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08화 (108/200)

107. 타이슨, 그리고 호날두와 메시

이사회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회의실의 공기는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끊어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자리의 누구도 여기서 더 줄을 잡아당길 용기 있는 사람은 없었다.

고왕 건설에 전할 말은 모두 전했다.

원하는 것도 일부 얻어냈으니, 완벽한 만족까지는 아니더라도 큰 성과를 보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

완벽한 만족이라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아쉬운 것을 조금 남겨둬야 다음도 있는 것이다.

사실 내 예상보다 훨씬 수월한 자리였다.

진흙탕 개싸움을 각오하고 이 자리에 온 나다.

하지만 바짓가랑이만 좀 젖었을 뿐, 얼굴에는 오물이 튀지 않았다.

고왕 건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만큼이나 무력했다.

애들 싸움에 타이슨이 등장한 격이랄까.

저들이야 모르겠지만 나는 날카롭게 벼린 칼을 한 자루 품고 이사회에 참석했다.

저들이 법전 어느 귀퉁이에 있는 조문 몇 줄까지 들먹이며 완강히 저항하면, 외부 감사팀을 고용해 회사의 뒷구멍까지 탈탈 털 생각이었다.

세상에 털어서 먼지 하나 나오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데 건설업계야 오죽할까.

작은 부정의 증거라도 나오는 즉시 날이 선 칼로 목을 칠 생각이었다.

오늘 그 칼은 칼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피비린내 없이 입성에 성공했으니 그 역시도 나름 다행이랄까.

제일 먼저 자리를 비운 것은 고왕 건설 측 사람들이었다.

윤 회장 부자는 인사도 없었다.

그들은 집행위원이 이사회의 폐회를 선언하기가 무섭게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차마 축하드린다는 말씀은 못 드리겠군요. 제 입장이 그렇습니다.”

그나마 악수라도 권하며 사람 구실을 한 것은 이재석 부사장.

나는 손을 맞잡은 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고왕 건설의 임원진 중에서 가장 계산이 빨랐던 자다.

그는 대세가 기울은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지만, 어느 쪽의 편에도 서려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지.

이재석이 윤 회장의 사람이란 것을 생각하면 중립을 지키려는 것 자체가 이미 마음의 추가 기울기 시작했다는 뜻이 아닐까?

단언은 어렵다.

오늘 이사회에서 유일하게 나를 견제하는 데 성공했던 사람이니.

이재석은 쥐었던 내 손을 놓고 등을 돌려 뚜벅뚜벅 회의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마지막까지 회의장 안에 남은 것은 나와 구동일, 그리고 연세 탓에 동작이 느릴 수밖에 없는 황 노인이었다.

나는 황 노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어르신, 아까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노인의 걸음은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등에 짊어져 있기라도 한 듯 아주 느렸다.

그리고 그 걸음에 내 속도를 맞추다 보니 우리에게는 잠시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오해하시는구먼.”

황 노인은 내 말을 단박에 부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기 팔을 붙잡아주고 있는 모질게 내 손을 뿌리치지도 않았다.

“어르신이 보시기에 제가 이뻐 보일 리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이 사람아. 난 자네를 도운 것이 아니래도. 윤일중이, 저 어리석은 녀석을 살리고 싶었을 뿐이야.”

노인이 한숨을 뱉었다.

그 한숨은 너무나 연약하고 힘이 없는 것이었다.

의외랄까, 황 노인이 이사회에서 내게 보여준 모습은 나이를 잊은 불같은 기세였다.

나마저도 그의 노익장에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는 회의장에서 모든 힘을 쏟은 듯 한없이 쪼그라들어 있었다.

“아마 일중이 저놈.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면 분명히 회사를 다 말아먹었겠지. 몰락한 회장을 검사 양반들이 가만히 두겠어? 분명히 감옥소를 가게 될 거야. 설령 어떻게 그걸 피한대도 죽을 때까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되겠지. ··· 그러면 내가 저승에 가서 도저히 왕식이를 볼 낯이 없어.”

“왕식···이요?”

“이 회사의 창업자 말이야. 일중이 애비, 윤왕식이. 내 둘도 없는 벗.”

