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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억을 상속받았다-101화 (101/200)

101. 판 짜기 (1)

명동의 한옥집.

나는 오늘 여기서 특별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드시 한번은 만나고 넘어갔어야 할 이들과의 자리는 최화란의 연줄을 통해 성사되었다.

“한 대표. 내가 자리는 만들어줄 수 있어. 하지만 그 사람들은 선생님이나 구 회장님과는 또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그랬다.

내가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한민국 제도권 금융의 정점에서 이 나라의 통화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거물들.

몇몇 인사를 콕 찍어 말하는 나에게 최화란은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만, 나 역시 한 대표가 말하는 사람들과 직접 통하는 건 아니야. 몇 다리쯤은 걸쳐야 해. 그리고 그 작업을 하려면··· 알지? 떠먹여 줘야 할 게 있다는 걸. 영수증이 남지 않는 그런 종류로 말이야.”

“그 부분이라면 최 이사님에게 맡기겠습니다. 필요한 비용은 나중에 저한테 청구하세요.”

나는 최화란에게 어떤 방법으로 돈을 쓸 것인지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그녀만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필시 나와는 맞지 않는 종류일 텐데, 그런 것이라면 내가 모르는 것이 낫다.

“그래도 역시 최 이사님의 인맥이 보통이 아니군요.”

최화란은 내가 너스레를 떨자 붉은 입술을 씰룩이며 피식 웃었다.

“··· 참 이상하단 말이야.”

“뭐가요.”

“기분이 말이야. 나 말이야, 자기한테 좋은 소리라도 한마디 들으면 꼭 대단한 상이라도 받는 것 같다? 꼭 국민학교 때 운동회에서 등수 안에 들었다고 상으로 공책 타는 것처럼.”

“이사님.”

“응?”

“국민학교라는 말은 좀··· 나이가 짐작되잖아요.”

최화란은 손바닥으로 내 어깨를 한 대 찰싹 쳤다.

“진짜 그렇게 매너 없이 굴 거야?”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녀처럼 얼마간 깔깔 웃던 최화란은 이내 다시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돈 심부름을 하다 보면 자연히 마당발이 되는 법이지. 그런데 네가 찍은 사람들, 성향상 나랑은 친해질 수가 없는 종류의 인간들이야.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 소개까지. 오케이?”

“네. 그 정도면 충분해요. 아니, 훌륭하죠.”

“그런데 그 사람들을 어떻게 꾀려고? 떡이라도 돌릴 생각이야?”

최화란이 유독 한 단어에 힘을 주며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렸다.

“양지에 사는 양반들인데 양지의 방법으로 해결해야죠.”

“양지는 무슨··· 그거 알아? 앞에서 점잔빼는 양반들이 뒷구멍으로는 세상에서 제일 더럽게 노는 거?”

그녀의 말을 듣자 문득 정식 모터스에서 영업맨을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간혹, 원청업체에서 나온 자들 중에 노골적으로 음성적인 접대를 바라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에겐 납품 업체의 물건의 질보다는 자신의 하룻밤을 얼마나 만족시켜주는 지가 계약의 절대적인 조건이었다.

뭐, 다행히 그런 쪽으로 방패막이가 하나 있긴 했다.

바로 임홍빈 차장.

“야, 한 대리. 됐어. 넌 빠져. 한 대리는 아직 멀었다. 이게 진짜 영업이야. 물 한번 시원하게 빼주잖아? 그 뒤로는 형님, 동생 하는 거야.”

동종끼리는 서로를 알아보기라도 하는지, 그런 접대 자리라도 있을 터면 임 차장은 만사를 제쳐놓고 뛰어들었다.

회사안에서 몇 안 되는 임 차장의 쓸모였다.

“그럴 일 없을 거예요. 복희 할머니의 집에서 만날 거니까.”

흐응━

최화란이 콧소리를 내었다.

“그런 식으로 위력을 과시하겠다?”

“당신께서는 과거에도, 앞으로도 나의 가장 든든한 뒷배니까요.”

*끼익━

대문이 열리고 남자들이 마당에서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왔구나.

내가 오늘 만나야 할 사람은 세 명.

그들은 약속한 제 시간을 어기지 않고 이곳에 나타났다.

