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티몬과 품바
‘와, 저 여자 엄청 예쁘네. 장난 아닌데? 처음 보는 사람 같은데 어느 부서지?’
오준호 대리는 고윤아를 보며 속으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검은 눈동자에 오똑한 코까지.
도회적인 매력이 넘치는 여자였다.
평소에 세련된 스타일을 좋아하던 오 대리로서는 거의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
고왕 건설은 업계 특성상 남초 조직에 가까웠다.
여자 직원의 비중이래야 채 20%도 되지 않았다.
오준호 대리는 안타깝게도 솔로 부대의 일원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몇 안 되는 여직원들에게 관심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었다.
‘··· 신입사원인가? 인턴? 하긴 최근에 공채 뽑은 지 얼마 안 되었지?’
저 아름다운 뉴 페이스는 도대체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오준호는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물론 고윤아의 목에는 방문증이 걸려있었다.
하지만 오준호는 겨우 얼굴이나 힐끔거렸을 뿐이지 그녀의 가슴께에 있는 방문증을 쳐다볼 무모한 용기는 없었다.
그런데, 여자 앞에 있는 남자도 범상치 않았다.
당당한 체구에 누가 봐도 인물 좋다는 말이 절로 나올만한 외모.
‘에이씨··· 둘이 커플인가?’
오 대리는 저도 모르게 슬슬 불룩하게 잡히기 시작하는 자기 아랫배를 슬쩍 꼬집어 보았다.
끊어만 놓고 채 열 번도 나가지 않은 헬스장이 생각났다.
그렇게 다시 헬스를 나갈까 말까 고민을 하던 찰나,
“오 대리, 밥 먹자.”
오준호는 자신의 앞에 앉아 수저를 들고 있는 김영남 차장의 말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김영남과 오준호.
그들은 고왕 건설 건축사업본부 그룹사업 3팀 소속의 회사원이었다.
이 둘은 사실 회사 내에서 조금 기묘하다고 할 수 있는 조합이었다.
김영남은 올해로 회사 생활 24년 차에 접어든 베테랑이었다.
직급과 연차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듯이 진급이 남들보다 뒤처져있었는데, 입사 동기 중 유일하게 아직 차장에 머물러 있었다.
그의 진급이 늦어지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과묵한 편에 속하는 그는 어쩌다 입을 열면 바른 소리 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부하직원들로부터 꿀 같은 말만 듣는데 익숙한 김영남의 상사들이 그런 그를 예쁘게 볼 리가 없었다.
그래서 훌륭한 실적에도 김 차장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진급에서 밀리기 일쑤였다.
“김 차장은 다 좋은데, 유도리가 하나도 없어. 사람이 뭐 그리 꽉 막혔어? 그런 양반이 무슨 이 업계에 붙어 있겠다고···”
임원들의 입에 가끔 그의 이름이 올라오면 으레 나오는 하마평이었다.
그런가 하면, 오준호 대리는 김 차장과 정반대의 성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작년에 대리를 단 그는 다소 경박하다고 느껴질 만큼 무게감이 부족한 남자였다.
그래도 마냥 가벼운 사람만은 아닌 것이, 일에 대해서만은 진심이었다.
그런 오 대리가 보기에 고독한 연구원 스타일인 김영남 차장은 배울 게 참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준호는 김영남을 졸졸 따라다녔다.
김 차장은 처음엔 회사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자신을 쫓아봐야 직장 생활에 득 될 것이 없다며 오준호를 밀어냈었다.
하지만 계속 자신에게 치근대며 살갑게 구는 후배를 어찌하랴.
이것저것 물어오는 오준호에게 자기가 회사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것들을 조금씩 풀게 되었고, 어느새 둘은 일종의 콤비가 되어버렸다.
의외로 둘은 짝이 잘 맞았다.
서로 다른, 정반대의 성격이 외려 긍정적인 시너지를 내었다.
회사에서 그 둘을 뒤에서 부르는 별칭은 ‘티몬과 품바’
여하튼 김 차장은 티 나게 남을 힐끔거리는 오준호에게 눈 조심하라는 경고를 밥 먹자는 말로 돌려 말한 것이었다.
마침내 고개가 앞을 향한 오 대리는 밥숟갈을 들기 무섭게 우는소리를 해댔다.
