 남겼다.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어 ‘핵이빨’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그 유명한 시합에 앞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나는 지금부터 이 부자를 사정없이 두들겨 팰 생각이었다.
달릴 수 없는 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