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태상인의 밤 (1)
태상 그룹의 속해있는 최상위 호텔 브랜드인 더 코지.
특히나 전국의 명소에 퍼져있는 지점 중에서 서울점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특급 호텔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세계적인 VIP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면 따질 것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 숙소로 이용되는 곳.
그리고 서울 코지호텔 내부의 시저 홀.
이곳의 명칭의 어원을 잠시 밝히자면 장영복 회장이 존경하던 역사 인물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 이름을 빌려온 것이 무색하지 않게 웅장함을 자랑하는 이곳은 800명에 가까운 인원이 수용가능한 규모
그 위상에 걸맞게 이곳의 대관료는 어마무시했으며, 재벌가의 자제들과 이름값 높은 연예인들의 결혼식 장소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혹자는 이곳을 웨딩업계의 끝판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오늘의 시저 홀은 격식 있는 옷차림을 한 점잖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태상 그룹의 연례 행사이자 올해의 첫 모임인 ‘태상인의 밤’.
그것이 열리는 날이었다.
태상인의 밤은 계열사 사장들과 주요 임직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을 초대하는 행사였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진 홀과 세상에서 맛있다는 산해진미는 모두 모아놓은 것 같은 사이드보드.
그리고, 화기애애한 얼굴로 서로 덕담을 나누는 사람들로 행사는 이제 막 사교적인 분위기가 모락모락 무르익고 있었다.
당연히, 이 자리에는 장영복의 삼 남매도 참석해있었다.
이들 중 장은수는 상석이라고 할 만한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는 황 실장으로부터 무언가 은밀한 보고를 전해 듣고 있던 참이었다.
황 실장은 허리를 숙여 손을 장은수의 귀에 댄 채 입을 가리고 있었다.
“고왕 건설 ···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영수···”
홀 안에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담화에 묻혀 황 실장의 말을 정확하게 전해 들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장은수 뿐이었다.
보고가 끝나자 장은수의 표정이 복잡미묘해졌다.
가늘게 뜬 눈에서는 날카로운 안광이 쏟아졌고, 한쪽 입술만 삐죽하게 올라갔다.
그 외에 특이하다 싶은 반응은 없었다.
황 실장에게 따로 무언갈 지시하지도 않았다.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그는 황 실장에게 짧게 몇 마디만 하고 손짓으로 황 실장을 물러내었다.
“안녕하세요!”
단상 위에서 좌중을 내려다보던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다양한 방송에서 메인 MC를 두루 섭렵했던 유명 인사였으며, 진중한 진행으로 사람들의 호평을 받는 방송인이었다.
“오늘 이 자리를 빛내기 위해 모여주신 태상 가족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우선 인사부터 드리겠습니다. 저는 오늘 사회를 맡은 서용하라고 합니다.”
사회자는 단상에서 두 발짝 정도 걸어 나와 청중들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사담을 하나 드리자면 저 역시 여기 시저 홀에서 결혼식을 올렸었습니다. 이렇게 다시 오게 되니 감회가 무척이나 새롭습니다. 그때 식장에 들어가지 말았어야 했는데요···”
사회자가 짐짓 울상을 지으며 능청을 부리자 사람들은 일제히 손뼉을 치며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아! 지금 뒷말은 못 들은 걸로 부탁드립니다. 저는 제 아내를 정말 사랑합니다. 정말로요. 자, 제 행복한 결혼 생활에 관한 이야기는 기회가 있으면 따로 해드리는 것으로 하고··· 단상 위로 귀한 분을 모시겠습니다.”
잔뜩 멋을 부린 손동작으로 사회자는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손은 장은수를 향하고 있었다.
“태상 건설의 장은수 회장님이십니다.”
장은수의 이름이 호명되기 무섭게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지는 열렬한 박수.
마치 레드카펫을 밟고 시상식에 입장하는 무비스타처럼 장은수는 사방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며 당당한 걸음으로 단상을 향했다.
“존경하는 태상의 가족 여러분. 장은수입니다.”
박수 소리는 장은수가 마이크로 목소리를 내고 나서야 비로소 잦아들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일입니다. 그러니까 한 8살쯤일까요?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 태상인의 밤 말입니다. 신년식이라는 건 새해의 첫째 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2월이 한참 지나서 하는가 말입니다.”
사람들은 조용히 장은수의 입을 바라보았다.
“태상에는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들만 모인다고 들었는데, 어린 나이에 혹시 이 사람들이 사실은 바보들이 아닐까 속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아하하하━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처럼 또 한 번 높고, 즐거운 웃음소리가 터졌다.
