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03화 (103/200)

103.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자들

서울의 원도심 중구.

혹자들은 이제 서울의 중심지는 엄연히 강남이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수많은 금융기관의 본사가 모여있는 이곳 중구가 여전히 대한민국 수도의 핵심 지역임을 대놓고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한신 은행 본사 역시 이곳에 있었다.

고왕 건설의 조 상무는 바로 그 거대한 건물 앞에 서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콘크리트로 지어진 빌딩이 지금 조 상무의 눈에는 마치 살아있는 괴물처럼 느껴졌다.

하기야, 피 대신 돈이 흐르고 있는 이곳.

조 상무의 감상이 영 틀린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천근같이 무거운 발을 떼어 건물의 입구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오늘 윤일중 회장의 특명을 받고 이곳을 방문한 그다.

가능성이 없는 일을 가능하게 만들라는 윤 회장의 지시에 어깨가 무거운 조 상무였다.

요즘처럼 사방에 아쉬운 소리를 해보기는 처음이었다.

‘어쩌다 회사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조 상무는 고왕 건설의 재무 분야의 총 관리 책임자.

그렇기에 사실 누구보다도 회사의 이상징후를 빠르게 눈치를 챈 것은 바로 그였다.

영업이익은 증가하고 있었지만, 부채는 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었다.

닥쳐올 위기에 대해서 윤 회장에게 진작에 즉보를 했지만, 윤일중 회장은 만사태평이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지만, 얼마든지 왜곡은 가능하다.

그리고 왜곡된 숫자는 사람의 눈을 어둡게 만든다.

윤 회장은 희망적인 수치만을 담은 보고를 다른 라인을 통해 듣고서는 오히려 조 상무를 질책하기에 이르렀다.

“하하하! 조 상무는 걱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그러게, 조 상무가 곳간 관리를 잘했어야지. 누가 들으면 주가 떨어질 소리 행여나 하지 말고. 장사 하루 이틀 하는가.”

어디 회장뿐이겠는가.

그동안 잘 헤쳐나왔으니 앞으로도 잘 될 거라는 근본 없는 예측.

전국 어디서나 찾을 볼 수 있는 당당한 고왕 건설의 심볼이 쉽게 무너질 리 없다는 낙관적 희망.

이것이 고왕 건설의 경영진에 만연해있는 위기의식의 부재였다.

“저··· 여신심사팀 강태진 팀장님을 뵈러 왔습니다만.”

“예, 성함이 어찌 되시죠?”

“고왕 건설 조영식 상무라고 합니다.”

“잠시만요.”

안내직원은 조 상무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데스크의 수화기를 들었다.

처지가 처지이다 보니 안내직원에게까지 위축되는 기분이 드는 조 상무였다.

“예, 데스크입니다. 고왕 건설에서 사람이 찾아오셨는데요. 아, 예··· 알겠습니다.”

조 상무의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내직원은 세상 평화로운 얼굴로 웃으며 그를 안내했다.

“상무님, 오른쪽 엘리베이터 이용하셔서 8층 회의실을 찾으시면 됩니다.”

“예. 감사합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조 상무는 자신이 해야 할 말들을 한 번 더 복기했다.

설득과 이해보다는 애원에 가까울 그 말들.

하지만 그것들이 효과가 있을는지는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자신이 없었다.

“상무님. 오셨습니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강태진 팀장이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팀장님, 염치 불고하고 이렇게 또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별말씀을요. 이쪽으로 가시죠.”

조 상무는 강 팀장을 따라 회의실로 들어갔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사실 술자리라도 한번 같이 하셔야 하는데···”

자리에 앉기 무섭게 조 상무는 강 팀장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혹시 아는가.

뒷돈을 얼마쯤 쥐여주고 젊은 여자라도 하나 품에 안겨주면 이야기가 달라질지.

“아이고, 제가 요즘 한약을 먹고 있어서 술은 입에도 못 댑니다. 와이프가 하도 성화라서요.”

“아무렴요. 당연히 건강을 챙기셔야죠.”

강 팀장은 웃는 낯으로 조 상무가 던진 낚싯바늘을 슬쩍 빠져나갔다.

“그나저나 오늘 오신 건은 역시 대출 때문이시겠지요?”

