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04화 (104/200)

104. 선들이 모여 그림이 되고

고왕 건설의 임원 회의실.

여기에는 사람들이 둘러 앉아 있다는 것이 무색하게 고요한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아니, 고요함이라는 단어가 평온함과 가깝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 막막궁산을 표현하기에는 적절치 못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곳은 문상객들이 찾아오기 전 장례식장의 분위기와 꼭 같았다.

사실 조 상무가 물고 온 소식은 고왕 건설에는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온 것과 다름없었다.

고왕 건설의 주거래 은행 두 곳이 대출 연장에 대해 긍정적인 신호를 보여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눈앞의 큰 위기는 넘어갈 수 있다.

여기서부터 차근차근 회생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큰 성과를 거두고 온 조 상무에게 누구 하나 고생했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바로 동아줄에 같이 딸려온 하나의 조건 때문이었다.

그 조건이라는 것이 대관절 무엇인가.

그것은 여기에 모인 모두가 알고 있듯이, 지금 상석에 앉아있는 보스의 지분을 넘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임원 중 누구도 섣부르게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입을 열어야 한다.

한영수의 말은 절대적으로 옳았다.

적어도 한 그룹의 오너라면, 작금의 위기에 대해 책임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윤일중 회장이 쥐고 있는 고왕 건설의 지분을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던가.

주가가 하방을 면치 못하는 지금도 시시각각 줄어들고 있지만 그래도 물경 6천억에 이른다.

BH 인베스트먼트는 그중 삼 분의 일을 양도받길 원하고 있다.

그들의 할인 요구까지 모두 수용하면 윤 회장은 6백억 정도 손해를 보게 되는 셈이다.

돈도 돈이지만 윤 회장을 더 두렵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경영권을 누군가와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회사가 자신의 소유물이라는 고전적인 재벌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 윤 회장.

그로서는 고왕 건설의 경영에 참여하겠다는 BH 인베스트먼트의 천명이 자신의 성역을 침범하겠다는 선전포고와 다름이 없었다.

“회장님. 이제는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양도하시죠. 지분권.”

마침내 임원 중 한 사람이 용기를 끌어내 무거운 침묵에 균열을 내었다.

끙━

임원의 말을 듣고 윤일중 회장은 그저 앓는 소리를 한번 내었을 뿐이었다.

“일단 회사를 살리는 것이 우선 아니겠습니까.”

“비단 은행과의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BH 인베스트먼트가 제시한 3천억의 채권. 그거면 당장 막아야 할 어음들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한번 말문이 열리자 그것은 바로 도화선이 되었다.

목소리의 음색은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윤일중 회장에게 같은 방향의 이야기를 했다.

‘이런 배은망덕한···’

그들의 행태에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윤 회장이었다.

가신들에 의해 왕좌에서 끌어내려지는 것 같은 모멸감까지 들었다.

하지만 어쩌랴, 그도 알고 있었다.

지금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걸.

그래서 그는 임원들의 공세에 제 목소리 한번 제대로 낼 수 없었다.

“이재석 부사장?”

애원하듯 간절한 눈빛으로 윤일중 회장은 이재석을 바라보았다.

중요한 결정이 있을 때 타인에게 의지하는 것은 윤 회장의 나쁜 버릇이자 나약함이기도 했다.

오랜 세월 동안 그 칭얼거림을 받아온 이재석은 보스의 부름에 한참을 고민하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만약···”

회의실에 모인 좌중 모두가 이재석의 입을 바라보았다.

“주주들이 회장님께서 BH 인베스트먼트의 제안을 거절한 것을 알게 되면 난리가 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사회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윤 회장이 구 회장으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하는 것을 본 뒤로 이재석은 며칠 밤을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야기가 흘러가는 꼴이 BH 인베스트먼트와 구 회장의 지분 위장이 틀림없었다.

회사는 둘째치고 생존이 걸린 문제다.

