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07화 (107/200)

107. 이사회 (3)

“이건··· 파킹이잖아. 지분 위장이라고!”

윤덕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두 허리에 양팔을 댄 윤 회장의 첫째아들은 입에서 침까지 튀기며 격앙된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우호 지분 확보라고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너희들은 이제 나한테 먹힌 거야.

사악한 말을 입에 담고 싶은 욕망을 누르며 나는 점잖게 대답했다.

“지분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법에 따라 충실히 공시했습니다. 회장님 일가로부터 양도받은 지분 역시 마찬가지구요. 그리고 오해를 막기 위해 말하자면··· 그래, 이건 구 이사가 말해주겠어?”

“··· 응?”

“구 회장님이 윤 회장님께 전하라고 한 말씀 말이야.”

“아아···”

구동일은 큼큼, 소리를 내며 목청을 다듬었다.

자신에게 맡겨진 것이 그 어떤 작은 역할일지라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듯.

“아버지께서는 윤 회장님께 이렇게 전달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은 승자의 편에 서겠다고. 내 돈을 불려줄 수 있는 사람과 같이 가는 것이 당연하니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어요.”

“이이···”

윤 회장은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잡고 뒤로 쓰러질 것 같았다.

“난 인정 못 해! 이봐 부사장, 이거 문제 있는 거 맞지? 그렇지?”

“회장님께서 원하신다면 소송을 걸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재석은 자신없이 말끝을 흐렸다.

누가들어도 그런 쪽으로 큰 기대를 걸 수 없다는 뉘앙스였다.

“언제부터 뒤에서 이런 짓거리를 꾸민 거야.”

윤일중 회장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나를 씹어먹고 싶다는 기세였다.

사람은 극한 상황이 되면 제 본성이 나오기 마련이다.

드디어 사람 좋은 척하던 그의 민낯이 완벽하게 드러난 것이다.

윤일중 회장의 눈 속에서 땔감을 모두 불 싸지르고 있는 분노가 보였다.

그리고 그 분노 뒤에는 아직도 현실 파악을 하지 못하는 아둔함 역시 있었다.

“언제부터라니··· 글쎄요. 고왕 건설이 경영진의 무능으로 부도 위기에 처했다는 기사를 읽은 뒤 아닐까요? 아니지요. 어쩌면 구 회장님이 고왕 건설의 채권을 산 십여 년 전부터 일지도 모르겠네요.”

“이봐, 지금 장난치는 거야? 나이도 새파랗게 어린 양반이···”

윤덕호는 아비를 대신해서 삿대질까지 해가며 거칠게 말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참는 것이지 여차하면 내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예. 맞습니다. 당연히 농담입니다. 자꾸 저를 악당으로 몰아가시기에 장단 좀 맞춰드렸습니다. 그런데···”

나는 입가에 미소를 거두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착한 척은 그만하렵니다. 그럼 윤 회장님께 묻겠습니다. 저와 BH 인베스트먼트가 나타나기 전까지 고왕의 오너로서 회장님은 도대체 뭘 하셨습니까? 여기 모인 이사님들에게 납득 할 만한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윤 회장은 새빨개진 얼굴을 뒤로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은 이 상황에 아주 딱 들어맞는 속담이리라.

“BH 인베스트먼트는 몸은 작지만, 손에 소총이 들려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미래에서 온 최첨단 무기를 가지고 있을지도요. 고왕 건설은 어떻습니까? 우리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커다란 거인이라지만 기껏해야 나무 몽둥이 정도 휘두르고 있습니다. 싸움이 되겠습니까? 저는 평화를 원합니다. 하지만 도전해오신다면 피하지 않고 응전하겠습니다.”

차가운 나의 목소리에 회의실은 얼음장이 되었다.

해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해봐라.

나의 경고였다.

죽자고 열을 내던 윤덕호도 힘없이 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구 회장··· 이거 다 구 회장의 짓이구나.”

잠깐 사이에 십 년은 늙은 것 같은 음성으로 윤 회장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저런. 안타깝다.

아직도 윤 회장은 이 일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눈앞의 내가 그저 구 회장의 바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상상력이 부족한 당신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이치에 맞겠지.

