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이사회 (1)
“전무님.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그간 연락이 없으시길래 저를 까맣게 잊었거나 계획했던 일이 수포로 돌아간 줄로만 알았습니다.”
사람 좋게 허허 웃는 이종현 전무.
지분싸움의 가닥이 잡힌 오늘, 나는 급히 그와 연락을 취했다.
이종현 전무 역시 중요한 퍼즐의 한 조각.
아니, 앞으로를 생각하면 가장 핵심적인 인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앨런에게 수수께끼처럼 말한 고왕 건설의 새 시대를 열 선장은 다름 아닌 바로 그였다.
“전무님, 얼굴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그렇습니까? 다시 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리에 안사람의 입이 귀에 가서 걸리더군요. 과장 좀 보태서 제가 전무로 승진을 할 때보다 더 좋아합디다. 요즘 제가 바가지를 안 긁혀서 얼굴이 폈나 봅니다.”
이 전무는 넉살 좋게 엄살을 부렸지만, 그의 얼굴에서 그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왠지 모르게 의기소침하게 어깨가 축 처져있던 그다.
그렇게 앞으로 남은 것은 내리막뿐이라는 듯 힘없는 중년의 모습이던 그가 불과 얼마 사이에 온몸에서 생기가 돈다.
몸이 쫙 펴진 게 옷걸이가 그럴듯하다.
아마도 이 모습이 한때 태상 건설을 호령하던 그의 본모습이겠지.
“부끄러운 고백 하나만 할까요. 한 대표님을 만난 날 제대로 잠을 못 이뤘습니다. 날 찾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기쁜 일이란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이종현 전무는 진심으로 나의 연락을 목이 빠져라 기다린 것 같았다.
세월이 얼굴에 새긴 주름살은 어쩔 수 없겠지만, 지금 그에게선 관록 있는 수컷의 아우라가 풍기고 있었다.
너무 오래 쉬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싸움터에 나갈 준비가 되어있다.
원치 않게 억눌렸던 그의 기백이 이렇게 함성을 외치는 것 같았다.
“저도 전무님에게 좋은 소식을 들려드리기 위해 그동안 열심히 뛰어다녔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좋은 기운을 보여주는 그를 위해 어떤 극적인 말로 결과를 알려줄까, 잠시 고민을 했다.
‘고왕 건설이 손아귀에 들어왔습니다.’
··· 아니야. 마치 내가 악당이라도 된 것 같잖아.
‘마침내 제가 해냈습니다.‘
이건 감정이 투머치고.
결국 몇 가지 대안 중에서 나는 가장 무난한 것을 골라 들었다.
“전무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예. 오래 기다렸지요.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는 무뎌질 대로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대학 합격발표만을 기다리던 까까머리 교복쟁이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드는 요즘이었습니다. 그래요. 아주 푹 쉬었습니다. 이젠 때가 된 겁니까?”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조만간 BH 인베스트먼트는 고왕 건설의 최대 주주가 될 겁니다.”
허━
슈퍼에서 물건을 샀다는 투로 담담하게 말하는 나에게 감탄이라도 했다는 듯 이 전무가 탄식을 뱉었다.
“저도 나름대로 안목이라는 게 얼마 정도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공의 사다리를 타는 사람에게서는 무언가가 확실히 보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첫 만남에서 대표님에게 그런 걸 봤던 것 같습니다. 한 대표님을 보면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자꾸 떠오릅니다. 이미 고인이 되신 분이지만···”
장영복 회장, 내 생부를 말하는 것일까.
왜인지 답을 알 것 같았기에 나는 굳이 그게 누구냐고 이종현 전무에게 캐묻지 않았다.
“그나저나 대표님.”
이종현 전무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근엄한 얼굴로 그는 나에게 다짐을 받아내려고 했다.
“저와 약속하신 것은 잊지 않으셨겠지요?”
“물론입니다. 태상 건설의 옛 동료들도 함께 일하고 싶다는. 어떻게 그분들의 의사는 확인하셨습니까.”
“하나같이 아이처럼 기뻐했습니다. 그 사람들의 기분은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알지요. 다들 자기가 아직 충분히 일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몸들이 달아있습니다.”