자신의 생각을 윤 회장에게 경고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이 거래는 바로 깨질 것이고, 고왕 건설은 달라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그대로 있다가는 어느 날인가 검찰 조사실에 자신이 앉아있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처음엔 참고인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피의자로, 그리고 끝내 피고인이 되고 마는.

그렇다고 BH 인베스트먼트와 한영수를 믿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재석 이 판에서 한 발을 빼기로 마음을 먹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재석 부사장은 자신의 의견을 직접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그저 뻔히 예상되는 주주들의 반응에 대해 넌지시 말했을 뿐이었다.

“회장님··· 저들도 알고 있을 겁니다. 자기들이 제시한 조건대로라면 막대한 증여세를 본인들이 물게 된다는 걸요. 할인에 대해선 분명히 협상의 여지가 있을 겁니다.”

조 상무의 말은 쐐기였다.

윤일중 회장은 도저히 이 노도와 같은 대세를 자신이 거스를 수 없음을 직감했다.

“··· 조 상무.”

“예. 회장님.”

“조 상무가 만나고 와. BH 인베스트먼트 말이야. 원하는 바를 들어주겠다고. 다만 이쪽의 출혈은 최소화 해야 해. 알겠지?”

조 상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분이야 나중에 다시 찾으면 돼. 가진 것 좀 나눠준다고 해도 여전히 이 회사의 주인은 나니까. 제깟 놈들이 현금다발 좀 쥐고 있다고 해도 내가 누군데. 나 윤일중이야.’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라고 생각하자.

그런 마음으로 윤 회장은 결단을 내렸다.

***

“양도 시점 주식 시가에서 12% 할인. 이게 회장님이 양보하실 수 있는 마지노선입니다.”

고왕 건설, 그리고 윤일중 회장의 최후통첩은 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찾아왔다.

하긴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시간은 절대 본인들의 편이 아니라는 것.

“You're hitting us too hard.”

조 상무의 제안을 듣고 앨런이 혼잣말을 했다.

“회사의 의견과 상관없이 제가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여기서 더 간다면 오히려 BH 측에서 저희를 괴롭히는 꼴 밖에 안 됩니다.”

조 상무는 앨런이 말하는 바를 알아듣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목소리의 이면 속 분함까지는 완벽하게 숨기지 못하는 그였다.

“30%와 12%는 갭이 너무 크다고 생각합니다만.”

“마른행주 쥐어짠다고 물 더 나오지 않습니다. 회장님께서 직접 이런 말씀을 하신 건 아니지만 이 이상은 차라리 안고 죽겠다는 심정이실 겁니다.”

“정말 안고 죽을 때쯤 되면 분명 땅을 치고 후회 하실 텐데요.”

나는 앨런과 조 상무의 신경전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말 몇 마디로 수십억이 오가는 상황이니 자연히 양측의 입장은 첨예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우리 쪽이었지만.

어쨌든 이 줄다리기의 결착을 내야 하는 것도 나의 역할이었다.

“··· 12%. 좋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조 상무의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간신히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다는 안도감까지 엿보였다.

앨런 역시 나의 말을 듣곤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사실 12%는 우리가 예상하던 범위 안이었다.

“저 역시 끝까지 가는 치킨 게임을 원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나는 조 상무에게 손을 내밀었다.

비록 백기를 들고 이곳에 왔지만, 굴종보다는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려 노력한 그에게 보내는 격려였다.

조 상무는 공손하게 내 손을 두 손으로 맞잡았다.

“양도 시기는 빠를수록 좋겠지요. 아무래도 주가가··· 고왕 측에서 일정을 조율해주시기 바랍니다.”

“예. 회장님께서도 어차피 일이 결정된 거, 대표님과 같은 생각을 하실 겁니다.”

“그럼, 앞으로는 자주 뵙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상무님.”

“아닙니다. 회사를 생각하시는 대표님의 진심만 믿고 있겠습니다.”