하나로 모인 사람들의 목소리는 아까 사회자의 익살에 나왔던 그것보다 훨씬 더 큰 소리였고, 높디높은 시저 홀의 천장까지 울려 퍼졌다.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 선친의 생신이 딱 이맘때쯤이었더군요.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신년의 시기조차도 바꿔버릴 수 있는 위엄을 가지신 분이었죠.”
장은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타계하는 그 해까지도 장영복 회장은 이 자리에 섰었다.
드디어, 마침내.
장은수 그가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이었다.
그것의 상징적인 의미야 두 번 말해 입만 아플 것이다.
“당연히 이 자리에 오늘도 아버지가 계셨어야 하는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자리를 빛내주고 있는 저의 형제, 장은호 회장과 장은우 사장에게도 박수를 한 번씩 보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짝짝짝━
더 말할 나위 없이 매끄러운 진행이었다.
장은호는 손을 들어, 장은우는 가슴 위쪽에 손을 얹고 몸을 살짝 숙이는 것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박수에 화답했다.
“여러분, 모두가 아시다시피 태상 그룹은 커다란 아픔을 겪었습니다. 다시는 없을 위대한 선장을 잃었습니다. 누구도 감히 선친의 자리를 메울 수 없다는 생각에 유지를 이어받은 저 역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슬픔에 잠겨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태상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글로벌 경제 침체 속에서도 우리 그룹은 놀라운 업적들을 이뤄냈습니다···”
장은수는 진중한 얼굴로 태상 기업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서 열띤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더 신이 났군. 완전히 작두를 탔어.’
장은호는 자신이 형이 아버지 이야기로 서두를 꺼낸 것에 대해 굉장히 영리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고인에 대한 추억과 더불어 사람들은 장은수와 장영복 회장을 겹쳐서 보게 될 테니까.
장은호는 그렇게 샴페인 잔을 기울이며 자기보다 높은 곳에 서 있는 형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장은수의 연설을 경청하고 있다는 걸 표나게 티를 내고 싶어 안달인 것 같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장은수의 작은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몸을 단상을 향해 기울이고 있었으며, 무엇을 공감한다는 것인지 고개가 떨어져라 크게 끄덕이고 있었다.
“참 대단한 웅변가야. 그렇지? 사석에서는 말도 별로 없는 사람이 사람들 앞에만 서면 180도 변한단 말이야.”
장은호가 묵묵히 사람들과 장은수를 응시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장은호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장은호의 얼굴에 반가움이 잘 익은 홍시처럼 내걸렸다.
“··· 외삼촌!”
“잘 지냈지? 오랜만이구나.”
외삼촌이라고 불린 그이는, 태상 본사 미래기획본부장 박용선이었다.
불린 호칭에서 알 수 있듯이 박용선은 오래전 고인이 된 장 씨 남매 어머니의 친동생이었다.
장영복 회장은 친족과 인척을 가리지 않고 주변에 자신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두지 않았다.
특별한 관계에 있는 자들은 특별한 것에 욕심을 내기 마련이고 그런 야망은 경영을 어지럽힌다는 지극히 장영복다운 논리 때문이었다.
그 비정함을 피해 갈 수 있었던 유이한 예외는 장씨 성을 물려받은 자신의 자식들과 매제인 박용선뿐이었다.
박용선은 장영복 회장의 속내를 말하지 않아도 읽어내는 영민함을 갖추고 있었으며, 우두머리보다는 그늘 속의 참모를 스스로 자처하는 자였다.
장 회장은 생전에 그런 그를 많이 아꼈다.
가진 일머리에 훌륭한데, 욕심은 내지 않는 박용선이야말로 장영복 회장의 입맛에 딱 맞는 인사였다.
사실 장은호야 미국 생활이 워낙 길었으니 성장하면서 박용선과 인연의 깊이는 원체 얕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은호가 그룹 본사에 입사하면서 둘은 일적으로 자주 마주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서로 간에 비슷한 뜻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삼촌과 조카로서의 정을 통하게 된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박용선은 입장상 대놓고 지지를 하지 못할 뿐이지, 마음속으로 장은호를 누구보다 응원하고 있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래. 질부는? 얼굴이 안 보이는데?”
박용선은 먼저 장은호의 아내부터 찾았다.
“다른 건 몰라도 태상인의 밤은 꼭 참석해야지요. 소미가 화장실이 가고 싶다고 해서 데리고 나갔어요.”
