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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억을 상속받았다-111화 (111/200)

111.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이사회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요청에 따라 임시 주총이 열렸다.

주주들은 새로운 승자를 열렬히 환호했다.

우리의 비전은 주주들에게 감동을 줬고, 든든한 자본금에서 나오는 자신감은 그들을 안심시켰다.

하기야 윤일중 회장을 필두로 한 고왕 건설의 경영진들에게 지칠 대로 지친 주주들은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가 새로운 최대 주주로 모습을 보였대도 환영할 기세였다.

이종현 전무.

아니지, 이종현 사장의 취임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고왕 임직원 여러분. 이종현입니다. 대한민국의 대표 건설사인 고왕 건설의 사장에 취임하게 된 것을 크나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특히 고왕 건설은 70년대 중동 개발 건설에 참여하며 큰 업적을 이룬 바 있습니다. 저는 미력하나마 이 자리에 있는 동안 고왕 건설의 찬란했던 과거의 부활만을 고민하겠습니다. 취임 인사로 제가 앞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을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이종현 사장은 취임 인사로 내가 주문한 것처럼 해외 시장 개척의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다.

그의 앞으로의 행보에 든든한 지원군이 될 태상 건설 시절 동료들은 조만간 있을 조직개편 후 발령을 낼 생각이었다.

윤일중 회장과 기존의 경영진은 상석에 앉아 어색하게 웃거나, 혹은 굳은 표정으로 손뼉을 칠 뿐이었다.

취임식 이후 들뜨고 어수선한 분위기의 고왕 건설과는 별개로 BH 인베스트먼트는 연이어 불어오는 훈풍에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한 대표, 오늘 장도 참 예쁜 색깔로 마감했다, 그렇지?”

최화란은 휴대전화로 주식 차트를 띄워 내 얼굴 앞에 내밀었다.

만 이천 삼백 원까지 바닥을 찍었던 고왕 건설의 주가는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급격하게 V자 반등이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차트 위에서 주가는 의미 있는 움직임을 보였다.

언론은 BH 인베스트먼트에 대해서 처음에는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훌륭한 소방수가 있었다.

화려한 이력을 가진 우리의 COO 앨런은 언론 앞에 적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내 보였고, 그것이 불안을 잠재우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이윽고 바람 앞의 촛불이던 고왕 건설이 새로운 동력을 찾았다는 기대심리 속에 집을 나갔던 개미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연이은 주가 상승에 힘입어 오늘 장 마감 가격은 만 오천 이백 원.

자연스럽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분 역시도 가치가 상승하여, BH 인베스트먼트의 자본 규모는 제법 큰 폭으로 늘어나 있었다.

“왜요, 최 이사님이 투자 한 돈. 이제 그만 다시 내어드릴까요?”

“어머, 한 대표. 돈 귀신 최화란이를 뭐로 보는 거야? 벌써 황금알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라고?”

최화란은 짐짓 화라도 난다는 것처럼 연기를 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녀의 말은 전적으로 옳았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지금 주가보다 두 배, 아니 그 이상은 끌어올려야 할 것이다.

“그나저나 미스터 한, 이야기 들으셨지요? 윤일중 회장이 갑자기 쓰러졌다는 말.”

“예. 들었습니다.”

어제 일이었다.

자택에서 윤일중 회장은 갑자기 졸도해 병원에 급히 실려 갔다고 한다.

도의상 오늘 면회를 가볼까 했지만, 윤 회장의 가족은 나의 방문을 극구 거부했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당신네들 때문에 윤 회장이 이렇게 된 것인데 무슨 낯짝으로 여길 오냐는 분위기였다.

“참 웃겨. 하루가 멀다 하고 공기 좋은 곳에서 골프만 치던 양반이 갑자기 왜 쓰러졌대? 하여간 재벌들 말이야. 뭔 일 있으면 일단 병원에 가서 냅다 누워버리는 거, 지겹지도 않나?”

“··· 지겨울 정도로 해도 어쨌든 먹히니까 계속하는 거겠죠.”

