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12화 (112/200)

112. 선행의 나비효과

대한민국의 대표 유력 일간지인 K 신문사.

중도성향의 이 신문사는 속보를 누구보다 빠르게 보도하는 것으로 유명한 매스 커뮤니케이션이다.

물론, 이제 시대가 변하여 언론의 힘이 많이 약해진 것도 사실이다.

사람들은 뉴스와 기사보다는 자신이 구독하는 유튜버의 말을 믿는 것이 요즘 세태.

특히나 인터넷 신문의 범람으로 언론사들은 심도 높은 기사보다는 조회 수가 잘 나오는 연예인들의 가십이나 SNS를 뒤적거리게 되었으며, 어느 새부터인가 ‘기레기’라는 멸칭은 기자들에게 자연스럽게 붙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언론인들은 알게 모르게 여론 형성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 에이. 시팔.”

이 걸쭉한 욕설을 내뱉는 사내는 누구인가.

여기는 K 신문사의 산업부.

이 부서에 소속된 베테랑 기자 이민욱은 아까부터 책상에 A4 용지 몇 장을 펼쳐놓고 씩씩대고 있었다.

이민욱.

그는 원래 사회부 소속 기자였다.

국장과 부장을 비롯해 이민욱에 대해 잘 아는 높은 사람들은 그에 대해 단 네 글자로 평을 내렸다.

‘꼴통 새끼’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데스크의 지침과 상반되는 기사를 올리기 일쑤였고, 수틀리면 위를 들이박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꼴통이라는 그의 별명이 꼭 나쁜 뜻으로만 불리는 것은 아니었다.

대한민국에서 월드컵이 열리던 해, 기자 생활을 시작한 그는 2006년 한 지방 대도시에서 벌어진 조직적인 부정선거를 최초로 밝혀내 이름값을 높였다.

뿌리가 깊은 비리였다.

세상에 사실이 공론화되면 목이 날아갈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당연히 수많은 회유와 가족까지 들먹이는 협박이 이민욱을 향했지만 타고난 강심장인 그는 펜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세상은 이 용감한 기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는 그런 기자였다.

소위 기자들의 최전방이라고 불리는 사회부는 그의 타고난 기질과 썩 잘 맞는 것이었다.

굵직한 사건이 터졌다 하면 담당 경찰서에서 며칠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경찰들 역시도 나이고하를 막론하고 그들을 ‘형님’이라고 부르며 넉살 좋게 구는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비록 고분고분한 맛은 없어도 날카로운 펜과 근성으로 무장한 그는 1진 기자로 모자람이 없었다.

그가 사회부에서 산업부로 소속을 옮기게 된 데는 상사의 탓이 컸다.

이민욱의 대학 선배이자, 사회부장이었던 상사는 산업부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서 그를 픽업했다.

“아, 형. 진짜. 안 간다고요. 나는 여기가 좋다니까.”

“인마, 나 따라와서 예쁜 것만 보면서 대가리 좀 식혀. 언제까지 뻗치기나 하고 있을래? 제수씨도 좀 생각해라. 그리고 여기 새 부장으로 정치부장이 올 거야. 너랑 상극이잖아. 꼴통 성깔에 어디 버티겠냐? 사표 쓰고 치킨집 차리고 싶어?”

여하튼 지금 그가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종이 위에는 한 남자의 사진과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한영수’

“선배님, 왜 그러세요?”

이민욱의 옆자리에 있던 후배가 씩씩대는 그를 향해 의자를 돌려 말을 걸었다.

“부장이 OEM 쓰라잖아.”

OEM은 청탁성 기사를 뜻하는 은어.

“이야, 부장님도 대단하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배님한테 OEM을 지시하고.”

“시팔. 다른 기자들한테 말하기 쪽팔리니까 나한테 던지기 하는 거지. 그놈의 학연 지긋지긋하다. 학교 다닐 때 쫓아다니면서 밥 몇 번 얻어먹은 게 죄지. 웬수야, 웬수.”

“그나저나 뭔데요, 이게?”

후배는 슬쩍 이민욱의 책상에 올려진 종이를 집어 들었다.

“BH 인베스트먼트.”

이민욱은 짧게 말했다.

경제부와 산업부 기자들에게 요즘 BH 인베스트먼트는 화제의 중심이었다.

국내에서 활동하기에는 지나치게 대단한 이력의 COO와 베일에 싸여있는 CEO.

고왕 건설의 위기에 극적으로 등장한 이들이 눈길을 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누군데요, 이게?”

“BH 대표이사래.”

“그래요? 와, 드디어 나도 실체를 한번 보네! 젊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얼굴 진짜 잘생겼네. 웬만한 연예인들보다 낫다. 그런데 뭐, 자기들 회사 소개라도 한번 해달래요?”

“아니. 그 반대야.”

“반대요?”

“그래. BH를 엎어보란다. 뭐 익명의 제보자가 우리한테만 긴히 소스를 줬단다. 이 친구가 얼마 전까지 평범한 회사원이었는데 갑자기 큰물에서 노는 게 수상하다는 거지. 뭐 사채 업자 출신으로 의심이 된다는데?”