고왕 건설의 창업자 윤왕식의 이름이야 내가 어찌 모를까.

하지만 왕식이라는 친근한 호칭에서 이미 고인이 된 선대가 쉽게 연상되지 않았다.

“선대와 어르신께서 사이가 막역하셨나 봅니다.”

“전쟁통에 가족을 모두 잃고 피를 나눈 동기처럼 서로에게 의지했지. 자네, 그걸 아는가? 이 회사, 맨바닥에서 사람 다섯으로 시작했어. 중간에 갈라서긴 했지만 나 역시 그 다섯 중의 하나였고··· 그런데 그 작던 회사가 이렇게까지 큰 것이야···”

“그러셨군요. 그건 제가 몰랐습니다.”

뭔가 사연이 있겠거니 싶었다.

그랬구나.

황 노인은 고왕의 첫 시작을 함께 한 창립 멤버였구나.

노인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혼자서도 잘 걸을 수 있다는 듯 팔을 틀어 내 손을 뿌리쳤다.

등이 굽어 내 가슴팍까지 오지 않는 고개를 들고, 황 노인은 허연 수염 안의 입을 열었다.

“이 회사를 망치지 않겠다고 약속하게. 내가 살아봐야 얼마를 더 살겠는가. 만약 내가 돈놀이 장사꾼이 회사를 먹어 치우는 데 조금이라도 공헌한 게 된다면 죽어서도 편히 눈을 못 감지. 귀신이 되어서도 자네를 쫓아다닐 거야. 알겠는가?”

나는 물끄러미 황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 속에서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열의가 느껴졌다.

아무것도 없는 흙바닥에서 몸을 구르던 그의 청춘이.

“··· 예. 어르신. 약속드리겠습니다.”

***

“앨런. 계획대로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미스터 한! 해낼 줄 알았습니다. You're a great captain.“

돌아가는 차 안.

차에 올라타기 무섭게 제일 먼저 앨런에게 전화를 걸었다.

만약 앨런이 없었다면 나의 설계에는 틀림없이 허술함이 있었으리라.

상정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대비해준 앨런 덕에 구멍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나를 은인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돈으로 그를 샀다면 앨런 역시 이만큼 정력을 쏟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러닝메이트는 아주 조심스럽게 일에 대해서 물었다.

긍정적인 대답을 듣고서야 그의 목소리가 비로소 밝아졌다.

“훌륭합니다. 정말 대단해요! 결국에 다윗이 골리앗을 잡았군요. 이제 그들은 우리가 물고 빨라면 시키는 대로 다 해야 할 겁니다.”

“저런, 표현이 좀 그런데요?”

“월가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이것보다 더 저속한 말을 합니다. 역시 한국은 그··· 동방? 예의의 나라?”

“동방예의지국요.”

“예. 맞습니다. 동방예의지국.”

··· 뭐, 우리도 하고자 하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만큼 풍부한 표현을 할 수 있지만.

“미스터 한, 분위기가 견디기 힘들었지요? 아무리 비정해지려고 해도 무언가를 뺏는다는 건 마음 불편한 일입니다. 그쪽에서도 험악하게 나왔을 거고요.”

“견딜 만했습니다. 겁먹을 정도는 아니었구요.”

“역시 제가 함께 갈 걸 그랬습니다.”

“아니요. 앨런과 윤 회장의 지금 관계를 생각하면··· 저야 당연히 든든했겠지만, 오히려 대화는 더 어려웠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사무실로 돌아오십니까?”

“예. 지금 운전 중이에요.”

“Okay. 모두 모여 있습니다. 오늘만큼은 기분을 내도 좋겠지요? 손이 심심해서 파티 준비를 미리 끝내놓았습니다.”

앨런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결과도 듣기 전에 파티 준비라니요. 만약 일이 꼬였으면 어떡하려고 했습니까.”

“미스터 한, 제가 숫자의 승부사인 거 알고 있죠?”

“알고 있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치프가 실패하고 돌아올 확률은 제로라고.”

앨런은 껄껄 웃었다.

“그래요. 한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구동일은 내 옆자리, 조수석에 타고 있었다.

나와 앨런이 통화를 하는 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그는 전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입을 열었다.

“한 대표, 혹시 나 음악 좀 틀어도 돼?”