당신 아들의 말처럼 새파랗게 어린 나에게 뒤를 따였다고 인정하는 것보다 그편이 차라리 마음이 편할테니까.

하지만 당신이 무엇을 믿건 간에 사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나는 아주 작은 자비를 베풀기로 했다.

윤 회장이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도록 어떤 반박도 없이 그냥 내버려 두었다.

“이런 어리석은 놈! 입 다물지 못할까.”

그때, 이사진 쪽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 노인이었다.

황 노인 역시 흰 수염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니 여간 화가 난 모양이었다.

다만 노인의 역정은 내가 아닌 윤 회장을 향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감투 쓰는 것만을 그리도 좋아하더니··· 기어코 사달을 내는구나.”

지팡이를 쥔 노인의 손은 시계추처럼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어르신. 진정하세요.”

황 노인 주변의 이사들이 급히 그를 진정시켰다.

한동안 씩씩대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노인은 윤 회장으로부터 시선을 거두곤 나를 바라보았다.

“한영수라고 하셨나? 그래, 한 대표. 말해보게. 이제 이 회사를 어쩔 생각인가.”

“예. 추후 주주 총회에서 할 이야기들이지만, 이사님들께는 당연히 미리 말씀을 드려야겠지요. 저는 고왕 건설의 사업구조를 재편할 생각입니다. 큰 그림만 이야기하자면 침체일로인 주택 사업을 축소하고 그 역량을 해외 시장 개척에 쏟아부을 생각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오프더레코드입니다만··· 이 과정에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도 끌어내겠습니다.”

“그 말은 회사를 전부 갈아엎겠다는 뜻입니까?”

끼어든 것은 이재석 부사장이었다.

“아니요.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고왕 건설의 저력을 믿고 있습니다. 그 저력은 이 회사의 근로자 한 명, 한 명에게서 나오고 있다고 생각하구요. 오히려 대규모의 구조조정을 계획하고 있던 것은 고왕의 경영진 아니었습니까? 대규모의 인사이동이야 필요하겠지만, 저는 그런 식으로 인사를 개편하지 않겠습니다.”

반론을 완벽하게 차단하니 입을 열어야 할 사람들이 떠들지 못하고 있었다.

“인사에 대해 말이 나왔으니 몇 마디 더 하겠습니다. 이건 함부로 사람을 내치지 않겠다는 제 의지의 표현으로 보셔도 됩니다. 우선 최대 주주가 되었다고 건방지게 이 회사의 역사를 모두 가로챌 생각은 없습니다. 윤일중 회장님은 지분 관계의 변동이 있었지만, 여전히 그룹의 회장 자리에 계실 겁니다.”

나를 제외한 모두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심지어 구동일 까지도.

달도 구름에 가린 밤, 컴컴한 바닷물 속을 걷듯 도저히 한 치 앞을 예상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자네는?”

황 노인이 여기 있는 모두가 가장 묻고 싶을, 궁금해할 질문을 나에게 던졌다.

“예.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변했는데 윤 회장님이 모든 걸 여전히 쥐어서는 안 되겠지요. 저는 지금 윤 회장님이 앉아있는 저 자리.”

나는 손을 들어 윤 회장 쪽을 가리켰다.

“이사회의 의장을 맡고 싶습니다.”

아···

누군가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하나 더. 지금 고왕 건설에는 전문 경영인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사장직을 비워두고 윤 회장님이 회장이라는 직함 아래 겸임을 하고 계신 상황인데··· 제가 보았을 때는 효율적이지 못 합니다. 제가 점찍어놓은 인물이 있습니다. 그분을 고왕 건설의 사장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이 부분은 오늘 이사회가 열린 김에 결의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데요?”

당연히 뒤따라 나와야 할 질문.

아까 나에게 구겨진 오만 원을 받아 갔던 전직 공무원 출신 이사였다.

“아마 이사님들은 몰라도 윤 회장님은 아시는 얼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종현 전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 이종현? 태상 건설의 전무, 이종현?”

