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10화 (110/200)

110. 태상인의 밤 (2)

“··· 형.”

두 형제는 서로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제수씨. 구정 때 해외 출장 중이어서 얼굴도 못 뵙고. 집안의 가장으로 면목이 없습니다.”

“아주버님, 별말씀을요. 워낙에 바쁘신 분인 걸 잘 알고 있는걸요.”

서정은과도 간단한 안부를 나눈 장은수의 눈이 이번에는 아래를 향했다.

그는 자기 엄마의 뒤에 작은 머리만 내밀고 있는 소미를 바라보았다.

“소미는 큰 아빠를 보고 인사 안 하네?”

장은수가 씩 웃으며 말했건만 그의 말을 들은 소미는 몸을 살짝 움찔했다.

“안녕··· 하세요. 큰아버지.”

어린아이들은 마음과 표정을 달리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법이다.

장은수를 어려워하는 소미의 마음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예전에 한영수의 손을 잡아끌며 같이 TV를 보자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소미의 태도가 어떻건 무슨 상관이랴.

장은수가 어린 조카로부터 느껴지는 거리감 따위에 관심을 가질 리가 만무했다.

그의 시선은 소미로부터 채 일 분도 머물지 않았다.

“그나저나 요즘 전기차 난리던데. 네가 좋아하는 그 오너 말이 참 많지? 주가도 박살 나고 말이야.”

어깨가 떡 벌어진 자기 동생을 향해 장은수가 입을 열었다.

“누구보다도 가장 가족을 끔찍하게 생각하시는 분이 얼굴 보기 무섭게 시비를 거는 거야?”

장은호는 아까 단상 위에서 장은수가 했던 연설을 꼬집었다.

“시비라기보다는 형제에 대한 걱정이지.”

“일단 난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니야. 그 양반이 하는 기행들도 이해할 수 없고. 다만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선두주자일 뿐이지. 언젠가는 넘어서야 할.”

“전기차 화재로 뉴스에서 난리던데, 태상 브랜드에서 그런 참사가 일어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소비자가 목숨 걸고 차를 타서야 되겠어.”

“배터리 열 폭주를 막기 위해, 일정 온도 이상 되면 전원을 차단하는 솔루션을 개발하고 있어, 전력이 끊겨도 비상탈출이 가능한 장치를 올해 중에 전기차 라인업에 탑재할 생각이고 또···”

장은호는 열을 내며 설명을 하다가 곧 입을 닫았다.

아무리 입 아프게 떠들어봐야 뭘 하겠는가.

어차피 장은수의 의도는 관심이 아닌 견제인 것을.

문득 장은호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들은 한 지붕 아래 두 회장의 대담을 흘낏대고 있었다.

하늘 아래 어찌 태양이 두 개랴.

과연 둘 중 어느 쪽이 마지막에 빛나게 될 것인가.

태상의 이름 아래 밥을 벌어먹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이 형제에게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어디 나도 형의 장단에 같이 좀 놀아줘 볼까.’

“오히려 나보다 형이 더 걱정인걸. 건설경기가 빙하기에 접어들었다는데. 사태가 보통이 아닌 게 고왕 건설, 무너지기 직전이라며?”

장은호의 말을 듣자, 장은수의 입꼬리 한쪽이 슬쩍 올라갔다.

“그렇지 않아도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판이 아주 우습게 돌아가던데? 네가 말한 그 회사. 주인이 바뀌었어. 그것도 너와 나, 둘 모두에게 인연이 각별한 놈이 그 자리에 올랐더군.”

“뭐? 무슨 소리야?”

장은호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기에 장은수에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 그 성씨 다른 놈 말이야.”

장은수는 목소리를 잔뜩 낮춰 말했다.

그의 음성에서는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던 때와는 전혀 다르게 어떤 음산함까지 느껴졌다.

‘··· 영수?’

장은호는 온몸에 털이라는 털이 모두 빳빳하게 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 형님. 태상 건설에서 퇴직한 사람들의 명단을 제게 좀 주시지요.

‘설마 그래서 나한테 그런 부탁을?’

대단한 녀석!

장은호는 무릎이라도 내리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호탕한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억지로 꾹꾹 눌러야 했다.

지금은 형의 앞이다.

한영수의 이야기는 위험하다.

장은호의 눈이 제일 먼저 소미를 향했다.

계속 말이 나온다면 혹시라도 한영수를 만난 적 있는 아이가 실수라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한영수와 자신의 관계는 철저히 비밀로 숨겨야 한다.

특히나 장은수 앞에서라면 더욱더.

그때, 서정은이 눈치 빠르게 행동했다.

“소미야. 우리 밥 먹을까? 저기 소미가 좋아하는 타이거 새우도 있네?”

서정은은 소미를 데리고 얼른 자리를 피했다.