“둘이 있는데 무슨 한 대표야.”

“아무튼, 그래도 돼?”

“안될 거 뭐 있냐. 뭐 좋은 노래라도 있어?”

흐흐━

구동일은 음흉하게 웃더니 내 차에 자기 스마트폰을 연결했다.

쿵━ 쿵━ 쿵━ 쿵━

구동일의 조작에 따라 스피커에서 묵직한 베이스의 클럽 음악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야?!”

불현듯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큰 소리로 고함을 내질렀다.

“갑자기 왜 그래?”

“왜 그러긴. 드디어 해낸 거잖아! 어떻게 신이 나지 않을 수가 있어.”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구동일의 모습이 밉지 않다.

돌이켜보면 그와의 만남도 나에겐 소중한 기회 중의 하나였다.

“야, 영수야. 내가 살면서 재밌다는 거. 어지간한 건 다 해봤거든? 그런데 아까처럼 짜릿했던 순간은 없었던 것 같아. 넌 진짜 대단해. 한영수, 너는 존나게 대단한 놈이야!”

“너도 정말 잘해줬어. 네 말이 분위기를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니까.”

“에이··· 나야, 뭐 꿔다놓은 보릿자루였지.”

“아니야. 나도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고. 네가 윤 회장에게 제대로 카운터펀치를 제대로 먹인 거야.”

“··· 정말?”

선생님의 칭찬을 고대하는 학생처럼 눈을 빛내는 구동일을 향해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 저희 아버지는 승자의 편에 설 것입니다.”

크━

구동일은 그 순간을 음미해보고 싶다는 듯, 자기가 했던 말을 다시 뱉었다.

자화자찬하는 추임새는 덤.

평생을 아버지 밑에서 한량처럼 살아온 녀석의 역사에는 굵직한 성취가 없었을 것이다.

구동일은 큰일을 하는데 자신이 이바지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한 것 같았다.

“그런데, 나 뭐 좀 물어봐도 돼?”

“뭔데?”

“왜 윤일중 회장, 그 자리에 그대로 앉혀놨어?”

사실 그건 나와 앨런이 끝까지 고민했던 일이었다.

살려서 쓰기에는 영양가는 없는데 회사에 영향력은 너무 큰 인물이다.

그래도 그는 대를 이어 오랜 시간 동안 회사의 주인이었으며, 아직 엄연히 20%가 넘는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최대 주주가 되면서 회사주까지 차지한 우리가 결정적인 고지에 오른 것은 맞지만, 자칫 함부로 내치려고 하다가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마음이야 남은 것을 모두 내놓고 나가게 만들고 싶다.

··· 당분간은 상황을 지켜보면서 명분을 찾아야겠지.

방심하지 않고 예의주시하면 분명히 파동이 한 번 더 올 것이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했어. 살길 하나쯤 열어주지 않으면 저쪽에서도 죽자고 덤빌 수밖에 없지 않겠어? 그러면 우리도 틀림없이 상처를 입게 되겠지.”

구동일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다시 음악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한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앉은 채로 몸을 흔들어댔다.

그래. 오늘은 더 생각하지 말자.

신부님이 자주 하시는 말처럼 오늘 하루쯤은 느슨해져도 하느님이 눈감아 주시겠지.

“동일아.”

“응?”

“너랑 내가 한 일이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 왜, 내가 혼자 너무 들떴어? 야,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다 호날두, 메시가 되냐. 조연도 있는 거지.”

구동일은 머쓱함과 섭섭함이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아니, 오늘 하루쯤은 똑같이 즐겨보자는 소리야.”

이야━!

나는 구동일이 아까 그랬던 것처럼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어설프게나마 구동일의 몸동작을 따라 들썩거렸다.

“아하하하━”

구동일은 그 모습이 웃겨 죽겠다는 듯 배꼽을 잡았다.

한참을 웃던 그는 나에게 질 수 없다는 듯 음악에 맞춰 현란한 손동작을 보여주었다.

육중한 지바겐의 차체가 들썩거렸다.

아마 도로 위의 다른 운전자가 보았다면 정신 나간 놈들 두 명이 타고 있다고 생각했으리라.

태상인의 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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