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커지는 균열
제왕의 침소에 있을 법한 침대의 끄트머리에 몸을 기댄 채 장은수가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불 꺼진 방은 어두웠고, 어둠 속에서 흘러나오는 휴대전화 불빛은 장은수의 얼굴에 대비를 더욱 진하게 도드라지도록 만들었다.
어둠과 빛의 경계에서, 가뜩이나 날카로운 인상의 장은수는 더욱 차가워 보였다.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있는 그는 세상의 모든 비정함을 자기 안에 다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장은수의 옆에는 나신의 여자가 그에게 등을 돌린 채 잠을 자고 있었다.
여자의 목에서 저 척추 아래까지 이어진 유연한 곡선은 잘 빚은 도자기를 보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여자다.
아니, 아름답다는 말조차 부족해 보였다.
그녀의 외모를 언어로 담아내기 위해서는 이 세상 사전에 없는 단어를 새롭게 써내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녀의 이름은 송은경.
이 시대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 중의 한 명이었다.
TV에 나왔다 하면 완판을 불러오는 CF 퀸이자, 현재 충무로에서 최고의 티켓 파워를 가진 여배우.
그리고,
송은경은 장은수의 오랜 내연녀이기도 했다.
오늘 이 둘은 한 차례 질펀한 정사를 나눈 뒤 작은 다툼이 있었다.
하기야, 싸움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을 정도로 일방적인 한쪽의 우세였지만.
“오빠. 나 은퇴할까 해.”
“왜, 일이 재미 없어? 쉬기에는 아직 젊잖아.”
송은경이 잠들기 전의 일이다.
몸을 지배했던 쾌감이 미쳐 다 빠져나가지 않았을 때, 장은수의 품에 안긴 채로 그의 가슴팍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혼자만 간직하고 있던 고민을 장은수에게 털어놓았다.
“나 조만간 회사랑 계약 끝나. 여기저기서 연락해 오는데 다 거절하고 있어. 그리고··· 언제까지 오빠의 그늘 밑에 있고 싶지 않아. 우리 관계를 당당하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송은경의 말을 듣자 나른함에 취해있던 장은수의 표정이 삽시간 만에 굳어졌다.
그녀의 말뜻을 바로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왜, 한창 전성기를 찍고 있는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께서 40대의 이혼남에게 시집이라도 오시려고?”
“오빠는 왜 꼭 말을 해도 항상 그렇게 해. 좀 다정하게 말할 수 없어?”
“다정? 난 최대한 좋게 말하고 있는 거야. 방금 네가 한 말이 얼마나 분수 넘는 소리인 줄 알아?”
장은수는 안광을 번뜩이며 송은경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시퍼런 칼이 날아오는 것과 같았는데, 송은경은 그 한기에 순간 몸을 움찔거렸다.
“··· 오빠.”
송은경은 오늘만은 꼭 할 말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벌써 이런 관계가 이어진 것이 6년째.
남들 눈을 피해 조심히 그를 만날 때마다 고급 콜걸이 되는 것 같아 수치심을 느꼈던 그녀다.
세상의 온갖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자신인데.
모두가 나를 가지고 싶어서 안달인데.
그나마 장은수가 이혼하고 난 뒤에는 사정이 좀 나아져 이렇게 그의 집에서 밀회를 할 수 있게는 되었다.
“혹시 오빠는 나를 무슨 몸 파는 여자로 생각하는 거 아니지?”
“...”
장은수는 대답이 없었다.
그의 무반응이 마치 질문에 대해 긍정을 하는 것 같아 송은경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오빠가 보기엔 우스울지 몰라도 나도 어디 가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성공했어. 이런 대우 받을 사람 아니라고. 돈? 내가 돈 때문에 이러는 거 같아? 나도 돈 많아. 나 그냥 정말 오빠를···”
“그 돈을 누가 벌게 만들어줬지?”
장은수의 낮은 음성에 송은경은 입을 다물었다.
