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덫
이제는 카운터 펀치를 날릴 시간.
나의 당돌한 발언은 윤 회장의 면전에 그대로 가서 꽂혔다.
묵직한 돌직구에 회의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낮게 깔렸다.
윤일중 회장은 물론이요, 그의 수하들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무뚝뚝하게 굳어있는 그들의 표정이 저 멀리 사모아 섬에 있다는 모아이 석상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런 그들의 반응이 의외라는 듯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 들어 보였다.
“제가 그렇게까지 충격적인 말을 했습니까? 당연히 이쯤은 예상하셨으리라고 생각했는데요.”
유통시장에서 주식을 사들여 윤 회장과 지분권 다툼을 하는 것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었다.
수많은 투자자가 모이는 유가증권시장에서는 내 적들을 정확히 가늠하기 힘들다.
만약 그곳에서 끝까지 승부를 보려고 했다면 그 보이지 않는 적들 때문에 악전고투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실탄이 넘치도록 있다고 해도 어디 시장이란 것이 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물건이던가.
이미 BH 인베스트먼트의 대주주 공시까지 나온 지금이다.
우리가 주식장에 계속 머물며 고왕 건설의 주식을 사 모은다면 개싸움의 냄새를 숨길 수 없었을 것이다.
지분 다툼은 주가 상승을 불러오는 아주 맛있는 재료 중 하나.
틀림없이 엄한 놈들이 파리떼처럼 들러붙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그림이 아니었다.
우리가 대적해야 할 상대는 명확하고 눈에 보이는 자여야만 했다.
그래서 5%였다.
목표로 하는 상대에게 우리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딱 그 정도.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트로이의 목마가 적진에 진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최근 CB 전환권 행사에 따른 신주발행으로 윤일중 회장님이 쥐고 계신 지분율이 다소 줄어들었군요.”
지금 상황에서는 침묵이 미덕이 아님에도, 여전히 말문을 봉인하고 있는 윤일중 회장과 임원진들을 향해 앨런이 말했다.
“장부상으로는 회장님이 21.3%, 두 아드님이 가지고 있는 것이 6.9%, 그리고 사모님 앞으로 3.1%. 모두 합치면 31.4%. 물론 아드님과 사모님이 가지고 있는 지분의 처분권도 회장님에게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안경테 너머 앨런의 눈빛이 빛났다.
“이 정도라면 저희에게 얼마간 양보를 하셔도 경영권은 Solid 하겠군요.”
Solid라. 훌륭한 단어 선택이야.
윤일중이 자신의 지분을 우리에게 넘겨주게 만들려면 하나의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경영권만은 보존이 된다는 믿음 말이다.
우리에게는 그가 믿고 싶은 것만을 보게 만드는 작업도 필요했다.
언어는 무의식을 지배한다.
그런 점에서 앨런이 말하는 solid라는 단어는 알게 모르게 윤 회장의 마음속에 안도감을 심어주었으리라.
“그래서···”
긴 침묵 끝에 윤일중 회장이 입을 열었다.
“대관절 얼마만큼을 원한다는 거요?”
“공교롭게도 아드님과 사모님 앞의 지분을 합치면 정확히 10%더군요. BH 인베스트먼트는 딱 그만큼을 양도받고 싶습니다.”
윤 회장 오른손을 들어 턱을 괴었다.
그의 머리는 계산기를 두들기느라 엇, 뜨거. 싶을 정도로 달아올라 있을 것이다.
10%를 우리에게 넘기면 윤 회장과 BH 인베스트먼트의 지분은 6포인트 차이가 나게 된다.
얼마든지 엎치락뒤치락 할 수 있는, 말 몇 마디에 혹해 내어주기에는 불안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제안을 거절할 수도 없다.
그건 타는 목마름 속에서 사막 한가운데를 헤매다 간신히 찾은 오아시스를 눈으로 구경만 하는 꼴이니까.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서 윤일중 회장은 중도의 길을 걷는 것을 선택했다.
그는 협상을 시도했다.
“10%나 내놓으라니. 그건 좀 과한 거 아니요?”
“회장님. 우리는 고왕의 회생이 우리의 이득이 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여기에 뛰어든 것입니다. 아까 한 대표가 말한 제안이 끝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액수를 말씀드리기는 곤란하지만, 우리는 고왕의 어려움을 해결하기에 충분한 자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왕 건설을 도우려면 충분한 목소리를 낼 만큼의 지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이 부분은 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회장님이 양보할 수 있는 부분과 저희가 원하는 만큼을 충분히 고민해서 내린 결정입니다. 정확히 10%입니다.”
단호한 앨런의 말에 윤 회장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불현듯 임원 중 한 명을 향해 손짓했다.
“조 상무, 잠시만 이리로.”
조 상무라는 임원을 자기 옆으로 불러들인 윤 회장은 그와 밀담을 나누었다.
주로 떠드는 쪽은 조 상무였다.
그는 허리를 숙여 윤일중 회장의 귀에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댄 채, 손으로 입을 가리고 무언가를 속살거렸다.
윤 회장은 그의 말에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참모로부터 충분히 조언을 들었는지, 윤 회장은 조 상무를 다시 자리로 물렀다.
“만약에 말이요. 내가 지분을 양도한다고 칩시다. 그럼 BH 인베스트먼트는 얼마에 매입하실 생각이오.”
“고왕 건설의 주가가 계속해서 하방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기술적 분석 같은 것도 의미가 없는 상황이구요. 우리는 액면가에서 30% 할인된 가격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 뭐!”
윤일중 회장이 주먹으로 회의 테이블을 쾅 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임원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윤 회장의 이마에는 시퍼런 핏줄이 돋아나 있었다.
살얼음장을 걷는 것 같던 회의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이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순 날강도 아니야?”