“주변 사람부터 챙기는 인품이 훌륭하십니다. 당연히 약속은 지켜야지요. 저는 공수표를 남발하는 성격은 아닙니다. 이제 고왕 건설의 사장이 되실 분에게 그 정도의 인사권도 못 드리겠습니까.”
“··· 예?”
이종현 전무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그는 자기가 못 들을 걸 잘못 듣기라도 했다는 반응이었다.
“전무님을 사장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저는 경영에 있어서는 경험이 미천합니다. 저 큰 회사를 어떻게 컨트롤 하겠습니까. 만약 그럴 심산으로 고왕을 샀다면 그건 허영심에 불과합니다. 저에겐 이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상을 현실로 옮겨줄 분이 필요합니다. 거절 안 하실 거라고 믿겠습니다.”
이 전무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는 한참 지났는데···”
자신이 받았던 수모가 떠오르기라도 한 걸까.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이 스쳐 갔는지 이종현의 눈가가 슬쩍 붉어졌다.
그는 잠시 고개를 들어 허공을 올려다보며 마음을 추스르곤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한 대표님과 저는 이제 겨우 두 번째 만난 것뿐입니다. 그것도 아주 짧게. 그런 저를 뭘 믿고···”
지긋이 이종현 전무를 바라보았다.
나는 당신이 쌓아온 경력을 믿는다.
이뤄냈던 성취와 거기서 얻은 경험도 믿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장영복 회장님 말입니다. 생전에 그렇게 대단하셨다면서요.”
“갑자기 회장님 이야기를··· 예. 대단하셨지요. 그래도 옆에서 오랜 시간 모셨으니 압니다. 감히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경영의 신이라고. 카리스마의 화신 같은 분이셨죠.”
“그 경영의 신으로부터 이미 검증을 받으신 분을 제가 뭘 더 시험 할 게 있을까요. 세상 어디를 뒤져도 지금 고왕 건설의 사장 자리에 전무님보다 어울리는 분은 없을 겁니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는다는 고사가 있다.
이종현 전무는 나의 말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새삼 자세를 바르게 앉았다.
“지분으로 윤 회장을 밀어낸다고 해도 남아있는 고왕 건설 임원들의 반발이 심할 겁니다. 그들을 전부 쓸어낼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심지어 저는 경쟁사에서 반생을 보내다시피 했습니다.”
“그건 제가 컨트롤 하겠습니다. 전무님은 고왕을 세계로 보내는 것에만 집중해주시면 됩니다. 예전에 태상에서 그러셨던 것처럼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태상맨이던 시절부터 이종현 전무는 위, 아래로 관계를 잘 챙기기로 세평이 훌륭했다고 한다.
그런 그의 융화력이라면 충분히 잘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다시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대표님이 이런 복심까지 가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제가 전무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다시 뛰고 싶다는 간절함이 전무님을 이곳으로 부른 것이지요. 명예로운 자리라고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특히나 고왕 건설의 현 상황을 생각하면요. 같이 죽을힘을 다해 달려보시죠.”
이종현 전무는 입술을 앙다물고, 결연하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저희 팀에 들어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것 또한 운명일까.
어찌보면 기막힌 일이다.
내 생부와 함께 일했던 사람이 이제는 나를 위해 일한다.
그래.
이 운명을 피할 수 없다면 고삐를 손에 쥐고 그 등에 올라타리라.
*
“회장님이 들어오십니다.”
윤일중 회장과 고왕 리조트의 사장인 그의 첫째아들, 그리고 이재석 부사장이 회의실의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미리 회의실 안에 도착해있던 몇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윤 회장에게 인사를 했다.
오늘은 지분 양도가 끝나고 한영수의 요청대로 고왕 건설의 이사회 소집이 있는 날이었다.
먼저 자리에 와 있던 네 사람은 이사회의 사외 이사들.
방금 들어온 셋까지 정족수를 채운 일곱 명이었다.
사외 이사들의 면면을 보자면 주주를 대표하는 자가 둘, 전직 공무원에 대학교수가 나머지 하나였다.
“한 대표는 아직인가?”
“예. 지금 거의 도착했다고 합니다.”
집행위원으로부터 한영수의 부재를 확인한 윤 회장은 사외 이사 중 제일 연장자로 보이는 남자에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가갔다.
