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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억을 상속받았다-114화 (114/200)

114. 흥정

“대표님. 안에 계십니까.”

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사무실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들어오세요.”

나는 책상 위의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 고개를 들곤 문 쪽을 바라보았다.

목이 뻐근하다.

목덜미에 손을 올려 주물럭거리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나는 숫자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

누누이 강조했듯이 현재는 그저 통과점에 지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이제야 겨우 제대로 된 출발선 앞에 선 셈이다.

요즘의 관심사는 다름아닌 경비보안 업체.

고왕 건설 때만큼 큰 그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예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이다.

지금도 매니저가 뽑아준 경비보안 업체들의 프로필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사실 한 대리로 불리던 시절에도 원청이 되었건, 하청이 되었건 거래 상대방의 정보를 미리 확인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업무였다.

일을 하는 위치와 바라보는 시각만 달라졌을 뿐이지, 업무의 본질은 같기에 작업을 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이래서 재벌가의 자제들이 실무경험을 쌓는 건가.

처음에는 내 신변을 보호하자는 차원이었다.

아무리 단련을 한다고 해도 사고나 흉기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육체이다.

가진 것이 넉넉하다면 과하다 싶을 만큼 안전을 추구하는 것은 사치가 아니라 현명함에 가깝다.

그런데 건설업체를 하나 인수하고 나자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경비보안 업체에 줄을 하나쯤 던져놓는 게 생각지도 못한 확장이 될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 내 가족이 안전한 아파트, 고왕 건설은 전문 경비업체와 함께합니다.

건물과 보안이라는 것은 사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아니겠는가?

거기까지 가니, 머릿속으로 어설프게나마 광고 문구가 떠오르기도 했다.

내 몸뚱이 하나 보호하고자 하면 돈으로 고용을 하면 끝날 일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좀 판을 키워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아직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황.

돈이 주는 가장 큰 장점은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

단순 투자를 할 수도 있고, 설령 아예 통째로 인수해버린대도 지갑 사정은 여전히 넉넉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정실 전자도 있었지···

문득 복희 할머니가 따끔하게 혼을 내셨던, 어설픈 나의 첫 투자가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정실 전자의 이신재 사장은 단 한 번도 빠트리지 않고 월별 매출액과 영업이익을 나에게 알려왔다.

요즈음의 정실 전자는 내가 이래라저래라 첨언을 할 것도 없이 정말 잘 나가고 있었다.

마치 바다 위에서 훈풍을 맞아 돛을 활짝 편 배와 같았다.

태상 오토비스와 체결했던 소규모 납품 계약이 도화선이 되어 우리가 자랑하는 신형 컨버터를 납품받겠다는 회사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태상 오토비스 역시 물건이 쓸만하다고 생각했는지 추가분을 주문했다고 한다.

눈물을 머금고 내보냈던 직원들이 제자리로 돌아왔고, 공장은 다시 활기를 띠었다.

누가 훅 불면 꺼질 것 같이 도산 위기에 놓여있던 정실 전자는 무려 한 분기 만에 전년도 매출 전체를 뛰어넘는 기염을 토했다.

얼마 전 새해 인사차 전화를 했을 때, 이신재 사장은 모처럼 직원들에게 넉넉한 성과금을 줄 수 있었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신재 사장같이 일하는 손을 가진 이가 성공하는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이겠지.

떡 본 김에 제사 지내랬다고, 조만간 BH 인베스트먼트를 움직여 정실 전자를 코스닥 시장에 올릴 계획까지 가지고 있었다.

“대표님, 손님 오셨습니다.”

잠시 상념에 잠겨있을 때, 문을 열고 얼굴을 내보인 직원은 찾아온 이가 있음을 알렸다.

“손님이요? 누구시죠?”

사전에 약속된 만남은 없었던 오늘이다.

최화란이나 구동일? 아니면··· 윤아?

익숙한 사람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갔지만, 직원의 입에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고왕 건설의 이재석 부사장님이십니다.”

이재석?

