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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억을 상속받았다-99화 (99/200)

99. wring out

회의실을 나오자 묵 뒤쪽 어딘가에서 뻐근함이 느껴졌다.

최대한 상대의 앞에서 태연한 척을 했지만 나 역시 사람이다.

몸은 거짓말을 못 하는 법이라, 회의실 안에서 내가 꽤 긴장했었다는 걸 유쾌하지 않은 통증으로 알려주었다.

손바닥을 턱에 대고 목을 양쪽으로 반 바퀴씩 돌려보았다.

투득━

딱 뭉쳐있는 그 부위에서 관절과 관절이 살짝 맞물리며 나는, 썩 듣기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소리가 났다.

문득 고왕 건설의 일원들이 날 향해 뿜어내던 안광(眼光)들이 떠올랐다.

미스테리한 인물인 나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아내겠다는 것처럼 그들의 동공은 눈 안에서 좀처럼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어디 그뿐이랴.

그 눈동자들은 변극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시시각각으로 품고 있는 감정의 색과 온도를 바꾸었다.

적의에서 절망으로,

절망에서 또다시 희망으로.

마지막으로 윤 회장의 눈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당혹과 공포였다.

“미스터 오닐, 그리고 영수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윤아가 나와 앨런을 불렀다.

“윤 회장에게 말한 것 말입니다. 시가보다 30% 할인된 가격에 양도받겠다는.”

“응, 그게 왜?”

“세법에서는 주식을 양도할 때 시세와 30% 차익이 나면 특수관계인 여부를 따지지 않고 증여로 간주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법인세를 물려야 합니다. 알고 계십니까?”

나는 고개를 가만히 주억거렸다.

“그 숫자는 예시에 지나지 않아. 우리의 입장이 단호하다는 걸 알리기 위해 일부러 고른 숫자야. 이제 첫 번째 만남일 뿐이야. 저쪽에서 협상을 제안하겠지. 애초에 윤 회장이 우리가 제시한 가격에 지분을 내놓을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었어.”

이번엔 앨런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미스터 한, 그런데 얼마나 윤 회장을··· 그러니까, wring out. 변호사님 한국어로 이게 적절한 표현이 뭡니까?”

“쥐어 짜낸다.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Yes. 얼마나 쥐어 짜낼 생각입니다. 윤 회장 쪽에선 우리의 압박이 너무 거셀 경우엔 다른 매각 상대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블록딜 형태로 거래하면 할인율은 7% 안팎일 테니까요.”

쥐어 짜낸다라.

사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조금이라도 더 싼 가격에 지분을 사들이려고 노력하는 것이 맞지만, 그보다 나는 윤 회장이 자신의 위기에 대해 끊임없이 상상하게 되길 원했다.

때론 상상이 실제보다 더 고통스러운 법이니까.

그 고통 속에서 자신의 처지를 절감하기를 바랐다.

“아니요. 그런 식의 접근은 선후 관계가 맞지 않습니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윤 회장은 지금 자발적으로 본인 지분을 내놓으려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제시한 조건 탓에 울며 겨자 먹기로 매를 맞고 있는 것이지. 지분 매입을 담보로 우리 같은 조건을 제시할 기관이나 외인, 혹은 다른 기업이 있습니까?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에요. 제 한 몸 추스르기도 급급한.”

앨런은 말없이 몇 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블록딜은 시간 외에 대량 매매를 하는 것을 뜻하죠?”

“맞습니다. 장중에 대량 물량이 쏟아져 주가의 급등락을 막기 위한 기법이지요.”

“블록딜도 결국 시장 안에서 거래하는 것인데··· 설령 윤 회장이 지분을 매도한다고 해도 절대 그 방법을 통하지는 않을 거예요. 주가를 생각해서라도요.”

코에 걸친 안경테를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앨런이 말했다.

“하긴, 유통 물량에 잡히지 않는 대주주의 지분이 시장에 풀려버리는 격이니, 가뜩이나 고전을 면치 못하는 고왕 건설의 주가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겠군요.”

“예. 분명히 윤 회장은 시장 밖에서 우리와 협상하려고 할 겁니다.”