장은호는 아내의 그런 세심함이 고마웠다.

“한영수, 그 친구라면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게 500억 남짓이잖아. 그 돈으로 고왕 정도 규모의 기업을 인수한다는 건 어림도 없을 텐데? 어디 사모펀드와 연합을 하기라도 했나?”

장은호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장은수에게 물었다.

“무슨 재주인지 몰라도 아버지와 친하게 지내던 쩐주를 구워삶은 모양이야. 그 재산을 모두 물려받았더군. 이쯤 되면 그 사생아 놈, 보통이 아니라는 건 인정을 해야겠어.”

‘글쎄. 그 녀석은 형이 생각하는 그 정도가 아닐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불과 일 년도 안 되었다.

비유하자면 그 시간 동안 한영수는 컴컴한 지하실에서 빌딩 꼭대기까지 올라간 셈이다.

장은호는 어쩌면 한영수가 자신이 판단한 것보다 더 대단한 걸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은 물론이요, 심지어 자신보다 더.

“아마 고윤아, 그년이 다리를 놔주었겠지.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거기에 빌붙더니, 이제는 사생아 새끼에게···’

‘그래서 형이 고윤아에게 어깃장을 놓았구나.’

자신을 찾아와 고윤아가 광월에서 쫓겨났다며 분한 모습을 보이던 한영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윤아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한영수를 차 여사에게 연결해준 것은 다름 아닌 장은호.

장은수는 그런 뒷이야기가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짐작 못 하고 있었다.

“아무리 돈이 있다고 해도 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장은호는 한영수가 어떻게 고왕 건설을 차지했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그래서 사건의 자초지종을 누구보다 빠릿하게 파악했을 장은수에게 은근슬쩍 말을 더 붙였다.

“뭐··· 고왕 건설의 윤일중 회장이야, 워낙에 덜떨어진 인물이니까. 알아서 뒷문을 활짝 열어줬겠지.”

그걸로 장은수의 말은 끝이였다.

이 경우라면 둘 중 하나다.

디테일을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말하기 싫거나.

“그래서, 형은 어쩔 생각이야?”

“어쩌냐고? 질문의 의도가 심히 궁금하군.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 아차.

장은호는 흥분한 나머지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깨달았다.

형의 셈속을 조금이라도 알아내 한영수에게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지나치게 앞섰던 것이다.

“··· 고왕 건설은 태상 건설의 경쟁업체기도 하잖아. 당연히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어?”

“경쟁업체?”

장은호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동생의 말을 듣고 비로소 장은수는 의심을 거두었다.

대신 그는 가소롭다는 듯이 비죽이 웃었다.

물론 그 오만함에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자본력과 사업의 규모 자체가 두 그룹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으니까.

“뭐, 합리적으로 대응해야지. 아마 고왕을 이리저리 찢어서 시장에 내놓지 않을까? 필요한 게 있다면 한번 사들여 볼까 해.”

‘한영수를 길들이겠다는 생각이구나.’

장은호는 장은수의 말속에 숨겨진 뜻을 바로 간파했다.

비록 사생아 새끼라고 불렀지만, 장은수가 처음으로 한영수를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 그런데 자신은 정말 다르다고 자신 할 수 있는가?

장은호는 스스로 한번 반문해보았다.

물론 한영수에게 형제의 정을 진하게 느끼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목적이 100% 순수하지 않은 것 역시 진실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장은호는 절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태상을 이끌어가는 쌍두마차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그리 긴히 하고 계십니까.”

“아, 사장님.”

계열사 사장 중 한 명이 다가와 형제에게 인사를 건넸고, 형제가 나누던 대화는 남들 앞에서 할 만한 종류가 아니었다.

장은수와 장은호는 언제 한영수를 입에 담았냐는 듯이 얼굴을 바꾸었다.

***

태상인의 밤 행사가 끝나고 돌아가는 차 안.

장은수는 안락한 뒷좌석 시트에 몸을 깊게 뉘었다.

사실 자기 동생 앞에서 무심한 듯이 말했지만, 황 실장으로부터 한영수의 일화를 듣고 그가 느낀 근본적인 감정은 불쾌함이었다.

최대 주주의 변경이 일종의 호재가 되어 고왕 건설의 주가는 정말 오랜만에 빨간불을 띄우고 있었다.

업계 전체로 따지면 결코 나쁠 리 없는 소식이었다.

장은수 역시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불쾌함은 순전히 감정상의 이유에 근거한 것이었다.

‘사생아 새끼가 감히 나의 무대에 발을 들여놔?’

조금 과장하자면 모욕을 당하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드는 장은수였다.

그런데 도대체 한영수라는 놈이 무슨 의도인지는 그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고작해야 헬스장이나 하나 차리고 조용히 살 줄 알았더니, 투자회사를 차리고 큰 기업을 하나 먹었다?