물론 송은경의 성공에는 장은수의 암묵적인 도움이 기여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송은경에게 고작 그것이 전부였겠는가.
타고난 재능과 부단한 노력이 없었다면 그녀가 지금의 명성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송은경은 장은수의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장은수에게는 지금처럼 사람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송은경은 그런 장은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자리가 있어. 인생은 원래 불공평한 게임이야. 비천하게 태어난 자들이 내세울 거라곤 오로지 머릿수뿐이지. 그러니까 입으로 떠드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거야. 사람은 누구나 다 평등하다고. 그러니까 저 위에 있는 너희들도 그만 내려와서 나랑 같은 곳에 서자고.”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한 목소리.
송은경은 장은수의 무정함에 왈칵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훌륭한 연기력으로 수많은 관객을 울렸던 그녀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송은경은 그런 힘 있는 배우가 아니었다.
극의 진행에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관객의 한 명에 불과했다.
“그들이 아무리 망치를 들고 두들겨보라지. 절대 천장은 무너지지 않아. 그래, 그리고 송은경, 넌 네 위치가 어디라고 생각해?”
“··· 나 갈래.”
송은경은 눈물을 숨기기 위해 장은수로부터 몸을 돌렸다.
송은경이 가겠다고 말했음에도 장은수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를 달래거나 붙잡으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 그였다.
결국 송은경은 침대 밖을 떠나지 못했다.
어쨌든 그녀는 장은수를 사랑했고, 이런 위태롭고 가련한 사랑을 하고 있는 자신 또한 사랑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송은경은 잠에 빠져들었고, 여전히 잠자리에 들지 않은 장은수는 휴대전화로 낮에 미처 체크하지 못한 기사들을 검색해보고 있었던 것이다.
“··· 음?”
그때, 장은수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K 일보의 인터넷 기사였다.
K 일보라면 황 실장을 시켜 한영수의 정보를 흘린 곳.
“이 새끼들 봐라···”
장은수의 이 사이로 신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강남역 지하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한 의인, 한 투자 회사의 대표이사로 밝혀져.
장은수가 요구한 것은 한영수와 BH 인베스트먼트를 철저히 파헤쳐 달라는 것.
하지만 인터넷 지면에는 그가 원한 것과 전혀 상반되는 기사가 실려있었다.
- 한편, 그가 대표로 있는 투자 회사는 최근에 국내 중견 건설사 인수에 참여하면서···
사진은 모자이크가 되어있었고, BH 인베스트먼트와 한영수의 실명 역시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 판이 돌아가는 모양새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자라면 기사 속의 그 회사가 어디인지 충분히 알 법했다.
장은수의 볼이 씰룩거렸다.
물에 검은 잉크가 퍼지듯 불쾌함이 전신의 세포 하나하나에 퍼지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 모든 것이 뜻대로만 풀려 온 장은수였다.
영원히 자기 앞을 막아서는 벽일 것 같던 장영복 회장도 한 명의 인간이기에 결국 죽음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 벽을 넘어서자 비로소 세상의 주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그였다.
그런데 이 한영수라는 사생아 새끼가 등장하고 나서부터 무언가 조금씩 엇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아 돋보기를 들어서 찾아야만 했던 작은 균열.
기껏해야 한영수라는 놈은 딱 그 정도였다.
그런데.
그 균열의 틈이 점점 갈라져 커지고 있었다.
이제는 맨눈으로도 선명히 보인다.
장은수는 휴대전화를 끄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빛에 적응되어 있던 그의 눈은 갑자기 다가온 컴컴한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
“이런 시팔···!”
윤일중 회장은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
요즘 들어서 부쩍 천박한 욕설을 입에 담는 일이 늘어난 그다.
몇 번을 바닥에 튀기며 뒹군 휴대전화는 액정에 크게 금이 가버렸다.
윤일중은 장은수가 읽은 바로 그 기사를 막 확인한 참이었다.
“이 새끼는 무슨 신의 아들이라도 되는 거야? 하필이면 지금··· 이거 혹시 먼저 선수 친 거 아니야? 다 조작질 한 거 아니냐고.”