“그런데···”

앨런이 잠시 말을 잇지 않고 머뭇거렸다.

뭔가 주저하는 모양새가 찝찝함, 또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미스터 한. 3천억 상당의 채권은 그렇다 치고, 정말 은행가들을 설득할 방법이 있는 겁니까? 고왕 건설도 이미 은행 쪽과 많은 딜을 보았을 겁니다. 그리고 전부 실패했고요. 그들도 못 한 일을 해낼 수 있겠어요?”

“당연히···”

앨런과 고윤아의 눈이 나에게 몰렸다.

“제가 뭐라고 그걸 덜컥 해낼 수 있겠어요.”

“··· 예?”

날 보던 앨런의 눈이 놀란 토끼의 그것이 되었다.

나만 믿고 윤 회장과 임원들 앞에서 호언장담을 했는데 이거, 뒤통수라도 한 대 맞았다는 표정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뻥카로 배팅한 것 아니니까. 저야 뭐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지만, 다행히 제가 쌓아온 인연들이 가지고 있는 힘은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그 힘을 빌려야죠.”

“아아···”

앨런은 그제야 어느정도 한시름 마음이 놓인다는 듯 한숨을 작게 폭 내쉬었다.

“그런데 미스터 한의 말에는 잘못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 뭡니까, 그게.”

“미스터 한은 결코 별 볼일 사람이 아닙니다.”

즐거운 농담이라도 생각났다는 듯 앨런의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저같이 숫자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보지 못하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안목. 미스터 한은 누구보다도 거기에 강점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건 학습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한국말로는 그걸 그릇이라고 표현합니다.”

고윤아도 싱긋 웃으며 재빠르게 내 칭찬에 숟가락을 올렸다.

허, 참.

이 사람들이.

무안함에 뒤통수가 뜨거워졌다.

말한 사람 민망하게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맞다고는 더더욱 못 할 일이고.

결국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다행이랄까.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적절하게 도착해서 우리 앞에 입을 벌렸다.

“앨런, 먼저 사무실 돌아가시겠어요? 저는 고 변호사와 여기 회사 분위기 좀 보고 들어가고 싶은데.”

“회사 분위기요?”

“예. 또 마침 점심시간이네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앨런을 향해 씩━ 웃어 보이곤 1층, 그리고 구내식당이 있는 5층 버튼을 눌렀다.

*시침이 아직 숫자 12를 미처 가리키지 못한 시간.

구내식당은 젖니가 빠지기 시작한 아이의 잇몸처럼 한산하기만 했다.

사원들이 드문드문 자리를 잡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회사의 사정이 영 좋지 않아서일까, 밥을 먹는 직원들의 표정도 그와 마찬가지로 밝지 않았다.

아니, 사실 그들은 딱히 표정이랄 것도 짓고 있지 않았다.

무표정하게 수저를 드는 그들은, 비유자면 마치 차가 달릴 수 있게 목구멍이라는 주입구로 기름을 주유를 하는 것 같았다.

그 탓에 국내 굴지의 건설사의 건물 안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게 무채색으로 통일된 구내식당은 더욱 칙칙해 보였다.

“윤아야. 미안한데 오늘 점심은 여기서 해결하자. 크게 건질 건 없겠지만, 이 회사의 직원들은 무슨 말들을 하는지 들어보고 싶어.”

“괜찮습니다. 영수 님과 함께라면 저에겐 어디든 거기가 최고의 맛집입니다.“

고윤아의 말이 기특하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슬쩍 안으려고 했다.

그녀는 몸을 비틀어 나에게서 빠져나오더니 내 팔을 손바닥으로 슬쩍 밀었다.

“안 됩니다. 여기는 회사입니다.”

“아··· 그렇지.”

머쓱해진 나는 손가락으로 옆통수를 긁었다.

팔불출이 된 것 같은 쑥스러움은 덤이었다.

우중충한 분위기와는 별개로 식사는 제법 훌륭했다.

반찬의 가짓수도 부족하지 않았고, 재료도 시중 식당과 비교해 부족함이 없는 좋은 것들을 쓰는 것 같았다.