“소미가 지금 몇 살이지? 다섯 살이던가?”
“일곱 살이요.”
“허허, 벌써 그렇게 되었단 말이야? 고 아이, 외탁했어. 눈이며 코며 누님을 쏙 빼닮았는데···”
장은호는 박용선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은호야. 여기가 남한이냐, 이북이냐.”
“··· 예?”
“저들을 봐.”
박용선은 턱 끝을 움직여 여전히 장은수의 말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이들을 가리켰다.
“다들 은수를 위대한 수령님 대하듯 보고 있잖니.”
장은호는 외삼촌의 말이 재밌어 쿡 웃었다.
하지만 정작 유쾌한 발언의 장본인인 박용선의 얼굴은 참으로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회장님께서는 그룹의 사업을 전자와 자동차 위주로 재편하려고 하셨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 말이지. 건설업이 우리 회사에 상징하는 바가 크긴 하지만 이제 성장동력이 수명을 다했다고 여기셨어.”
박용선의 말에 장은호의 얼굴도 자연히 굳어졌다.
뼈가 있는 말이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장영복 회장이 좀 더 살아있었다면 지금 장은수와 장은호의 위치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외삼촌.”
장은호는 나지막하게 박용선을 불렀다.
“저 아직 포기 안 했습니다.”
흠━
박용선은 나지막하게 한숨 소리를 내었다.
“살아보니 사람들 인심이라는 것이 그래. 깃털처럼 가벼워 보여도 의외로 뒤집기가 힘든 게 그것이다. 더군다나 너도 알겠지만, 은수는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야. 외롭고 어려운 싸움이겠구나.”
“··· 외삼촌은 그 사람들의 인심과 다르다고 믿어도 되겠습니까.”
가뜩이나 중저음인 장은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게 깔렸다.
“은호야.”
박용선은 장은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나는 누가 되었건 새로운 총수가 나오게 되면 바로 사표를 낼 생각이다.”
“··· 예?”
총수 자리가 비어있는 지금, 그룹 본사에서는 박용선이 실질적으로 그 자리의 대행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비록 사장단의 일원은 아니더라도 박용선 역시 태상의 실력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그런 그가 뜻하지 않은 자리에서 갑작스럽게 은퇴 선언을 한 것이다.
“나는 네 아버지의 사람이야.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 나는 물러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장은호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짙게 묻어났다.
박용선은 자신의 편이 되어줄 몇 없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
“녀석··· 표정 풀어라. 퇴직을 결심했다는 건 지금 은수의 칼춤이 두렵지 않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외삼촌은 조카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장은호가 어찌 그 눈빛의 의미를 모를까.
두 사내는 묵언으로 서로의 의사를 교환했다.
짝짝짝━
그때, 또다시 사람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장은수의 연설이 막 끝난 참이었다.
“수령님께서 내려오시네. 나는 이만 가보마. 이따가 또 이야기 하자꾸나.”
“예. 제가 외삼촌 자리로 가겠습니다.”
박용선은 장은호를 향해 따듯하게 웃어 보이곤 등을 돌려 그의 자리로 향했다.
“아빠!”
박용선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미가 엄마와 손을 잡고 나타났다.
하얀 드레스에 빨간 구두를 신은 소미는 마치 요정 같았다.
앙증맞은 소미의 모습을 보자 장은호는 절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장은호는 외삼촌과 나눈 대화를 잠시 의식 뒤로 미루고 굵은 팔로 단박에 자신 곁에 다가온 소미를 앞으로 들쳐 안았다.
“여보, 지금 보는 눈도 많은데.”
장은호의 아내 서정은은 주변을 살피더니 장은호에게 작게 말했다.
아무리 가족 모임이라도 장은호는 현재 태상의 양웅(兩雄) 중 하나.
위신을 지키는 모습을 보이라는 아내의 조언이었다.
“그러니까 소미를 더 높게 들어야지. 우리 예쁜 딸 다들 더 잘 보라고.”
“아빠는 소미가 예뻐?”
“그럼. 세상에서 소미가 제일 예쁘지.”
소미는 까르르 웃으며 짧은 팔을 뻗어 제 아빠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때였다.
작고 둥근 소미의 머리 뒤로 장은호의 눈에 누군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이 행복한 부녀를 향해 날카로운 눈으로 걸어오는 남자.
그는 방금 성공적인 연설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온 장은수였다.
태상인의 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