“··· 날강도?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가 한국말이 서툴러서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이봐, 여기가 무슨 도떼기시장인 줄 알아? 프리미엄을 얹어줘도 팔까, 말까 한 판국에···”
윤 회장의 가면이 깨지기 시작했다.
“프리미엄이라면 이미 얹어드리지 않았습니까. BH 인베스트먼트가 이 회사의 소방수가 되는 것. 지금 그것 이상의 프리미엄이 있습니까?”
앨런으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아 차분한 목소리로 내가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윤 회장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협잡질은 그만 집어치워. 내가 당신들 속셈을 모를 줄 알아? 당신들이 경영에 대해서 뭘 알아? 당장 천원, 만 원 한 장이라도 이득이 된다면 나라도 팔아먹을 사람들이.”
윤 회장은 침까지 튀기며 불같은 분노를 토해냈다.
그렇다고 주눅이 들 내가 아니었다.
오히려 윤 회장이 저리 감정적으로 나오는 것이 반가울 지경이었다.
격정적인 감정은 사람의 빈틈만 도드라지게 만들 뿐이다.
윤 회장은 나에게 그 틈을 보였고, 나는 지금부터 망치를 들고 거기에 못을 박아버릴 테다.
“··· 회장님, 실망입니다. 정말 이기적인 분이시군요.”
감히 자신에게 건방지게 군다고 생각했을까?
윤 회장이 눈을 부릅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회장님은 회사의 운명을 걱정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재산을 싸게 처분할 상황에 몰린 것에 화를 내시는 겁니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회사가 나고 내가 곧···”
윤 회장은 아차 싶었는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임원들이 몰려 앉아있는 오른쪽으로 슬쩍 쏠렸다.
“고왕 건설을 생각하는 제 마음은 진심입니다. 설령 큰 지분을 가지게 된다고 해도 순간의 이익에 연연하며 회사를 어지럽힐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저는 고왕이 가지고 있는 역사와 저력을 사는 것이니까요. 이 점은 분명히 여기 계신 임원분들께 저의 모든 걸 걸고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나는 ‘고왕의 역사와 저력’ 그리고 ‘임원’을 힘주어 발음했다.
“회장님께 하나 여쭤보고 싶습니다. 이 고왕 건설이 윤 회장님의 개인 소유물입니까? 아니죠. 회장님은 고왕의 이름 아래 있는 사람들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는 자리에 계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외람되지만 지금 회장님은 회사를 살릴 수 있는 길이 있음에도 자기 욕심에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으시려는 걸로 보입니다.”
윤 회장이 지분을 우리에게 양도해도 회사는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는다.
그가 쥐고 있는 지분은 단지 개인 자산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윤일중 회장은 회사가 아니라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해 역정을 내고 있을 뿐이다.
나는 임원들에게 이것을 깨쳐주기 위해 목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분명히 보았다.
내 말이 끝나자 임원 몇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것을.
“이··· 이···”
윤일중 회장은 말문이 막혔는지, 앓는 소리만 내다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회장님. 이제 첫 번째 만남일 뿐입니다. 풋내기인 제가 함부로 말하긴 조심스럽지만, 경영의 최우선 과제는 회사가 계속 살아남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고왕 건설은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저희야 여기서 물러난다고 해도 작은 손해를 볼 뿐입니다. 하지만 고왕 건설, 아니 고왕 그룹은 전부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부디 현명한 판단을 해주시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BH 인베스트먼트의 일당들이 회의실을 빠져나간 이후에도 윤일중 회장을 비롯해 임원 중 누구 하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어떻게들 생각해?”
윤 회장이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몇 번 쓸어내리곤 누구에게라 할 것 없이 질문을 던졌다.
다들 눈치만 보고 있을 때, 임원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아까 한영수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던 자였다.
“회장님. 고통스러우시겠지만, 저들의 요구조건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내 주식을 헐값에 팔아넘기란 말이야?’
윤 회장은 이런 일갈을 내지르고 싶은 걸 꾹꾹 참아내야 했다.
지금 분위기에 이 말을 했다간 임원들이 어떤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 회장님, 참 이기적인 분이시군요.
한영수가 무심하게 내뱉은 몇 마디의 힘은 정말로 강력했다.
한 배를 타고 있던 윤 회장과 임원들의 편을 순식간에 갈라놓고 윤일중 회장을 코너로 몰아넣었다.
어찌 보면 윤 회장으로서는 당연히 자신의 권리를 말한 것뿐인데 세 치 혀로 그를 정말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제기랄··· 한영수? 도대체 어디서 그런 영악한 놈이 나타난 거지.’
윤 회장은 이제 더 이상 한영수를 듣지도 보지도 못한 어린놈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영수의 손을 잡기에는 그가 포기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뼈아팠다.
거대한 덫에 걸린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윤 회장이었다.
너무나 치밀하게 설계되어 빠져나갈 틈조차 보이지 않는 그런 덫에.
“회장님.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어도 회장님이 최대 주주인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일단 발등의 불부터 끄시죠.”
“일단 회사가 안정화되면 그때 다시 지분 매입을 들어가도 늦지 않습니다.”
임원들은 한영수에게 감화되기라도 한 듯 하나둘씩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부사장. 부사장은 어떻게 생각해.”
윤일중은 일말의 희망을 품고 이재석 부사장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회장의 뜻이라면 YES맨을 자처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은 해결책까지 제시했던 이재석이다.
윤 회장은 이번에도 이재석에게서 무언가 그럴듯한 답이 나오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재석은 윤일중 회장의 눈을 외면하였다.
“··· 글쎄요. 회장님의 판단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후━
윤 회장은 깊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지분을 넘긴다고 해도 30%는 절대 안 돼.’
하지만, 아직도 윤 회장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돈을 얼마를 받아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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