그가 연락도 없이 나를 찾아왔다고?

의아하다.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 올랐다.

일단 나는 직원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알겠습니다.”

직원이 문을 닫고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재석이 나의 사무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부사장님, 말씀도 없이 어떻게 여기까지 직접···”

“한 대표님. 아니 이젠 이사장님이라고 말씀드리는 게 맞을까요?”

“편하신 대로. 호칭이야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그와 잠시 악수한 뒤 응접실 소파로 안내했다.

흠···

이재석을 아주 잘 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에서 그는 항상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은밀하게 고왕 건설 내부에서 수집한 정보를 통해 들은 세평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열정보다는 냉정, 의리보다는 이익에 밝은 자.

그런데 오늘 그는 망가진 기계처럼 어설프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입으로야 웃고 있었지만, 눈으로는 그에게서 풍기는 조급함을 쫓았다.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행동을 하기 마련.

지금 이재석이 딱 그랬다.

갑갑하기라도 하다는 듯 그는 자꾸만 애먼 넥타이를 계속해서 매만졌다.

나는 조용히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말할 듯 말 듯 달싹거리기만 하는 이재석의 입술.

의아함과 주저함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침묵이 유지되었다.

어색하다면 참으로 어색한 자리였다.

나와 그의 독대는 쉬이 상정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는 우군보다는 적군에 가까웠으며 서로 지켜야 할 인의가 없었다.

“이사장님···”

이재석 역시도 그런 불편함을 감내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마침내 그가 성대를 움직여 목소리를 내었다.

“정말 훌륭한 일을 하셨더군요.”

“아··· 아닙니다. 기사를 보셨군요. 박수받으려고 한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누구라도 그런 상황이 눈앞에 닥쳤다면 저와 똑같이 행동했을 겁니다.”

“그럴 리가요. 이사장님과 같은 용기를 가진 사람은 백에 하나도 드물 겁니다.”

뜻밖의 화제가 대화에 오르자 나는 목소리에서 쑥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출근을 하기가 무섭게 BH 인베스트먼트의 직원들이 일렬로 서서 나를 향해 환호를 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영문을 몰랐던 나는 오늘이 월급날도 아닌데 왜들 저러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정은 잠시 뒤 앨런을 통해 기사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영웅이니 의인이니 낯 뜨거운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렇다고 좋은 뜻으로 쓴 기사를 내려달라고 하는 것도 영 우스운 꼴이라 그저 내버려 두고 말았다.

어쨌든, 설마하니 이재석 부사장이 나를 칭찬하겠다고 여기까지 행차한 것은 절대 아닐 테고.

“··· 윤 회장님이 지분 싸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이재석이 깜빡이도 켜지 않은 채로 훅 들어왔다.

“··· 그렇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예상 못 했던 일은 아니었다.

나와 BH 인베스트먼트가 그랬듯이 윤일중 회장 역시 얼마든지 주식을 매입할 자유가 있다.

“주주들만 신나는 소식이겠군요.”

최대 주주 자리를 놓고 본격적인 경영권 분쟁이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주가에는 불이 붙기 마련이다.

하지만 주가가 오르는 만큼 나와 윤 회장은 비싼 값을 치르고 자리를 빼앗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할 것이다.

가능한 피하고 싶은 싸움이지만, 상대가 먼저 시작한다면 이쪽에서도 두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런데.

이재석은 왜 굳이 나를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 선전포고?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 신사적인 행동이다.

복희 할머니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돈의 전쟁은 눈앞에서 피가 흐르지 않을지언정 세상에서 가장 비정한 것이라고.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단 하나뿐이다.

이재석 부사장은 지금 백기를 들고 온 것이다.

우리 쪽으로 전향을 하겠다고.

물론 아직 속단은 한참 이르다.

나는 조금 더 신중하게 그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회장님은 자기 지분을 담보로 태상 금융으로부터 자금을 대출받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뭐랄까, 이런 말을 불쾌하게 듣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늑대를 피하려고 범의 굴에 들어가는 꼴이지요.”