“맞습니다. 회장님. 바로 그분입니다. 업계 2등이던 00년대 태상 건설이 최고의 자리를 공고히 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고, 해외 수주의 전문가이기도 합니다. 지금 고왕 건설의 키를 잡기에는 최고의 적임자라고 할 수 있지요.”

윤 회장의 볼살이 씰룩거렸다.

그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이 왜 없겠는가.

말만 회장이지 쥐고 있던 걸 모두 내려놓고 앞으로는 얼굴마담이나 하라는 것인데.

하지만 아무리 그가 눈이 어둡다고 해도, 지금 돌아가는 꼴을 이해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말 한마디 잘못 꺼냈다간 그 얼굴 마담 자리마저도 잃는다.

그래서 그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

그래. 그래야지.

말할 수 없는 것은 당연히 침묵하셔야지.

“···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심각한 얼굴로 이재석이 입을 열었다.

몇 번 만나보았지만, 그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인물.

어찌 보면 윤 회장보다 더 유심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사람이었다.

“이종현 전무님. 개인적으로 저도 몇 번 뵈었지만, 인품도 훌륭하고 능력도 출중하시지요. 그런데 다 떠나서 지금 이 자리에서 이종현, 그분을 사장으로 선임하자는 의결을 해달라는 말씀은 조금 과하시죠.”

이재석의 말에 윤 회장의 얼굴에 화사한 낯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애초에 한 대표님은 ‘현재는’ 이사장은 물론 이사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사회를 시작하면서 말했다시피 이사가 아닌 대표님은 안건을 제기할 자격이 없습니다.”

틀린 소리는 아니지만, 궁여지책일 뿐이다.

그렇게라도 시간을 벌어보겠다는 건가.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시기의 문제일 뿐 어차피 주총을 거치고 나면 성사될 일입니다. 그럴 거면 차라리 하루라도 빠르게 혼란을 수습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서 꺼낸 이야기입니다.”

“절차는 지키셔야죠.”

일방적으로 흐르던 원사이드 게임에 이재석 부사장이 간신히 제동을 걸었다.

그런데 그때,

“이보게, 이재석 부사장. 그 이종현이라는 사람 말이야. 능력은 있고?”

황 노인이 이재석에게 말을 걸었다.

“어르신! 정말 왜 이러십니까.”

“윤 회장은 가만히 있어. 나는 지금 부사장에게 묻고 있잖아.”

노인이 날카롭게 쏘아보자 이재석 부사장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 예. 이뤄낸 성과는 확실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이사로서 내가 안건을 내지. 고왕 건설의 사장 선임 건에 대해서 말이야.”

“어르신!”

윤일중 회장이 테이블 주먹으로 쾅 치며 소리를 질렀다.

“이보게, 윤 회장.”

황 노인은 윤일중의 거친 반응을 어쩐 일인지 차분하게 받아들였다.

“이 일과는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자네의 대부야. 코흘리개 시절 때부터 자네를 봐왔는데 어찌 아끼는 마음이 없겠는가. 특히 자네 아버지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래. 하지만 이제 물러놓고 내려가시게. 이건 자네를 위한 소리야. 이대로 계속 흘러가면 말이야. 윤 회장, 자네는 더 큰 화를 입게 될 거야.”

“그런···”

“자, 우리 이사들 생각은 어떠신가. 내가 보기에 한 대표라는 저치 말이야. 알아서 좋은 경영자도 구해오고, 회사의 빚도 해결해주고. 회사의 적이 아니라 귀인으로 보이네만. 나는 한 대표가 말한 사장 선임 건, 찬성일세.”

황 노인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분위기는 뒤집히지 않았다.

잠깐 윤 회장의 눈치를 보던 사외이사들은 황 노인을 뒤를 따라 하나씩 손을 들기 시작했다.

이미 네 명이 넘어가면서 이사회의 과반이 찬성한 상황.

그 말인즉슨 윤 회장 부자와 이재석 부사장의 가, 부의 의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뜻했다.

“기권··· 기권하겠습니다.”

그렇게라도 마지막 남은 한 가닥의 자존심을 이렇게라도 지키겠다는 듯, 침통한 얼굴로 윤일중 회장이 말했다.

타이슨, 그리고 호날두와 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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