방 안에 앉아있던 나는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여기가 그 명동 사채 시장 여왕인 차 여사가 살던 곳입니까?”

“예. 저는 05년도인가, 그때 한 번 실제로 뵌 적이 있으셨죠. 은행이 일본 자본에 넘어가기 직전이었는데 차 여사님이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생각보다 집이 아담하네요. 많이 검소하셨구만.”

“그나저나 오늘 우리를 보자고 한 친구는 대관절 누구인가요?”

“본인은 투자 회사 대표라고 하는데 이 집에서 보자고 한 거 보니 아마도···”

“차관님 놀라지 마시지요. 재산을 확인해 봤는데 무려···”

아마도 이 세 남자는 서로 간에 안면이 있으리라.

남자들의 대화가 점점 잦아지며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쯤 나는 창호 문을 열고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십니까. 귀한 분들을 누추한 곳에 모시게 되어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BH 인베스트먼트의 대표이사 한영수라고 합니다.”

이들은 누구인가.

후덕한 체형의 중년의 사내 둘은 소위 말하는 대한민국 4대 은행 중 두 곳의 은행장이었다.

그리고, 그들과 대비되게 강퍅한 인상의 남자는 이 나라 경제관료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기획 재정부 차관이었다.

일반적인 시민이라면 살면서 결코 일적으로 마주칠 리가 없는 이들이었다.

나는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여유 있는 걸음걸이로 마당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명함을 한 장씩 건네곤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오늘 이들에게 건전한 청년 자본가의 모습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들의 권세에 천박하게 몸을 납작 엎드리기보다는 예의는 지키되 당당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훨씬 나으리라.

은행장들은 몸에 밴 직업적 습성 탓인지 지극히 외교적인 몸짓으로 나의 명함을 접수했다.

그런데 조금 의외였던 것은 기재부의 최고위 관료 유호성이었다.

기획재정부 2차관 유호성.

속된 말로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기재부의 5급 사무관은 타 부처의 장관과 감히 맞짱도 뜰 수 있다고 한다.

그만큼 이 나라의 예산의 주물럭거리는 기획재정부의 파워가 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46살의 유호성이라는 남자는 기재부에서도 예산실과 경제정책국 같은 요직만을 거쳐 지금의 2차관 자리에까지 올랐다.

한마디로 엘리트 중의 엘리트.

당연히 어디를 가건 융숭한 대접만을 받았을 것이고, 고개를 뻣뻣하게 들 법도 하다.

그런데, 이 남자.

내 예상 밖으로 그러지 않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기획재정부 유호성이라고 합니다.”

나보다 허리를 더 깊게 숙여 인사하는 그를 보며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저는 한 대표님이 구면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어르신의 장례식에 조문을 갔었지요. 한신 은행장 박석호라고 합니다.”

그때, 행장 한 명이 나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아무리 기억력이 하나는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나지만 장례식장에서는 어지간히 멘탈이 나가 있었다.

그렇기에 구면이라고 말하는 박석호 행장과는 달리 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물론 최화란으로부터 사전에 받은 프로필로 이들의 얼굴과 이력쯤은 이미 모두 외워둔 터.

“예. 행장님. 고인의 마지막을 함께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박석호 행장이 나에게 이렇게 사근사근하게 구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한신 은행에는 생부와 복희 할머니로부터 받은 유산이 모두 고스란히 잠들어 있었다.

박 행장에게 있어서 개인으로서 나는 최고의 VIP인 셈.

그는 이미 그 점을 미리 확인하고 이곳에 왔으리라.

“안문 은행 정민준입니다.”

나머지 은행장 한 명도 나와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했다.

“자, 들어가시지요. 날이 춥습니다.”

나는 그들을 안방으로 안내했다.

우리 네 사람은 고풍스러운 탁자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앉았다.

나는 미리 뜨겁게 데워놓은 도기로 향이 기가 막힌 차를 한 잔씩 손님들에게 따라 주었다.

“마리아쥬 프레르 홍차로군요.”

“네, 맞습니다.”

유호성 차관은 입술을 적실 정도로만 차에 입을 대고도 용케 브랜드까지 정확하게 맞추었다.