윤 회장 측에서는 아직 공식적인 성명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관련해서 어떤 언론보도도 없었다.

하지만, 께름칙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실 일이 너무 수월하게 풀리긴 했습니다. 우리 쪽에서 이렇다 할 출혈도 없었구요.”

앨런이 나지막하게 말하다 아차 싶었는지 내 눈치를 보았다.

“물론, 미스터 한의 작품이 그만큼 훌륭했다는 말이지만요.”

나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지금으로선 병원에 실려 간 사람을 두고 이렇다, 저렇다 입방아에 올리는 건 도의상 할 짓은 못되니까··· 윤 회장에게 면회를 다녀온 고왕 건설의 측근들이 있을 거예요. 그들에게 사람을 붙여 속내를 좀 알아내 보도록 합시다.”

이견이 있을 리 없는 정론.

앨런과 최화란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손목을 들어 시계를 한번 보았다.

“저는 오늘 약속이 있어서 이만 들어가 볼게요.”

“뭐야, 고 변호사랑 데이트라도 하려고?”

최화란이 입술을 삐쭉 내밀며 말했다.

고윤아와 나의 관계야, 굳이 비밀로 할 것도 없었기에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나는 웃으며 최화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나도 어디서 남자라도 만나든지 해야지. 질투나 죽겠네.”

최화란은 괜히 너스레를 부렸다.

그러던 그녀의 눈이 문득 앨런을 향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 남자가 한 명 있네? 어때요, 미스터 오닐. 오늘 나랑 한잔할래요?”

“에··· 나요?”

재킷을 걸치고 나서면서 나는 그 모습이 재밌어 앨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웃었다.

“앨런, 조심해요. 최 이사님은 가시가 아주 많은 장미니까.”

***

개찰구 앞에 앉아 나를 기다리던 고윤아가 나를 발견하곤 환하게 웃었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달음에 내 곁으로 다가온 그녀.

고윤아는 까치발을 하고 키를 올려,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말하겠다는 양.

“오빠, 오셨습니까.”

아하하━

입에서 절로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놓칠 수 없는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윤아의 작고 따듯한 손을 낚아채었다.

“갈까?”

“예.”

여기는 강남역.

오늘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차도 있는데 굳이 지하철을 탈 이유가 있냐고 내가 묻자 고윤아는 이렇게 답했다.

“영수님과 서울의 밤거리를 걷고 싶습니다.”

목적지는 종로였다.

광장시장에 들러 저녁과 반주를 하고, 청계천을 걷는 것이 오늘의 코스.

“장학재단 일은 잘 처리되었어?”

“예. 할머님께서 생전에 시스템을 정말 잘 만들어두셨습니다. 제가 굳이 나설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 장학재단은 나에게 정말 소중한 유산인데··· 사실 자주 가봐야 하는데, 요즘에는 통 얼굴을 비추지 못했네.”

“바빴으니까요. 걱정하실 일 없게 조치하겠습니다.”

“참··· 여자친구에게 너무 많은 일을 맡기는걸··· 항상 고맙게 생각해.”

고윤아는 사랑스러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역할 하나는 싫습니다. 저는 더 많이 하고 싶습니다.”

아아, 내가 당신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직 봄은 저 멀리에 있어 날이 춥건만, 고윤아는 역시 내 마음의 난로였다.

그때였다.

“어어어! 저 사람!”

누군가 지하철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새된 소리를 내질렀다.

다급한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했다.

“사람이 떨어졌어요! 누가 도와주세요!”

“어떡해! 술 취했나 봐. 넘어져서 꼼짝도 못하네! 역무원 어딨어요!”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이어졌다.

지하철을 기다리던 이가 승강장 아래로 떨어진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스크린도어가 고장이 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안내판을 바라보았다.

지하철은 막 전 역을 출발한 참이었다.

삼분 내지는 사분.

그 안에 달리는 철마에 이 역 안에서 벌어진 일이 제때 전달될지 의문이었다.

혹은 전달이 된다고 해도 지하철이 제동을 할 수 있을지도.