강 팀장은 즉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은행 쪽에서 지금 상황에 아쉬울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다 보니 이런 자리라면 당연히 오가기 마련인 외교적인 담화를 칼같이 잘라내 버린 것이다.

“예. 다시 한번 부탁의 말씀 좀 드리겠습니다.”

“··· 상무님. 사실 저희 은행은 저번에 말씀드렸던 것과 같은 입장입니다. 일단은 말이지요. 아시다시피 이건 저희뿐만 아니라 시중은행이라면 어디를 가도 다 같은 태도를 보일 겁니다.”

“저희 인력감축안은 확인해보셨습니까. 저희로서는 구조조정을 바탕으로 경영 개혁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생각입니다.”

“예. 읽어보았지요. 저도 직장인의 한 사람으로서 귀사의 상황에 대해서는 참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정말 뼈를 깎는 심정입니다. 임직원 모두가 회사를 살려보겠다고 안간힘을 쓰고 있어요. 사업도 수익성이 있는 공사 위주로 재편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상무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그래도 웃는 얼굴을 유지하던 강 팀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싸늘한 강태진의 얼굴에 조 상무의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허리뼈를 타고 흘러내렸다.

“대규모 감축에 따른 퇴직금은요? 그건 감당할 수 있으십니까? 그 액수만 해도 만만치 않으실 텐데요.”

조 상무는 말문이 턱 막혔다.

그래도 말을 멈출 수는 없었다.

뭐라도 떠들어야만 했다.

“브릿지론을 신청할 예정입니다. 단기로 자금을 확보하고···”

“글쎄요. 지금 브릿지론을 이용하시면 20% 수준의 초고금리를 요구할 텐데요.”

‘그러니까, 니들이 우리 숨통 좀 틔어달라는 거 아니야.’

조 상무는 차마 내뱉을 수 없는 말을 목구멍으로 꾹꾹 눌러 담았다.

“엇··· 뜨거워!”

급한 마음에 자신 앞에 놓인 차를 벌컥 들이마시던 조 상무는 그만 혀를 데어버렸다.

“아이고, 상무님.”

강 팀장은 테이블 위에 티슈를 몇 장 뽑아 건네며 조 상무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상무님. 사실 드릴만 한 소스가 하나 있긴 합니다. 어차피 아셔야 할 일이니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티슈로 와이셔츠를 급하게 닦아내다 조 상무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강 팀장이 말하는 뉘앙스가 지금까지와는 뭔가 다르다.

“소스라니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목마른 이가 우물 찾듯 조 상무는 간절하게 물었다.

“이건, 제 사견이 아니라 위에서 암묵적으로 내려온 오더입니다.”

강 팀장은 손가락을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그 위라는 게 도대체 어딘지 알 수 없었지만 조 상무는 순진하게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BH 인베스트먼트. 최근에 대주주 공시가 났지요?”

BH 인베스트먼트의 이름이 나오자 조 상무의 등은 더욱 빠르게 축축해져 갔다.

이 자들이 벌써 발 빠르게 채권자들과 접촉을 했단 말인가!

“그 투자 회사가 사주의 지분 일부 양도를 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BH 인베스트먼트의 비전이 행장님을 비롯해 임원진들에게 깊은 공감을 산 모양입니다. 하여.”

“··· 하여.”

저도 모르게 강 팀장의 끝말을 따라 하며 조 상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디까지나 제가 강권할 사안이 아니니 상무님이 참고만 해주십시오. 만약 고왕 건설의 경영권이 적절히 분배되면 만기가 된 PF대출을 신용 대출 형식으로 대환 가능할 것 같습니다.”

- 만약 윤 회장님 일가의 지분을 저희에게 일부 양도하시면 대출 연장 승인을 위해 힘을 써보겠습니다.

한영수는 자신이 한 말을 정확하게 지켜냈다.

대관절 BH 인베스트먼트, 그리고 한영수라는 젊은 놈은 정체가 뭐란 말인가.

벌써 이 사실을 윤 회장에게 어떻게 고해야 할지 고민이 되기 시작하는 조 상무였다.

***

그리고 같은 시간.

“허허! 이보시게. 내가 누군지 몰라?”

“알고 있습니다. 회장님.”