“상식적으로···”
윤일중 회장의 병실 침대 옆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있던 이재석 부사장이 입을 열었다.
“목숨을 걸고 이런 쇼를 하는 건 불가능하지요.”
“이런 개 같은···”
“이제 와서 더 이상 언론 플레이는 힘들겠습니다. 알만한 사람들은 저게 BH 인베스트먼트라는 걸 다 알 텐데, 괜히 벌집을 쑤시는 꼴입니다.”
“그쯤은 나도 알아!”
윤 회장은 버럭 냅다 소리를 질렀다.
이재석은 보스의 고함에 잠시 눈이 커졌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회장님.”
이재석은 나지막하게 윤일중 회장을 불렀다.
“이쯤에서 뒤로 물러나 지켜보시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것 같습니다. 어쨌든 회장님의 자리는 보전해주겠다고 저쪽에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팔다리 다 잘리고 등신처럼 허허 웃고만 있으라고? 이재석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웃기는군. 그게 여태껏 당신이 늘 해왔던 일이잖아.’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라는 격언을 떠올리며, 이재석은 속마음을 숨겼다.
“가만··· 뭐야, 혹시 너, 저놈들한테 뭐라도 약속 받은 거야? 왜, 뭐 자리라도 하나 챙겨준대? 사장까지 외부인사가 차지한 지금, 당신이 올라갈 수 있는 곳이 있을 거 같아?”
윤일중 회장은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회장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병실에 드러누운 뒤로 진짜 병이라도 생긴 건지 윤일중 회장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뻘밭에 발을 담근 그가 침착해도 모자랄 판에 팔다리를 있는 대로 크게 휘젓고 있으니 더 깊은 곳으로 빠져드는 꼴이었다.
“부사장, 계산기 두들기는 거 빠르잖아? 줄 잘 서라고. 내가 재기해야 당신도 살아. 이대로 끝날 것 같은가? 태상의 장은수가 뒷배가 되어주기로 했어. 태상의 도움을 받으면 BH 따위야 아무것도 아니지. 암, 그렇고말고.”
이재석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회장이 한심할 뿐이었다.
하기야 이런 자의 심부름꾼을 자처하며 살았으니 덩달아 자신의 인생이라고 뭐 더 나을 것이 있을까.
평사원에 불과했던 이재석이 여기까지 오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바로 생존 본능이었다.
이재석은 시세의 흐름을 볼 줄 알았고, 철저하게 그 흐름을 쫓았다.
설령 더러운 일일지라도 필요하다면 꼭 해냈다.
BH 인베스트먼트가 등장하기 전 대규모의 인력 감축도 이재석의 주도로 이뤄진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윤 회장은 이제 끝이었다.
더 이상 그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안하지만, 이제는 배를 갈아타야 할 때가 된 것 같군.’
“하아···”
생각에 잠긴 이재석 부사장이 아무 말이 없자 윤일중 회장은 그제야 제 병상을 지키고 있는 이의 눈치를 슬쩍 보기 시작했다.
“미안허이··· 내가 요즘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고··· 노망이라도 난 것 같아. 내가 한 말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윤일중 회장은 최대한 불쌍하고 서글픈 얼굴을 연기하며 이재석에게 사정하듯 말했다.
“아닙니다. 회장님.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재석은 윤일중 회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윤 회장의 눈에는 이재석의 정수리만 보였기에 몰랐겠지만 숙인 고개 안의 이재석의 표정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회장님, 저는 잠시만···”
이재석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병실에서 나온 이재석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낯이 익은 자들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또 한참을 걸어 복도 끝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이재석은 휴대전화를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 나야.”
이재석은 한참 동안 말없이 전화기 건너편의 누군가가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자물쇠라도 단 것처럼 무겁던 그의 입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응. 장부 준비해놔. 그래··· 걱정하지 말고. 내가 안전은 책임질 테니까. 그래. 거기서 보자고.”
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