“어르신.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윤 회장.”
“이사회에 참석하시는 게 도대체 얼마 만입니까.”
“근 7년 만이지.”
“정정하신 모습을 보니 제가 다 기분이 좋습니다.”
검버섯이 잔뜩 핀 노인은 얼굴이 석고상처럼 굳어있었는데 윤 회장의 사근사근한 말투에도 풀릴 기미가 없었다.
황 노인이라고 불리는 이 어르신은 오늘 모인 2명의 주주 대표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윤 회장의 아버지의 둘도 없는 벗이었으며, 오랜 세월을 고왕 건설과 함께 해 온 이였다.
가진 지분이 많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선대 때부터 이사로서 회사에 큰 목소리를 냈었다.
“지금 회사 돌아가는 꼴을 보니 정정이 다 무어야. 지팡이를 끌고서라도 나와봐야지.”
노인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했다.
갈라질 것 같은 그의 음성은 황 노인의 불쾌한 심사를 그대로 드러냈다.
“어르신, 걱정하지 마시지요. 이제 다 해결되었습니다.”
“이런 모자란···”
노인의 입에서 모두의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자리에 있는 대부분은 고개를 떨구며 못 들은 척을 했고, 윤 회장의 아들은 떫은 표정으로 당장이라도 노인을 향해 한소리를 할 것 같았다.
‘이 노인네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어. 인제 그만 관속에 들어가 누울 것이지.’
애써 침착을 유지하며 윤 회장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어르신, 공적인 자리입니다. 말씀을 좀 과하십니다.”
“해결? 내가 귀가 먹었다고 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못 듣는 게 아니야. 네 아버지가 알면 가슴을 칠 일이야. 회사를 팔아먹은 것, 고작 그것이 해결이야?”
황 노인은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바닥에 쾅 내리쳤다.
“팔아먹다니요. 아직 최대 주주는 저입니다. 경영권은 흔들림이 없어요. 회사를 수렁에서 구하기 위해 잠시 후퇴를 한 거고요. 6.25도 겪어보셨으면서 왜 이러십니까. 인민군에게 부산까지 밀렸어도 인천 수복하며 뒤집은 거 기억 안 나세요.”
“그래. 그런데 정작 해결은 그 비에이친지 뭔지 하는 놈들이 다 했더군. 은행도 입 싹 다물게 만들고. 이봐, 윤 회장. 자네야 가만히 이 회사를 넙죽 물려받았지만, 아버지가 어떻게 일군 것인지 알기는 하는가.”
“어르신. 이제는 기업들이 장사 그렇게 안 합니다. 필요하다면 야합도 할 줄 알고 상대를 이용하기도 해야하는 겁니다. 이봐!”
윤일중 회장은 집행위원을 소리 높여 불렀다.
“어르신 진정 좀 하시게 물 한 잔만 떠다 드려.”
당장이라도 이 노인네를 걷어차 내쫓아버리고 싶은 그였지만, 이제 곧 시작될 이사회를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세상에서 체면을 중시하는 윤 회장에게 있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애 취급을 당하다니!
마음을 가라앉히며 윤일중 회장은 자신을 위해 마련된 상석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오늘 이사회의 의장은 다름 아닌 그다.
살날이 얼마 안 남은 노인네에게 감정을 휘둘려서는 안 된다.
이제 곧 그의 적수가 이곳에 오지 않는가.
‘분명히 보여줘야지. 제 놈이 아무리 돈으로 위세를 부리려고 해도 이 회사는 엄연히 이 윤일중이의 것이라는 걸.’
황 노인의 제외한 나머지 이사들의 얼굴을 한 번씩 훑어보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들 자신의 편이 되어줄 거라고 윤 회장은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똥개도 자기 집에서는 반쯤 먹고 들어간다는데, 여기는 엄연히 윤 회장의 홈그라운드.
그때였다.
직원 한 명이 회의실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그 직원은 오늘 이 자리를 만든 불청객의 도착을 알렸다.
“회장님. BH 인베스트먼트 한영수 대표, 지금 막 도착했답니다.”
‘그래. 오거라. 내가 본때를 단단히 보여줄 테니.’
윤 회장은 더 이상 그 어린놈에게 질질 끌려다니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을 다졌다.
이사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