구조조정.
사실 오준호의 입을 통해 들을 것도 없었다.
이미 인력 감축에 대한 소문은 회사에 파다하게 퍼져있는 상황.
총무 담당이 대규모의 구조조정을 조건으로 모 은행에 대출 연장을 읍소했다는 구체적인 썰까지 돌고 있었다.
‘IMF도 견딘 회사인데···’
김 차장이 막 입사했을 무렵은 딱 대한민국이 구제금융의 한복판에 있었을 때이다.
모두가 취업에 어려움을 겪으며 전전긍긍할 때, 바늘구멍 같던 입사에 성공해서 뿌듯해하던 그 젊은 날이 아직 생생히 기억나는 그다.
하지만 체감상으론 그때보다 지금이 분위기가 더 흉흉한 것 같았다.
오준호에게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꾸중 아닌 꾸중을 했지만, 사실 요즘 그는 밤잠도 설치고 있었다.
과연 이 회사에서 더 버틸 수 있을 것인가.
붙임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자신이 정리해고의 명단에 제일 첫 번째로 들어가는 건 아닐까?
최근 들어 부장이 김 차장을 보는 시선이 영 마뜩잖았다.
마치 꼬투리를 잡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아무리 생각해도 조만간 닥쳐올 혹독한 칼춤을 도저히 피할 도리가 없을 것 같았다.
침대에 누우면 군대에 있는 첫째와 이제 막 대학에 들어간 둘째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이들과 회사안의 미래와 연관 지어 생각하면 가슴을 커다란 돌덩이가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았다.
‘저 녀석은 살아남아야지··· 그래. 팀에서 한 명만 내보내면 그만이지, 그 이상으로 잘라내겠어···’
김 차장은 고개를 들어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오 대리를 잠시 바라보았다.
나온 화제가 어디 보통 화제인가.
김영남 차장은 그만 입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
그래서일까?
그는 자신의 안에 뭘 집어넣는 대신에, 수저를 내려놓고 말로서 안에 있는 것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회사가 너무 사업을 단일화시켜버렸어. 우리가 한창 좋을 때는 건축사업본부가 참 컸단 말이야. 해외 사업도 많이 했고, 달러벌이로 회사를 끌어간다는 자부심도 있었고 말이야.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주택사업에만 올인을 해버렸으니···”
“차장님, 그래도 아파트 덕에 우리 회사가 도급 순위 상위권을 유지하는 거잖아요. 뭐, 저도 건축사업본부 소속으로 할 말은 아니지만···”
김영남은 오준호의 대꾸에 입을 꾹 다물었다.
물론 오준호의 말이 영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김영남이 보기에 아파트 사업은 그 공(公)이 찬란한 만큼이나 그늘도 짙었다.
관례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온갖 부정들, 하도급을 상대로 한 갑질, 그리고 건설노조들과 피할 수 없이 계속되는 소모적인 분쟁까지.
명품을 운운하며 대한민국 최고의 아파트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윤일중 회장의 야심은 주택사업본부에 회사의 모든 힘을 실어주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10년 가깝게 이어져 온 부동산의 호황에 힘입어 고왕 건설의 경영은 점차 방만해져 갔다.
남의 돈으로 사업을 하는데 거리낌이 없었으며, 사업을 하면서 벌어지는 병폐들을 일종의 매몰 비용으로 치부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렇게 쌓여있던 화약들이 최근 일련의 사태가 뇌관이 되어 모두 펑━ 터져버리게 된 것이다.
“내 말은 수익 창구를 진작에 다양화 해야 했다는 거야. 작년에 베트남에 현수교 짓는 것도 말이야. 수익성이 없다고 애초에 수주를 포기해버렸지. 참 아쉬운 결정이야. 그런 사업들이 모여서 연속성을 가지게 되는 건데···”
“언제부턴가 우리 부가 임원들의 무덤이 되어버렸으니까요. 목소리 좀 크게 낼 수 있는 강성이 와야 할 텐데요.”
김영남 차장은 씁쓸하게 웃었다.
해외 사업 활성화를 위한 안을 몇 번이고 제시했지만, 그때마다 면박만 당했다.