“뭐··· 이 바닥에서 바지 세우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앨런 오닐이 외국인이다 보니 이름만 가져다 박아놓은 것 아니겠어요?”

“모르지 뭐. 그 친구 고아원에서 자란 모양이야. 그것까지 까보라는데, K 일보가 언제부터 타블로이드지가 된 거냐. 시팔 것.”

이민욱은 육두문자까지 내뱉으며 분개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후배가 갑자기 흐흐 낮게 웃었다.

“선배님, 와꾸 나오는데요. 윤일중 회장 병실에 드러누웠다고 하더니··· 아주 얕은 꾀를 부리네요. 그쪽에서 푸쉬가 들어온 모양이네.”

“아니야.”

이민욱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우리 부장 잘 아는데, 겨우 윤 회장 곤조에 청탁 들어줄 사람이 아니라고. 부장이 어찌나 나한테 강하게 말을 하던지. 나중에는 아예 애원하더라. 분명히 윤 회장보다 훨씬 더 윗선이야.”

“윤 회장, 저도 몇 번 만나봤는데. 실속은 하나도 없거든요. 실상 고왕 건설 저 모양 된 건 오너리스크라고 봐도 무방한데··· 그래서 어떻게 하시게요? 어쨌든 특종은 특종 맞네. 비밀의 인물에 대해 기삿거리 잡은 거니까.”

“몰라, 인마. 만약에 내가 기사 써도 데스크 승인 나기 전까지 너도 입 다물고 있어. 부장이 일부러 날 부른 걸 보면 대놓고 냄새 풍길 생각은 없는 거 같으니까.”

후배의 손에서 종이를 낚아채 이민욱은 책상 끄트머리로 던져버렸다.

‘손 안 움직이고 가만히 있으면 형이 딴 사람 시키든지 하겠지. 뭐.’

후배의 말처럼 캐보다 보면 뭔가 나올 것도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영 마음이 가지 않는 소스였다.

남의 출생의 비밀까지 깎아내리는 일은 이민욱에게는 아무런 흥미가 느껴지지 않는 재미없는 일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을 돌리고자 소일거리를 시작했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모니터에 눈을 고정한 채 손으로는 마우스 휠을 드르륵 내리기 시작했다.

화면 속 폴더에는 신문사 클라우드 서버에서 내려받은 최근 제보 영상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민욱은 사회부 시절부터 밑바닥 정보를 소중하게 여겼다.

그런 그에게 있어 시민들에게서 나오는 제보는 아주 요긴한 것이었다.

뭐, 그런 종류의 제보들은 ‘그랬다더라’ 수준의 썰이 대부분이었지만 가끔 대박이 터지는 경우가 있었다.

비록 지금 부서에선 크게 의미가 없었지만, 이민욱은 머리를 식히는 차원에서 여전히 일상에서 벌어지는 조금은 특별한 이야기들을 즐겨 찾곤 했다.

“표현 진짜 진부하네. 강남역 시민 영웅···”

그렇게 몇 개의 동영상을 돌려본 그는 마우스 커서를 한 동영상 파일 위로 올렸다.

사실 이민욱은 그냥 넘어갈까도 싶었다.

영웅이라는 단어가 기껏해야 오락의 소재가 되어버린 요즘에 지나치게 숭고한 제목이 오히려 거부감을 자아냈기 때문이었다.

이민욱은 턱을 한 손으로 괸 채 마우스를 두 번 클릭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동영상은 시작되었다.

뭉개진 음성들을 유심히 들어보니 철로에 사람이 한 명 떨어진 모양이었다.

안전문은 고장이라도 났는지 지하철이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전부 활짝 열려있었다.

“저런··· 강남역인가? 사망사고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지하철이 제때 선 모양이군.”

그때였다.

건장한 체격의 한 남자가 망설임 없이 철로로 훌쩍 뛰어들었다.

“허, 요즘 같은 시대에도 저런 의인이 있네.”

이민욱은 절로 감탄이 나왔다.

저 정도라면야 누구라도 저 이를 영웅이라고 부를 만하다.

잠시 뒤 남자는 철로에 떨어진 사람을 먼저 승강장 위로 올리고 자신도 훌쩍 위로 올라왔다.

지하철이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간발의 차이였다.

이민욱은 어느새 자기 손바닥에도 땀이 고인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그때.

“··· 어?”

남자의 얼굴이 잠시 클로즈업된 순간 이민욱은 키보드의 스페이스 바를 눌러 동영상을 정지시켰다.

아는 사람인 것처럼 낯이 익다.

그는 동영상을 초 단위로 돌려가며 남자의 얼굴이 가장 정확하게 나온 구간으로 영상을 돌렸다.

이민욱은 다급하게 책상 구석에 멀찍이 던져두었던 A4 용지를 집어 들었다.

그는 동영상 속 남자와 종이 속 사진을 대조해보았다.

“야, 명수야.”

