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이사회 (2)
“한 대표. 우와, 이거··· 나 왜 이렇게 떨리냐.”
엘리베이터 안에서 구동일이 입을 열었다.
과연,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누가 옆에서 그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기만 해도 장기 속의 보관하던 모든 걸 토해내기라도 할 것 같다.
“그렇게 긴장 할 것 없어. 오늘 구 이사는 자리만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해내는 거니까.”
“정말 이 큰 회사를 먹는다고? 한 대표, 넌 정말··· 대단해.”
“내가 아니라 우리지. 그리고 넌 나보다 훨씬 더 스케일이 큰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면서 뭘 그래.”
“우리 아버지랑은 다르지. 내가 알고 있는 아버지는 항상 몸을 숨기려고만 하셨으니까.”
“현명하신 거지.”
긴장한 구동일과는 달리 내 귓가에서는 베토벤 3번 교향곡이라도 들리는 것 같았다.
웅장한 쿵쾅거림.
그래도 벅차오르는 이 감정을 억눌러야 한다.
어디 여기가 마지막이겠는가.
이 순간은 앞으로 있을 수많은 통과점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 문이 열립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는 참으로 친절했다.
비록 기계음이었지만 우리의 평안을 공손한 말투로 기원해주었다.
오늘은 드디어 이사회 당일.
나는 히든카드 구동일을 뽑아 들고 전장으로 나섰다.
“대표님, 이쪽입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몸을 낮춰 길을 안내했다.
“BH 인베스트먼트 한영수 대표님, 입장하십니다.”
단상의 집행위원이 회의실로 들어서는 내 얼굴을 보고 마이크를 잡았다.
고요했다.
박수가 쏟아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자리에 모인 이사들은 입을 꾹 닫고 눈만 껌뻑이고 있을 뿐이었다.
“반갑습니다. 한영수입니다.”
“사람 수에 딱 맞춰서 의자를 가져다 놓았는데, 같이 오신 분은 누구십니까? 내가 아는 얼굴은 아니고···”
윤일중 회장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손으로 구동일을 가리켰다.
“아, 저는···”
“아니야. 동일아.”
나는 엉겁결에 자기소개를 하려는 구동일을 제지했다.
일부러 공식적인 직함인 ‘구 이사’가 아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허허허━!
그 모습을 보고 윤 회장이 뭐가 재미있는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래요. 이거 한 대표님께서는 아무래도 이런 자리가 처음이시겠죠. 긴장이 되셨는지 친구라도 데리고 온 모양입니다.”
이사 중 몇 명이 윤일중 회장의 말에 따라 웃었다.
··· 어리석은 사람들.
나를 욕보이려는 윤일중 회장의 시도는 세 살짜리 아이가 강물에 던진 조약돌보다도 내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지 못했다.
“예. 제 친구에 대한 소개는 잠시 뒤로 미루겠습니다. 제 소개는 다른 분을 통해서 들으셨을 테니 말을 줄이겠습니다. 반갑습니다. 고왕 건설의 이사 여러분.”
좌중을 한번 쓱 훑어본 뒤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저를 보는 눈빛들이 굉장히 험악하시군요. 무슨 도깨비라도 보는 것들 같으십니다. 원하시면 제 머리라도 한 번씩 보시지요. 뿔 같은 것은 없습니다.”
“차라리 도깨비가 낫겠네요.”
냉소적인 목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렸다.
고왕 리조트의 사장이자, 윤 회장의 첫째 아들인 윤덕호였다.
“윤 사장님이시군요. 그래도 그룹 전체로 보면 이제는 한배를 탄 입장인데, 좀 따뜻하게 맞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한배요?”
어림도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윤덕호가 말했다.
“당신들 같은 사람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돈 냄새가 나는 곳이라면 지옥까지도 가는 자들. 자본주의의 악마! 한 대표는 우리 회사를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여기는 우리의 집이고, 우리는 가족입니다.”
전후사정을 떼놓고 보자면 그럴듯한 소리였다.
말솜씨는 아버지보다 아들이 훨씬 낫군.
그래. 너희들이 지금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야 이 정도겠지.
논리가 아닌 감정에 호소하는 것.
“글쎄요. 저에겐 아버지와 다름없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신부님이신데, 제가 오늘 지옥이니 악마니 그런 소리를 들은 걸 알면 참으로 속상해하실 겁니다. 일단 저에 대해서 아주 큰 오해를 다들 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선 채로 슈트 상의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지갑 안에서 오만 원짜리 지폐를 하나 꺼냈다.