그 점에 대해선 고윤아도 나와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밥이 잘 나오는데, 식수 인원이 적습니다. 다들 왜 식당에서 먹지 않는 걸까요.”

의외라는 듯, 그녀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딱히 답을 바라고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 나는 그녀의 의문에 나름의 생각을 밝혔다.

“회사 분위기가 최악이니까, 점심시간이라도 회사를 벗어나 있고 싶은 거겠지. 나도 예전에 직장생활 할 때 그랬던 적이 많은걸.”

“그러고 보니 영수님의 회사 생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 흔하디흔한 대리 중 한 명이었어. 회사의 규모도 여기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아주 영세했고.”

“그때도 훌륭한 회사원이었겠죠. 영수 님이라면.”

“아니야. 다들 자꾸 왜 이렇게 날 올려치기 하는 거야. 이제는 꼭 멕이는 것처럼 들려.”

나는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고 고윤아는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정말이지 보통의, 딱 그 정도의 회사원이었어. 군대를 안 다녀온 탓에 남들보다 조금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뿐, 진급도 딱 남들만큼이었고. 가끔은 직장 상사의 갑질을 비겁하게 못 본 척 고개 돌리기도 했고 말이야.”

만약 계속 회사에 다녔으면 어땠으려나.

지금쯤 과장은 달았을까?

아니면 준비했던 대로 회사를 옮겼을까?

그렇게 영양가 없는 공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사원증을 목에 맨 남자 두 명이 식판을 들고 우리 옆을 스쳐 지나갔다.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하나, 그리고 그보다는 훨씬 연배가 있어 보이는 다른 이가 둘.

무심히 발걸음을 옮기던 그들.

그런데 젊은 쪽이 문득 고윤아를 힐끔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동공이 크게 열렸다.

“저기, 차장님! 우리 여기서 드시죠.”

내 또래의 그 남자는 우리와 한 칸 정도 떨어진 테이블에 혼자 자리를 잡고선 큰 소리로 자기 선배를 불렀다.

차장이라고 불린 사람은 남자의 부름에 별 대꾸 없이 가던 길을 멈추고 발길을 돌렸고, 젊은 남자의 건너편에 의자를 빼고 앉았다.

젊은 남자는 세 번쯤 우리를 은근슬쩍 쳐다보았는데, 두 번은 고윤아를 그리고 나머지 한번의 시선은 나를 향했다.

“오 대리, 밥 먹자.”

앞에 앉은 차장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오 대리의 고개가 앞을 향했다.

- 윤아야, 저 남자가 너한테 관심이 있나 봐. 이거, 나 질투해야 하는 거야?

나는 옆자리에 들리지 않도록 입만 뻐끔거렸다.

입 모양만으로도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데 능한 고윤아는 바로 손사래를 쳤다.

그때,

“차장님, 그나저나 이제 우리 회사 어떻게 되는 걸까요?”

오 대리라고 불린 자가 입을 열었다.

큰 목소리로 떠든 것은 아니었지만, 근처에 있는 우리에게는 딱 들릴 그 정도의 데시벨이었다.

“뭐가 어떻게 돼.”

“아니, 오늘 투자 회사에서 사람 나와서 회장님이랑 임원진이랑 미팅했다면서요. 뭐, BH 뭐시기라던데.”

저 오 대리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그 BH 뭐시기가 바로 옆에서 밥을 먹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척 무심하게 젓가락질을 하며 그들 쪽으로 귀를 열어놓았다.

“··· 이러다가 인력감축 이야기 나오는 거 아니에요?”

“쓸데없는 소리.”

“차장님도 참. 경리부 쪽에서 혹시 뭐 들으신 거 없어요.”

“없어.”

딱 잘라서 말했지만, 차장의 목소리에도 자기 후배를 안심시킬만한 확신은 없어 보였다.

지친 인상의 차장은 잠시 고개를 들더니 좌우를 살폈다.

주변에 특별히 경계할만한 대상이 없다고 여겼는지 차장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한숨부터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조금 긴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우리 회사가 이런 지경까지 된 건 쉬쉬할 것도 아니야. 다들 알면서도 덮어놓고 모르는 척하고 있었으니까···”

티몬과 품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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