“··· 예?”

“잠깐 이거 좀 봐봐.”

이민욱은 옆자리의 후배를 툭툭 쳐 불렀다.

“이거 같은 사람 맞지?”

“어··· 닮기는 한 거 같은데.”

“자세히 좀 보래두.”

“예. 맞는 거 같은데요? 이 동영상은 또 뭔데요?”

마침내 베테랑 기자의 입꼬리 한쪽이 씰룩 올라갔다.

“이야··· 이거 일이 재밌네?”

이민욱은 인터넷 창을 켜 무언가를 검색하더니, 지체없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감사합니다. 서울도시철도 강남역 사무실입니다.”

“예. 수고 많으십니다. 저는 K 일보 이민욱 기자라고 합니다.”

“··· 예? 어디시라고요?”

“K 일보입니다.”

“아··· K 일보··· 예, 예! 말씀하세요.”

졸리기라도 했는지 나른하던 역무원의 목소리가 이민욱의 신분을 알게 되자 바짝 군기가 들었다.

“실례지만 며칠 전 강남역 승강장에서 철로에 사람이 떨어진 사고가 있었죠?”

“··· 아, 그게···”

“혹시 사고 경위를 제가 좀 알 수 있을까요?”

잠시 망설이던 역무원이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예, 잠시 스크린도어가 고장이 났었습니다. 고장은 바로 저희가 인지를 해서 수리업체에 연락을 했었구요. 그런데 술에 취한 승객분이 문이 닫혀있는 줄 알고 몸을 기대신 모양이에요. 저희가 경고문도 전부 붙여놓고, 공익 요원들도 배치했었는데···”

역무원은 면피성 발언을 줄줄이 뱉어댔다.

혹시라도 기자가 과실을 캐물을까 겁이 났던 탓이었다.

“그러셨군요. 강남역에서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하셨네요. 기계가 고장이 나는 걸 예측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 역의 잘못이겠습니까. 굳이 따지자면 눈앞도 분간 못할 정도로 과음을 한 양반의 잘못이지. 제가 알기로는 지하철이나 기차 운행을 방해하면 벌금이 나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이고! 벌금은 고사하고 저희는 인명피해가 없었으니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민욱이 슬쩍 편을 들어주자 역무원은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제가 제보 영상을 하나 받았거든요. 그걸 보니 철로에 뛰어들어 사람을 구하신 분이 있던데. 저희가 미담 기사라도 하나 써볼까 합니다. ··· 혹시 그분의 인적 사항이 확인될까요?”

“아, 그분께서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셔서··· 다른 건 모르고 성함만 말씀해주시고 떠나셨거든요.”

“그래요? 혹시 그분 성함이.”

“그게, 저희도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에 함부로 말씀드리기가···”

“정히 그러시면 성 씨만이라도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예, 뭐··· 잠시만요. 어디 보자··· 한씨 성을 가지신 분이네요.”

‘... 맞구나. 한영수.’

가끔 믿지 못할 운명의 장난 같은 일이 벌어지고는 한다.

지금은 마치 언론의 신이 자기 등을 떠미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민욱이였다.

전화를 끊기 무섭게 이민욱은 으하하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선배님. 맞아요?”

역무원과 통화를 하는 동안 강남역 동영상을 돌려본 후배가 말했다.

이민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과 얼마 전에 고왕 건설이라는 큰 회사를 가지게 된 놈이 제 목숨을 내걸고 사람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이거 뭐 하는 새끼야. 골 때리네.”

‘어쩐지 유난히 쓰기가 싫더라.’

이민욱은 부장으로부터 건네받은 한영수의 프로필을 반으로 접어 찢어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후배가 입을 열었다.

“선배님, OEM 안 쓰시려고요?”

“아니지. 그 정도가 아니야. 나 말이야. 봄이 간 줄도 모르고 청춘은 잃었을지언정 인간성을 잃지 않았다. 너라면 죽을 걸 각오하고 사람 구하는 이와 꾀병으로 특급병실에 누워있는 사람 중에 누구한테 정이 가겠냐?”

어차피 자기가 시킨 대로 기사를 안 써도 회사는 이민욱을 대신해 누군가에게 그 일을 시킬 것이다.

그럴 바에는 아예 딴소리 못 하게 선빵을 쳐버려야겠다고 생각한 이민욱이었다.

“선배님. 쓰라는 거랑 정반대 기사를 쓰는데 그게 통과되겠어요?”

“인마. 나 어차피 꼴통인 거 다들 알잖아. 그리고 내보낼 수밖에 없을걸?”

이민욱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런 선행을 한 사람을 사채 업자니, 출신이 불분명하니 매도해봐. 그 역풍을 우리가 다 처맞는 건데. 아마 사이버렉카들이 신나서 아주 게거품을 물걸?”

키보드 위에서 이민욱의 손가락이 날듯이 움직였다.

마음에 드는 기삿거리를 찾았을 때 순식간에 타이틀을 뽑는 것은 이민욱의 장기였다.

커지는 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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