“지금 저한테 오만 원짜리 지폐가 있네요. 이 자리에 오만 원이 아쉬운 분은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게 가지고 싶은 분은 손을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그냥 드리겠습니다. 그 어떤 조건 없이요. 그저 손만 드시면 됩니다.”
당연하겠지만 내 돌발행동에 이사들은 그 어떤 유의미한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천박하게···.”
윤덕호만 혼잣말을 나지막하게 뱉었을 뿐이다.
나는 썰렁한 반응에도 자리에 앉지 않았다.
가만히 웃으면서 누군가 손을 들기를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그리고,
“그래. 정말 거저 준다면 사양할 이유가 없지.”
이 이사회의 참석자에 대해서는 이미 명단을 받아보았다.
뼈의 형태가 그대로 보이는 앙상하고 주름진 손을 들어 보인 것은 오늘 모인 이사진 중 가장 연장자인 황 노인이었다.
나는 갓만 안 썼다 뿐이지 이미 사라져버린 나라의 선비처럼 허연 수염을 기른 그에게 다가가 공손하게 지폐를 내밀었다.
“어르신. 한영수입니다. 어린놈이 건방을 부리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허! 그래. 이 돈은 내가 요긴하게 쓰도록 하지.”
황 노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나는 지갑에서 오만원권을 한 장 더 꺼냈다.
“실례되는 행동을 한 번만 더 하겠습니다. 부디 불쾌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행동했다.
나는 지폐를 내 손아귀에 넣고 사정없이 둥글게 구겨 말았다.
“자, 오만 원. 또 필요하신 분 있습니까?”
이번에는 처음보다 반응이 좀 나았다.
전직 고위 공무원 출신이라는 사외이사가 한 명, 그리고 이재석 부사장이 손을 들었다.
특히나 이재석은 대관절 내가 뭘 하는 것인지 궁금해 죽겠다는 눈빛이었다.
“두 분이 손을 드셨지만, 부사장님보다는 이쪽 이사분이 빠르셨네요. 자, 여기 있습니다. 이사님.”
“고마워요.”
그녀는 얼떨결에 고맙다고 내게 말했다.
“그런데 이사님, 혹시 구겨진 돈을 받고 기분이 상하시지는 않았나요.”
“글쎄요. 어차피 다 똑같은 돈 아닌가요? 기분 나쁠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그렇죠. 당연히 그렇습니다. 신권이든 구겨진 돈이든 오만 원이라는 가치가 변하는 건 아니니까요.”
나는 대단한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처럼 손뼉을 쳤다.
마치 나를 중심으로 중력이 형성되기라도 하는 듯 모두의 시선이 내게 끌어당겨졌다.
“저에겐 이 회사가, 고왕 건설이 방금 이사님께 드린 구겨진 돈과 같습니다. 처해있는 상황이 좀 그렇지만, 근본적인 가치는 변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다만 구겨진 돈은 가지고 다니기 좋지 않죠. 그래서 저는 고왕 건설을 아주 빳빳하게 펼 생각입니다. 제 목적은 그것뿐입니다. 물론 사람이 하는 일이니 돈도 좀 벌어야겠지만, 그건 그저 목표를 향해 가다보면 따라오는 것일 뿐. BH 인베스트먼트의 대표이사로서 맹세하건대 오로지 돈놀이만을 목적으로 이 회사를 찢어발기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즉흥적으로 떠오른 아이디어였지만, 나쁘지 않은 쇼였다.
그리고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내 말에 공감한 것인지, 무의식적인 반응인지 모르지만 이사 몇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물론 여전히 나를 마뜩잖게 보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하하하! 우리 한 대표님은 연극배우를 하셔도 되겠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우리 회사를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니 회장으로서 눈물이 다 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사회를 시작해야겠지요? 그만 착석해주세요.”
윤일중 회장은 집행위원에게 눈짓했다.
“예. 올해의 첫 이사회를 지금부터 개최하겠습니다.”
집행위원은 참석자의 명단을 읊는 것으로 시작했다.
“···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는 BH 인베스트먼트 법인의 대표자로 한영수 대표이사님이 참석했습니다. 당연히 이사가 아니시니 안건을 제시할 자격은 없습니다. 하지만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 이사님들의 참고를 돕기 위해 발언할 수 있다는 점. 모두 동의하십니까?”
이사회의 일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집행위원의 말에 동의를 표시했다.