“알면 이러시면 곤란하지.”

윤일중 회장은 구 회장의 저택 앞에서 한 남자와 실랑이하고 있었다.

통칭 오 실장이라고 불리고 있는 그 남자는 구 회장의 집사이자, 비서, 그리고 경호원 역할까지 하는 자였다.

구 회장의 만나고 싶다는 윤 회장의 요청에 오 실장은 단호한 태도로 그를 제지했다.

“어르신께서는 누구라도 선약 없이 만나시지 않습니다. 실상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신 것도 불쾌하게 생각하실 겁니다.”

“내가 오죽 급하면 이러겠소. 오늘은 꼭 좀 회장님을 뵈어야겠네.”

“항상 최 사장을 통해 약속을 잡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쪽을 통해서 다른 날을 잡아보시지요.”

“허허, 이것 참.”

최 사장조차도 자신의 연락을 피하고 있다는 말을 차마 윤 회장은 제 입으로 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냄새나는 돈이나 만지는 주제들이 날 이리 괄시해?’

사람 좋은 척하는 가면을 벗어 던지고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은 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뭐래도 쩐이 있는 놈이 오야.

순간의 감정으로 모든 걸 망쳐버리기에는 윤 회장의 처지는 너무나 외롭고 각박했다.

“구 회장님께서는 현재 고왕 건설의 2대 주주이십니다. 회사 상황에 대해서 당연히 아셔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저희는 그것에 대해 말씀 올리고자 오늘 찾아온 것입니다.”

보다못해 이재석 부사장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오늘 윤 회장의 요청에 따라 그를 따라나선 참이었다.

그의 차분한 말에도 오 실장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야신이라도 빙의했는지 모든 말을 잘라내며 철벽수비를 하는 오 실장.

그의 벽을 넘지 못하고 결국 윤 회장과 이재석은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팔!”

회장 관용차인 벤츠 S 580은 최고급 세단의 교과서라는 말이 맞게 실내가 몹시나 고요했다.

그 탓에 윤 회장의 격정이 담긴 욕설은 차 안에 더 크게 울려 퍼졌다.

호인을 자처하기에 남들 앞에서는 언제나 체면이 최우선인 그의 입에서 나온 상스러운 소리에 운전대를 잡고 있던 기사가 어깨를 움찔했다.

“한창 회사가 잘 될 때는 서로 돈을 못 빌려줘서 안달들이더니···”

‘그거 좋다고 다 받아먹다가 이 지경이 된 거 아니야.’

이재석은 속마음은 감춘 채 일단은 윤 회장을 달랬다.

“회장님, 일단 조 상무가 오늘 은행들 한 바퀴 돌고 오기로 했으니 그쪽의 연락을 기다려보시지요.”

“도대체가 말이야. 이렇게까지 우리를 피하는 이유가 뭐냐고.”

윤일중은 구 회장으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한 분이 풀리지 않는지 좀처럼 감정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지금 누구보다도 회사의 사정이나 입장이 궁금할 텐데요. 도대체 왜···”

그때였다.

퍼뜩 이재석의 머릿속으로 한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구 회장의 행보에 대해 이미 의문을 가지고 있던 이재석이었다.

그런데 만약, 윤 회장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구 회장이 사실 우리 편이 아니라면?

이재석 부사장의 머릿속에 떠오른 하나의 가설은 순식간에 이어지는 시나리오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는 아귀 하나 빠진 것 없이 이치에 들어맞았다.

‘회장님은 그 한영수라는 자를 구 회장의 빨대의 사무실에서 만났다고 했지? 그렇다면 한영수 역시 구 회장과 인연이 있을 수도 있고···’

수면 아래서 한영수와 구 회장이 야합했다면?

아니, 실상 저 BH 인베스트먼트의 한영수는 그저 바지일 뿐이고 그 회사의 진짜 주인이 구 회장이라면?

뭐가 되었건 둘이 이미 배를 맞췄다면 10%라는 지분을 뺏기는 즉시 윤 회장은 최대 주주로서 지위를 박탈당하고 만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이재석의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이런 니미럴···”

이재석 부사장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 누구라 할 것도 없는 상대를 향해 욕설을 내뱉는 윤 회장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선들이 모여 그림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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