이재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의 눈이 찡그려졌다.

그가 나를 늑대로, 태상을 호랑이로 비유한 것이 기분 나빴기 때문이 아니다.

나의 앞을 가로막으려는 커다란 벽.

그 벽이 짙은 안개 속에서 슬쩍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태상!

틀림없이 그 뒤에는 장은수가 있겠지.

고윤아로부터 시작된 그의 도발이 서서히 분명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다.

“태상 금융은 틀림없이 아주 많은 돈을 선심 쓰듯 빌려준다고 약속했겠지요? 훗날 이자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내 짐작이 정확했는지 이재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명백히 우정을 가장한 침략이다.

그걸 또 덥석 물려는 윤 회장의 아둔함은 일단 둘째치고, 태상 쪽의 의도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었다.

만약 고왕 건설이 탐이 났다면 그들은 진작에 인수에 참여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애초에 내가 끼어들 여지도 없었으리라.

그런데 이렇게 돌고 돌아 우회적인 방법으로 접근한다는 건 사실 고왕 건설이 태상에게 있어 그다지 군침이 도는 먹잇감이 아니라는 소리가 된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 태상 그룹, 그리고 장은수가 살짝 발을 담근 것은 오로지 나를 견제하겠다는 이유 외에는 없을 것이다.

··· 막아야 한다.

태상 그룹이라는 거대한 도살자 앞에서 나는 아직 연약하고 무력한 존재다.

나는 새삼 다른 눈으로 이재석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모든 벽에는 반드시 문이 있다.

반드시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이재석이 나에게 그 문이 되어줄까?

“부사장님이 이런 사실을 저에게 말한다는 건 분명한 의도가 있겠지요?”

“···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만의 신념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질문에 이재석은 바른말을 하지 않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많은 사람이 저에 대해서 오해를 합니다. 대부분 뒤에서 절 손가락질 하면서 이렇게 말하죠. 승진에 눈이 돌아간 자. 물론 이것도 실제로 그들이 하는 소리에 비하면 굉장히 정제된 말입니다만··· 어쨌든, 저에게도 신념이 있습니다. 그건 끝까지 살아남는 겁니다. 가장 원시적이고 중요한 본능에 가깝지요.”

그는 수수께끼 같은 말과 함께 가방에서 종이 뭉치를 하나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상당한 두께의 묶음이었다.

- 2022. 4분기 고왕 리조트 회계 장부

활자로 쓰인 큰 제목을 보자 관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종이 뭉치 쪽으로 손이 갔다.

그러나 이재석은 아직 그 물건에 내 손길이 닿길 거부하고 있었다.

그는 원고를 제 몸으로 슬쩍 끌며 그 의사를 간접적으로 드러내었다.

“살아남는 데 필요하다면 남들도 밟아왔습니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어쨌든 그 행동들의 결과로 저는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십니까.”

“이건 회장님의··· 아니, 여기까지 온 판국에 거추장스러운 표현은 내다가 버리겠습니다. 이건 윤 회장 일가의 부정과 비리가 담겨있는 문서입니다.”

뒤통수가 얼얼했다.

이재석은 그냥 문이 아니었다.

만약 열리기만 한다면 백만 대군도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성문이었다.

그렇다면 문을 열어주는 대가로 그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할까?

회사를 살려야 한다는 식의 허울 좋은 이야기는 듣고 싶지도 않았다.

차라리 그가 명확하게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게 훨씬 더 믿음이 갈 테니까.

어느새 나와 이재석은 예의상 짓고 있던 웃음기가 저 멀리 사라진 지 오래였다.

“살아남는다는 것. 정말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지요. 저 역시 살아남아서 끝까지 가겠다는 의지는 부사장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이재석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역시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원하는 걸 말씀하시지요.”

“··· 아마도 제 몸값은 지금이 제철이겠지요.”

아주 중요한 흥정이 시작되려는 찰나, 이재석은 이 순간을 음미라도 하겠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1초가 영원처럼 느껴지던 그때,

비로소 그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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