생각을 하고 앉아있기에는 시간이 없다.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영웅이 되겠다는 생각 따위는 없었다.

다만 그냥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을 뿐이다.

그런데,

재빨리 철로 쪽으로 몸을 움직이려고 할 때 내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고윤아였다.

그녀는 내 옷소매를 잡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 괜찮아. 누구라도 나서서 구해야지.”

나는 그녀를 향해 한번 웃어 보이곤 살짝 힘을 주어 고윤아의 손을 떼어내었다.

사람들은 그저 “어떻게 해.”만을 외치고 있었을 뿐이었다.

자칫 자신의 목숨도 걸어야 하는 일.

누구도 쉽게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철로를 내려다보자 과연 중년의 남자가 자기 다리를 부여잡고 끙끙대고 있었다.

어서 일어나라는 사람들의 외침에도 그는 뻘밭의 망둥어처럼 몸을 꿈틀댈 뿐이었다.

나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승강장에서 철로로 몸을 날렸다.

“아저씨, 일어나봐요!”

남자의 몸에서는 곡주의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그와 몸을 밀착하자 코를 찌르는 냄새에 내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남자의 겨드랑이 사이에 두 팔을 끼고 그의 몸을 반쯤 들어 올렸다.

“··· 씨.”

남자의 몸무게는 70kg쯤 될까?

200kg이 넘는 쇳덩어리도 훌쩍 들어 올리는 나지만, 술에 취해 늘어진 사람의 몸은 그것보다 체감상 훨씬 더 무겁게 느껴졌다.

남자를 승강장 근처까지 끌다시피 데리고 온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를 플랫폼을 향해 들어 올렸다.

“누가 와서 좀 받아주세요!”

저 멀리서 어두운 터널이 밝아져 오고 있었다.

전조등을 빛내며 지하철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빨리 받으라며 목소리를 높이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얼어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술 취한 남자를 승강장 위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빠앙━

지하철이 경적을 울리며 역에 진입하기 전이었다.

간발의 차이로 나는 간신히 철로를 탈출할 수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쿵쾅 뛰었다.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무슨 호기로 여기에 뛰어들었는지 나조차도 모를 지경이었다.

술에 취한 남자는 아직도 승강장 바닥에서 몸을 못 가누고 있었지만, 큰 외상은 없어 보였다.

“와아━”

그때, 어느 누군가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그리고 그 동작은 금세 사람들에게 전염이 되었다.

어떤 이는 언제부터 찍었는지 휴대전화를 내 얼굴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의 환호에 머쓱해진 나는 몸을 일으켜 더러워진 옷을 손바닥으로 몇 번 털곤 고윤아부터 찾았다.

그녀의 모습을 나를 둘러싼 인파 속에서 찾을 수 없었다.

고윤아는 군중들 뒤에서 사색이 된 채 굳은 채로 서 있었다.

“진짜 대단하세요. 사람을 살리셨어요.”

“아··· 예. 죄송합니다. 지나가겠습니다.”

어떤 이가 건네는 찬사를 뒤로한 채, 나는 사람들을 헤치고 고윤아에게 다가갔다.

“윤아야. 많이 놀랐어?”

얼음장이 된 그녀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달래고자 나는 안아주려고 손을 내밀다가, 손바닥이 온통 검댕이 천지인 것을 보고 그 손을 거두었다.

“올라가서 잠깐 씻고 와야겠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래?”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음에도, 고윤아의 놀람은 진정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그래도 별일 없었으니까 다행이지? 큰일 날 뻔했어. 저 사람.”

“··· 다시는.”

고윤아의 눈에서 눈물이 투둑투둑 쏟아졌다.

마치 여름날의 소나기처럼.

보석과 같은 그 눈물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져 바닥의 색을 변하게 만들었다.

고윤아는 와락, 내 품에 안겼다.

“··· 다시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영수 님이 다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그래··· 알아. 윤아가 정말 많이 놀랐구나. 내가 미안해.”

저 멀리서 역무원들이 부리나케 뛰어오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선행의 나비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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