회사가 의지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미운털이 박혔기 때문인지 그 이유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고왕 건설은 어디에다 내놓아도 남부럽지 않은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경영진은 왜 국내 시장만 한정해서 생각하는지 김 차장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임원이 바뀐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 회장님이 넓은 시야로 결단을 내리셔야지···”
김영남은 혼잣말하듯 작게 읊조렸다.
위험수위를 넘어서는 발언을 한 것인가 싶어 아차 싶었지만, 뭐 어떠랴.
막상 뱉어놓으니 사이다를 양껏 들이켠 듯 속 시원한 것도 있었다.
“터키 원자력 건설 건도 참 괜찮은 먹거리였는데. 그것도 위에서 그냥 잘라버렸잖아요. 프레젠테이션 준비하느라 차장님이 참 고생 많이 하셨는데.”
무섭도록 싸늘했던 그 날의 본부장과 팀장들의 시선을 김 차장은 아직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귀를 틀어막고 있는 상대에게 무슨 소리를 한들 먹히겠는가.
아니, 그들은 그 정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회사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있는데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는 김 차장을 정신 나간 인사로 여겼을 것이다.
“내가 뭘··· 오 대리야말로 옆에서 헛심만 썼지.”
“그거 태상건설이 홀랑 가져갔잖아요. 수주액이 얼마라고 그랬죠?”
“24억 달러.”
“다들 눈뜬장님들도 아니고···”
오준호는 천장을 바라보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밥 먹자. 다 식는다.”
아닌 게 아니라 국그릇은 빠르게 온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김 차장은 국을 뜨다 수저에 걸린 콩나물 몇 가닥을 고개를 숙이고 바라보았다.
축 늘어진 콩나물이 꼭 자기의 처지처럼 느껴져 측은했다.
그때였다.
“어, 상무님. 식사하십니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오준호가 누군가를 향해 90도로 인사를 했다.
경영지원 본부장 조원일 상무였다.
조 상무는 다른 임원들과 달리 종종 점심을 팀장들과 구내식당에서 해결하곤 했다.
‘미팅이 신통치 않게 끝났나 보군.’
조 상무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그건 그의 뒤를 따르는 팀장들도 마찬가지였다.
김영남도 쥐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조 상무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어, 김 차장. 그리고···”
조 상무는 오준호의 목에 걸려있는 사원증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래. 오대리. 식사들 하세요.”
그렇게 무심히 스쳐 가려나 했더니, 조 상무가 놀란 눈을 하고 자리에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이 오준호가 열심히 훔쳐보던 여자와 그 앞에 앉아있는 남자를 향했다.
“아니··· 어떻게.”
김영남과 오준호가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있을 때, 조 상무가 남자를 향해 말을 걸었다.
“아, 상무님. 마침 점심시간이라, 구내식당 좀 이용했습니다. 따로 계산은 하고 들어왔는데 혹시 외부인이 이용해서는 안 되나요?”
“아··· 그럴 리가요. 그러고 보니 저희가 큰 결례를 했습니다. 당연히 따로 식사 자리를 마련했어야 하는데···”
“괜찮습니다. 오히려 저희가 모셔야죠. 그리고 또 앞으로 기회가 많지 않겠습니까?”
“이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구내식당이 식사가 정말 잘 나오네요. 회사 차원에서 신경을 많이 쓰시는 것 같습니다.”
고왕 건설, 아니 그룹 전체를 따져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권력자인 조 상무가 눈앞의 사내에게 쩔쩔매고 있다.
그것도 기껏해야 오 대리 뻘인 새파란 젊은 남자에게.
이 상황의 의미가 순식간에 정리된 김영남이었다.
‘이런··· 오 대리보고 진작에 눈 돌리라고 할걸.’
오준호 역시 그와 생각이 일치했는지, 조 상무의 태도를 보고 사례라도 들린 듯 큼큼 마른기침을 해댔다.
“그럼···”
“예. 상무님. 식사하시지요.”
조 상무와 젊은 남자는 어색한 대화를 마치고 서로에게 인사를 다시 한번 했다.
조 상무가 자리를 비키자 남자는 앞에 앉아있는 여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윤아야. 우리 그만 일어날까?”
“예. 영수 님.”
그리고 김영남 차장은 분명히 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자신과 오 대리의 사원증을 한 번씩 돌아가며 유심히 보고선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판 짜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