“자 의장으로서 제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최근 고왕 건설의 큰 지분변동이 있었습니다. 최대 주주인 제가 지분 일부를 BH 인베스트먼트에 양도했습니다. BH 측에서는 경영 참여를 위한 지분 매수로 밝히셨고요.”
“그런데 BH 인베스트먼트가 대관절 무슨 회사입니까? 신생 회사에 이렇다 할 이력도 없더군요.”
이사 중 황 노인을 제외한 다른 주주 대표가 윤 회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한번 나에게 모였다.
“물론 저희에겐 이렇다 할 경력이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거니까요.”
“하필이면 그 처음이 우리 회사구요.”
삐딱한 태도로 윤덕호가 말했다.
“예. 하지만 실무자들은 신생 회사에 맞지 않게 경험이 풍부하다고 자부합니다. 세계 시장을 주름잡던 베테랑들이지요. 특히나 누구보다도 윤 회장님이 잘 아실 겁니다. 우리 회사의 COO에 대해서···”
큼━
윤일중 회장이 헛기침했다.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저희 회사는 자본금 대부분을 대표인 제가 조달하고 있습니다. 그 말인즉슨 개인 투자유치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재정의 안정성과 건전성에 대해서는 일절 의심을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 어쨌든 이제 귀사는 우리 회사의 2대 주주인데, 우리도 귀사에 대해 확실히 알아보지 않으면 안 되지요. 자금 규모가 6천억이던데,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귀사가 애초에 약속한 3천억 규모의 채권 매입이 가능합니까? 이미 지분을 매입하는 데도 상당한 규모의 자산을 사용하셨을 텐데요.”
잘 걸렸다는 듯이 윤일중 회장이 치고 나왔다.
··· 그건 내가 가진 힘의 5분의 1도 되지 않는단다.
마치 어느 만화책 속 악당의 대사 같은 것을 말해볼까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천박하다는 소리를 한 번 더 듣고 싶지 않아 잠자코 있었다.
어쨌든 윤 회장의 말을 효과적이었다.
나란히 자리에 앉아있는 사외이사들 사이에서 수군덕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랍군요.”
나는 미소를 잃지 않고 윤일중 회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늘 이 자리가 BH 인베스트먼트의 청문회가 될 거라는 생각은 못 했는데요. 저와 저희 회사는 증명해야 할 것은 이미 모두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추궁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약속대로 거래 은행의 대출 회수 요구도 막아드렸구요.”
“··· 고작 6천억을 가지고 이 고왕을 주무르려고 한다니.”
윤덕호는 철저하게 자기 아비의 편이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자기가 뱉은 말이 얼마나 병신같은 소리인지 알 수 있을 텐데···
고왕 그룹은 6천억이 아니라 당장 6백억도 마련하지 못해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예. 좋습니다. 더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6천억이 적다고 생각되시면, 대표인 제 개인 자산으로 추가 자금 조성에 어려움이 없다고 장담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의심이 풀리시지 않는 분들이 계시겠죠. 그렇다고 여기서 제 개인 계좌를 확인시켜드릴 수도 없고 말입니다.”
나는 내 옆자리에 조용히 앉아있던 구동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제 회장님께서 제 친구라고 표현한 분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려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BH 인베스트먼트의 자본력에 그 어떤 문제도 없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드릴 수 있는 증거이기도 하지요. 실상 아까 윤 회장님이 제 친구라고 말씀하신 건 굉장한 실례입니다.”
윤일중 회장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희 BH 인베스트먼트의 구동일 이사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오늘 자리의 주인공이기도 하지요. 여기 있는 이사님들께서 꼭 아셔야 할 사람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구동일이 누군데?
모두의 머리 위로 크게 물음표가 떠 있는 것 같았다.
딱 한 사람.
윤일중 회장만 빼고.
그는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구동일과 구 회장의 성씨가 같다는 것을.
결코 구 씨가 흔한 성이 아니라는 걸.
“깜짝 발표가 되겠군요. 구 이사는 고왕 건설의 현 3대 주주인 구기욱 회장님의 아들입니다. 아울러 구 회장님은 본인이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을 저희 BH 인베스트먼트에 전부 위임하셨습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윤 회장 부자의 입은 떡 벌어졌고, 이재석 부사장은 끙 소리를 내며 고개를 떨궜다.
“예. 맞습니다. 공식적으로 이제 고왕 건설의 최대 주주는 바로 BH 인베스트먼트입니다.”
이사회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