“차관님은 역시 취향이··· 향은 좋다고 생각했는데 저는 이게 뭔지도 몰랐습니다.”

“허허, 저도 이참에 커피를 줄이고 차로 바꿔볼까요.”

은행장 둘은 유 차관의 비위를 맞추겠다고 영양가 없는 소리를 해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우리는 여기에 다과회나 하자고 모인 것이 아니었다.

세 남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이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데만 거의 중형차 한 대값이 들었다.

그만큼 금쪽같은 자리였다.

이젠 호스트로서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수행해야 하리라.

“공사다망하신 분들을 이 자리에서 뵙고자 한 연유부터 말씀드려야겠군요.”

손님들은 나의 입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저를 포함해 여기 계신 분들에게는 공통된 골칫거리가 하나 있습니다.”

“고왕 건설··· 말입니까.”

박석호 행장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박 행장님과 정 행장님 두 분은 고왕 건설의 채권자이기도 한 은행을 대표하시니 최근에 지분 변동이 있었던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뭐, 한 대표의 투자 회사가 소소하게 지분을 늘려가고 있는 것은 알고 있소만.”

정 행장이 뜨뜻미지근하게 말했다.

“5.6%입니다. 행장님. 그리고 지분을 계속 늘려나갈 생각이고요.”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정 행장에게 말했다.

“늘린다면 어느 정도까지?”

박성호 행장이 찻잔을 든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돌려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2대 주주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경영진과 이사회에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반은 거짓말이고, 반은 진심.

돈 귀신들 앞에서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도록 나는 의식적으로 노력을 해야 했다.

나의 당돌한 발언에 발언이 두 은행장에게는 꽤 신선한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정 행장은 차를 목으로 넘기다 사례가 걸려 캑캑대었으며, 박성호 행장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바람 없는 호수처럼 잔잔했던 것은 유호성 차관뿐이었다.

그는 나에게 자신을 소개하던 그때처럼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동산 정책은 정부의 성공과 실패를 좌지우지합니다. 가만히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군요. 자본금은 어디서 충당하실 생각입니까.”

차분한 말투를 앞세웠지만 유 차관의 눈은 매서웠다.

그의 눈빛이 말하는 바는 알고 있었다.

유호성 차관은 지금 묻고 있는 것이다.

너는 위기 상황에 등판한 구원투수냐, 아니면 썩은 고기 냄새를 맡고 나타난 하이에나냐.

“약간의 투자금을 제외하면 전부 90% 이상은 제 개인 자산에서 나온다고 보시면 됩니다. 순수 국내 자본이고, 부채는 제로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박 행장님께서 확인해 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호성은 내 얼굴에서 눈을 거두어 박성호를 바라보았다.

박성호는 보일 듯 말 듯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면, 한 대표가 고왕 건설의 채무를 모두 갚아주기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정 행장은 꽤 성미가 급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그는 잘 걸렸다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일단 급한 것부터 이야기합시다. 고왕 건설이 우리 은행에 주식 담보대출이 있는 건 아시지요?”

“예. 알고 있습니다. 2,300억 규모의.”

“그 대출의 약정에 고왕 건설의 주가가 일만 이천 원에 이르면 즉시 상환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주가를 보자면 조만간 일 것 같습니다만.”

내가 처음 고왕 건설에 관심을 가졌을 때만 해도 주가는 이만 원 위에서 형성되어 있었다.

오늘 날짜로 그 주가는 만 삼천오백 원.

정민준 행장의 말마따나 이 기세면 당장 이번 주라도 만 이천 원은 물론이요, 그 아래까지도 충분히 깨질 기세였다.

“주주의 한 사람으로서 그런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안문 은행의 채무를 우선 갚겠습니다.”

“약속하실 수 있습니까.”

“행장님. 저야 지금 고왕에서의 입지가 딱 5% 그 정도입니다. 그런 저의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만, 저는 고왕의 최대 주주인 윤일중 회장님께 지분 일부 양도를 요청했습니다. 그 요청이 받아들여진다면 그제야 이 자리에서 하는 말들이 의미가 있겠지요.”

좌중의 사내들을 눈으로 한 번씩 훑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할 차례였다.

오늘 이 자들이 반드시 내 손을 들어주도록 만들어야 한다.

판 짜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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