조 상무는 절절한 속내를 담백하게 말했다.

드디어 모든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이 한영수가 국내 굴지의 건설 회사의 2대 주주로 올라선다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내가 휘갈긴 붓들이 선을 그리고, 그 선들이 모여 마침내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냈다는 점은 나에게 더없는 만족감을 선사해주었다.

나의 설계가 단 한치의 틀어짐도 없었다는 점에서 오늘만큼은 겸손을 버리고 싶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 나의 앞에는 조 상무가 앉아있었다.

나는 자칫 경솔하게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어금니를 꽉 깨물어야 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이제 용의 눈을 그려 넣어야 한다.

“양도 계약이 체결되고 나면 빠른 시일 내 이사회를 열고 싶습니다. 안건은 지분 관계 변동 및 회사의 향후 경영에 관한 내용이면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대로 전달하겠습니다.”

가장 큰 협상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자 나머지 조율 사항의 타결은 말 그대로 순항이었다.

얼마간의 외교적 대화가 곁들인 시간을 보낸 후 조 상무는 바쁘게 발걸음을 옮겼다.

“미스터 한! 정말 해냈군요!”

조 상무가 나가고 완연히 얼굴이 밝아진 앨런이 감정을 주체 못하고 나를 얼싸안았다.

“앨런도 악역을 도맡아 하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그게 제 일입니다. 별이 빛나기 위해서는 어두운 하늘이 있어야지요. 가만··· 이거 자축의 건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마무리될 그때를 기다리시지요.”

“하하! 역시 미스터 한은 냉철합니다. 그래도···”

앨런은 테이블에 있던 찻잔 2개를 집어 들었다.

그는 나에게 하나를 내밀더니 자기 손에 들려있는 나머지 하나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BH 인베스트먼트, 그리고 고왕 건설의 선장을 위해.”

나는 기꺼이 그와 잔을 부딪쳤다.

찻잔 속 차는 마라톤 논의 끝에 차게 식어있었지만, 향기는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조 상무, 쓸만한 사람인 것 같더군요.”

“벌써부터 리스트를 만드시는 겁니까. 그 뭐라고 하더라··· 살생부?”

앨런이 웃으며 말했고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회장 개인에 대한 충정인지, 아니면 애사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심지가 있는 사람임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앨런이 농담처럼 입에 담은 살생부라는 말.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새로운 비전을 위해 큰 조정은 피할 수 없으리라.

분명히 솎아지는 쭉정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사권을 쥐고 함부로 칼춤을 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모든 것은 원칙과 필요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윤 회장의 사람이었더라도 능력을 갖추고 있다면 당연히 계속 끌고 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고왕 건설을 묵묵히 지탱해온 성실하고 평범한 직원들의 땀방울이 눈물로 바뀌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이사회가 마침표를 찍는 장소가 되겠군요. 그곳에서 모든 사실을 알게 될 윤 회장 측의 반발이 보통이 아닐 겁니다.”

앨런은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어차피 겪어야 할 진통 아니겠습니까. 이 정도로 판을 깔아놓고 그것도 제압하지 못한다면 한심한 일입니다. 애초에 고왕 건설을 여기까지 몰고 온 것은 윤 회장의 안일함이에요. 그 점에 대해서는 자비가 필요 없겠죠.”

나는 옷걸이에서 외투를 집어 걸쳐 입었다.

“앨런, 저는 오늘은 이만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혹시라도 고왕 측에서 메시지가 오면 연락해 주시고요.”

“무슨 일정이 있으십니까?”

“아까 앨런이 내가 고왕 건설의 선장이라고 했지만, 사실 진짜 선장은 제가 아니죠. 따로 있습니다.”

앨런이 무슨 소리를 하냐며 손바닥을 위로 든 채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옅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 그 선장님을 모시러 다녀오겠습니다.”

이사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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