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02화 (102/200)

102. 판 짜기(2)

유호성 차관.

젊은 시절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을 읽고, 깊은 감탄을 한 그는 경제학도로서 시장자유주의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된다.

경쟁과 시장은 자생적인 질서이므로 정부는 그 자율성을 존중해야 한다.

이것이 그가 신봉하던 이론의 첫 번째 전제였다.

영민했던 그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행정고시에 합격하였으며, 행정부는 이 젊은 사상가를 나라의 예산을 만지는 부서로 발령을 내었다.

인사권자 입장에서는 유호성이 경제학으로 소문난 수재라고 하니 오늘날 기획재정부의 전신인 재정경제부로 발령을 낸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건 조금 우스운 일이었다.

시장의 자유를 그렇게 부르짖던 유호성이 정작 시장을 통제하고 계획하는 일을 하게 된 것이었다.

만약 보통 사람들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이상과 일, 둘 중에서 하나를 버리는 선택을 하겠지만 유호성은 그들과는 조금 달랐다.

현장에 몸을 담아보니, 유호성은 자신이 책으로 배운 것들에 얼마나 허점이 많은지 단박에 눈치를 챘다.

시장이라는 것은 결코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시장이란 것은 완벽했으나 그것을 어지럽히는 자들이 문제였다.

누군가 제지를 하지 않으면 암 덩어리들은 순식간에 장기 곳곳에 퍼져 시장을 죽이고 말리라.

그래서 유호성은 관료로서 자신이 시장의 수호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때때로는 메스를 드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그가 보았을 때 고왕 건설은 그런 암 덩어리 중 하나였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비전도 능력도 없는 사주가 독단적인 결정을 내리며 자리를 비키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무너져버리면 산업 전반에 미칠 후폭풍이 가볍지 않았기에 정부 차원에서도 주시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딜레마였다.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는 기업.

그런데 새로운 변수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BH 인베스트먼트.

때마침 이 BH 인베스트먼트의 대표라는 자가 유호성을 만나기를 원했고, 그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솔직히 젊은 대표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가는 구석이 있었다.

선 굵은 외모는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내뱉는 말에서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하지만 유호성이 경험한 바로는 이런 자들은 둘 중 하나였다.

천부적인 리더이거나 사기꾼이거나.

유호성은 직감할 수 있었다.

오늘 이 자리가 자기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자리가 되리라는 걸.

*

“그래서, 여기 행장님들과 제가 대표님의 지분 인수에 영향력을 행사해달란 이야기가 하고 싶은 겁니까?”

유호성 차관은 말을 돌리지 않았다.

분명히 그는 내가 원하는 본질을 꿰뚫고 있었지만,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서는 안 된다.

“아닙니다. 저는 대한민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기업을 함께 살려보자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말이라는 건 생각보다 힘이 굉장히 강하다.

나는 외나무다리를 걷듯 단어 하나, 하나를 신중하게 선택해야 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제각기 사회에서 한가락 한다는 자들.

기업을 인수하겠다는 나의 포부가 자칫 오만으로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유호성 차관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 자리의 진정한 실세는 다름 아닌 바로 그다.

그의 마음만 사로잡는다면 나머지 은행장 둘은 무조건 따라올 수밖에 없다.

“만약에 말입니다. 정말로 고왕 건설이 부도가 나기라도 한다면···”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일 그것.

나는 고왕 건설의 최후에 대해 입에 올렸다.

“은행은 받아야 할 돈을 받지 못하게 되겠지요. 정부는 시장에 미칠 여파를 고민해야 할 것이구요. 사람 목숨 몇 개가 왔다 갔다 하는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채권단이 자금 회수를 하루라도 빨리 서두르는 거 아닙니까.”

불퉁스러운 표정으로 정민준 행장이 말했다.

“그건 고왕 건설을 죽이는 일이지요. 황금알을 낳을 수도 있는 거위의 배를 너무 일찍 갈라버리는 일입니다.”

“황금알이라니···”

정 행장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 귀사에서 지금 이 시점에 고왕 건설의 지분을 사들이는 데는 나름 믿는 구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박석호 행장이 정 행장의 말을 이어받았는데, 그는 그래도 나를 향해 온건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나에 대한 신뢰의 표시라기보다는 한신 은행 계좌의 숫자에 대한 믿음이리라.

“제 앞으로 대규모의 채권을 발행할 예정입니다. 그 채권으로 긴급한 어음을 막을 생각이구요.”

“그래봐야, 언 발에 오줌 누기 아니요?”

“3천억 규모입니다. 절대로 적지 않은 액수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고왕 건설은 부채비율이 너무 높아요. 거기에 건설 경기가 좋아질 전망도 보이지 않고··· 그동안 담보 없이 사업 수익만 믿고 내어준 대출이 많아요.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이쯤에서 발을 빼고 싶다 이 말입니다.”

예상은 했지만, 반발이 보통이 아니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상황은 더 나빠지기만 하겠죠. ‘이대로’라면 말이죠.”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희 한신 은행도 안문 은행과 입장이 같습니다. 고왕 건설 측은 대규모 정리해고를 조건으로 대출 연장을 요구하더군요. 그런 미봉책으로는 계속 투자가 어렵다는 게 저희의 입장입니다.”

이 자리에는 채권자인 은행과 이해관계가 다른 이가 하나 있다.

나는 유호성 차관을 슬쩍 바라보았다.

“BH 인베스트먼트는 고왕 건설에 유의미한 경영권을 가지게 될 시에는 정부의 지침을 따를 생각입니다.”

별 생각 없이 이들을 불러낸 것이 아니다.