그렇다고 해서 제 핏줄을 내세워 태상에 접근하는 것도 아니었다.

의도를 내보이지 않는 상대에게서는 욕망을 알 수 없다.

욕망을 모르면 상대에게 목줄을 채우기가 쉽지 않다.

장은수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한영수라는 이름에서 느끼는 감정에는 불안함도 섞여 있음을.

장은수는 슈트 안쪽을 뒤져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누군가의 전화번호를 찾곤, 그는 통화 아이콘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회장님. 장은수입니다.”

“아이고, 장 회장님.”

전화의 상대방은 다름 아닌 윤일중이었다.

통화연결음이 채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윤일중은 장은수의 전화를 받았다.

윤일중의 목소리는 거의 감격에 차 있는 수준이었다.

자신이 나가리가 된 지금, 무려 태상의 장은수가 먼저 전화를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시냐는 말씀은 차마 못 드리겠네요. 소식은 들었습니다.”

장은수의 말에 윤일중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내가 그것 때문에 요즘 밤잠도 못 이뤄. 사람들이 이 윤일중이를 얼마나 우습게 생각할지···”

“권토중래하셔야지요. 윤 회장님, 저력이 있으시잖아요.”

“그래야지··· 있잖아, 장 회장.”

윤일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혹시 뭔가 판을 뒤집을 방법이 없을까?”

그걸 장은수에게 물어보다니 답답한 심정이야 이해는 간다만, 윤일중은 역시 한심한 사람이었다.

“글쎄요. 제가 속속들이 사정을 아는 것은 아니니 뭐라 드릴 말씀이 있을까요.”

“그러지 말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 회장이라면 뭔가 묘안이 있으시겠지.”

“원론적인 말씀밖에 더 드리겠습니까? 사재라도 헐어서 다시 지분을 되찾으셔야지요.”

“그게···”

윤일중 회장은 목소리를 낮췄다.

“실은 내가 지분을 할인해서 넘겼어. 그런데 지금 우리 회사의 주가가 오르지 않았는가? 그래서 내가 양도할 때와는 갭이 더 커져 버려서···”

이런 등신 같은 인간!

장은수는 속으로 조소를 금치 못했다.

“군자금이 부족하시다는 말씀이군요. 하기야, 회장님이 지분 싸움을 시작하면 저쪽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때였다.

문뜩 장은수의 머릿속에 한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회장님, 그럼 이러시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태상 금융 쪽에 힘을 좀 써보겠습니다. 급한 대로 좀 빌려 쓰시지요.”

“정말인가?”

윤일중은 가뭄 끝에 단비라도 내린 듯 펄쩍 뛰었다.

“헌데, 요즘 장 회장도 현금 확보하느라 정신이 없을 텐데···”

“과부 사정 홀아비가 안다고, 어려울 때 서로 도와야지요.”

“고마우이···”

“다만···”

장은수는 짜게 웃었다.

“거액이 오갈 테니 담보는 있어야지요. 우선 윤 회장님이 아직 가지고 계신 고왕 건설의 지분을 담보로 잡는 것은 어떻습니까?”

“지분···?”

윤일중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지분 이야기만 나와도 예민할 수밖에 없는 그다.

“소나기만 피하면 다시 좋은 날 오지 않겠습니까? 좋은 날 오면 천천히 갚으시면 되지요. 지금은 방법 따지지 말고 회장님의 자리를 찾는 것이 최우선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그래···”

“그리고 하나 더요.”

“하나 더?”

“일단 병원에 드러누우시죠.”

“병원은 왜?”

‘답답한 양반 같으니라고.’

일일이 하나하나 다 설명을 해줘야 하는가.

장은수는 마음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그 BH 인베스트먼트라는 작자들을 악당으로 언론 몰이하시죠. 회장님은 충격을 받고 쓰러진 선량한 경영자가 되시는 거고요.”

“그럼 사람들이 나를 너무 나약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회장님. 인간들이란 말입니다. 누구보다도 승자 옆에 서고 싶어 하면서도 겉으로는 약자한테 동정표를 보내기 마련이에요. 그러면 보잘것없는 자기가 조금이라도 좋은 인간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요.”

“그래. 그건 장 회장 말이 백번 맞지.”

“아무렴요. 저도 따로 슬쩍 말 좀 흘려보겠습니다.”

“고마우이! 정말 고마워!”

“예. 돈 문제는 한번 생각해보고 언제든 편하게 연락해주시지요.”

사담을 얼마간 더 나눈 뒤에 장은수는 윤 회장과 통화를 끊었다.

휴대전화를 뒷좌석 빈자리에 던지듯 내려놓은 장은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처음 울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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