나의 말에 쌍수를 들어 손뼉을 칠 거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대신 나는 철저하게 준비했다.

건설 관련 정부의 정책 보도를 하나도 빠짐없이 검토했다.

심지어 유호성 차관의 성향을 알기 위해 그의 박사 논문까지 꼼꼼히 읽었을 정도다.

“현 정부의 해외 인프라 수주 활성화 전략을 인상 깊게 봤습니다. 5년 내 연간 500억 달러 수주를 목표로 하고 있다구요. 해외 인프라 지원공사의 자본금도 무려 4배나 늘리셨더군요. 거기에 발맞추어 저는 고왕 건설의 기존 사업 방향을 다시 모색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에 주택 사업 위주로 편성되어 세가 많이 줄어든 해외 사업부 위주로 기업을 재구성 하겠습니다.”

유호성 차관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래, 나는 당신의 적이 아니다.

지금 나를 위해 몇 마디 거든다면 앞으로 당신들이 세울 정책에 계산이 서도록 나도 돕겠다.

“특히 고유가에 맞물려 중동 특수를 누려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왕 건설의 기술력에 대해서는 여기 계신 어느 분들도 의심하지 않으실 겁니다. 저와 BH 인베스트는 고왕 건설을 제2의 중동붐을 이끌어나갈 선두 기업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럴듯한 소리지만, 결국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는 것 아닙니까. 말만으로는···”

“행장님. 죄송하지만 잠시만요···”

정 행장의 말을 유호성 차관이 잘랐다.

틀림없이 나의 말이 그의 구미에 당겼다는 의미일 테다.

“구체적인 계획안이 있습니까?”

“우선은 당장 지금의 위기를 넘기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당장 급한 불은 알아서 끄겠습니다. 대신 은행에서는 고왕 건설을 믿고 대출을 연장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납득할 정도의 금리 인상이라면 감수하겠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의 자금력에 구 회장의 손까지 빌린다면 고왕 건설이 당면한 어려움을 빠져나오는 것은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은행의 대출 승인을 통해 고왕 건설의 굳건함을 대외적으로 광고하고 싶었다.

“하지만 해외 수주는 아직 가능성만 있는 것이고, 고왕 건설이 지은 아파트는 줄줄이 미분양되고 있습니다. 은행에서 대출을 연장해준다고 해도 버틸 여력이 있습니까.”

“국내 사업을 모두 버리겠다는 건 당연히 아닙니다. 일례로 정부에서는 건설 경기 활성화를 위해 그린벨트 해제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역시 다양한 채널을 통해 내가 확보한 정보 중의 하나였다.

유호성은 나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아니, 관료로서 그가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건 사실상 내 말이 맞다는 것을 인정해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저의 비전이 정부와 일치한다면, 복구 사업에 고왕 건설도 앞장서서 힘을 쏟도록 하겠습니다.”

“글쎄요. 그건 국토교통부가 알아서 할 일이라···”

“그리고 그 예산은 모두 기재부에서 나오고 있구요.”

어쨌든 정부는 고왕 건설이 망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고왕 건설이 그들의 정책에 쓸만한 장기 말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

그게 내가 노리는 바였다.

상대에게 필요한 사람이 돼라. 그러면 상대는 결코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영업맨 시절부터 항상 가슴에 품고 살던 금과옥조였다.

“··· 준비를 많이 하셨군요.”

유 차관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박 행장님?”

유호성 차관이 박성호 행장을 불렀다.

“뭐, 여기까지 말이 나왔으니 숨길 필요도 없겠지요. 아까 박 행장님의 입으로 말씀해주셨습니다. 여기 한 대표님의 자산에 말입니다. 그 정도 뒷배가 들어온다면 고왕 건설의 안정성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검토해보실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차관님 하지만···”

안문 은행의 정 행장이 떨떠름한 듯 말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한 대표의 말처럼 고왕 건설이 부도라도 난다면 사회적 비용 문제는 정부만의 책임이 아닐 겁니다.”

유 차관의 경고에 정 행장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하기야, 정부로서는 공적자금 투입까지 고민하고 있었을 텐데 이 시기에 등장한 내가 이뻐 보이지 않을 리 없다.

심지어 자신들의 이해를 충실히 따르겠다고까지 말을 하고 있으니.

이제야 판이 다 깔렸구나.

윤일중 회장은 더 외로워졌고, 나는 기세를 탔다.

이제 그는 자신의 지분을 나에게 내놓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표를 찍으면 된다.

구 씨 부자의 등장으로.

유 차관의 중재 끝에 더 이상 이견이 나오지 않았다.

얼마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더 나누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대표님. 잠시만.”

두 명의 은행장이 먼저 대문 밖을 나섰을 때, 마당에서 유호성 차관이 나를 잡았다.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한 대표님의 말을 듣다 보니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기더군요.”

“예? 어떤···”

“2대 주주면 충분하다던 한 대표님의 말. 그게 정말 진심입니까?”

“...”

“이미 고왕의 우두머리라도 된 것 같은 포부더군요. 한 대표님 말입니다.”

“차관님의 박사 논문을 참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나는 유 차관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다른 소리를 했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 기업 내부의 견제를 통해서 시장의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주장. 저 역시 깊게 공감했습니다.”

유호성 차관은 잠시 말이 없었다.

얼마간 침묵을 지키던 그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겠습니다. 한 대표님 생각대로 일들이 잘 풀리기를 기원합니다. 혹시 알겠습니까. 한 대표님의 말처럼 고왕 건설이 정말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지."

"그렇게 되어야지요. 오늘 자리가 의미가 있도록."

나는 유 차관의 손을 맞잡았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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