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97화 (97/200)

97. 흥정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BH 인베스트먼트의 대표이사실.

앨런, 고윤아, 그리고 최화란에 구동일까지.

고왕 건설과의 첫 대면을 대비해 우리는 한자리에 모였다.

여기까지는 시나리오대로 물 흐르듯이 잘 진행되어 왔다.

그래도 혹시 놓친 것은 없는지 한 번 더 검토했다.

어쨌든 규모 면에서 우리는 다윗이요 고왕 건설은 골리앗이다.

새우가 고래를 잡아먹는 격이니 우리는 매사에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BH 인베스트먼트의 선장으로서 첫 출정을 앞둔 기분이 예사롭지 않았다.

설렘과 긴장, 그 모든 것이 뭉뚱그려진 그 감정은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고왕 건설에 입사원서를 냈다가 고배를 마셨던 취업준비생 시절이 언제인가.

고작 10년도 지나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그 회사를 먹어 치우러 가는 것이다.

물론 지금 유치한 사감 따위 때문에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이 회사는 앞으로 그려갈 커다란 그림의 초석이 될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가져야만 한다.

“앨런과 고 변호사, 그리고 저까지 이렇게 셋이서 갑니다.”

최화란과 구동일은 아직 정식으로 BH 인베스트먼트에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다.

오로지 합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우선 최화란은 윤일중 회장과 안면이 있기에 존재를 숨겨야 했고, 구동일은 구 회장의 존재를 노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나 구동일, 그는 최후까지 숨겨야 하는 비장의 카드였다.

“저기, 한 대표.”

제 생각을 하는 것을 알기라도 했는지 구동일이 슬쩍 입을 열었다.

“혹시 나는 언제부터 일할 수 있는 거야?”

그는 내 눈에 들기 위해서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매일 같이 사무실에 출근 도장을 찍고 누가 시키는 것이 아님에도 온갖 잡무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구 이사는 이미 일을 지나칠 정도로 열심히 하고 있는걸.”

나는 웃으며 구동일에게 말했다.

앨런은 그가 이사진의 한 명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꽤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구동일이 내가 뽑은 사무 보조원인 줄로만 알았다는 것이다.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서툴지만 무언가를 열심히 해보려는 구동일의 모습이 기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은 천지가 개벽했다고 해도 믿을 판이랄까.

“구 이사는 비장의 카드야.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할. 마음 편하게 기다리고 있으라고.”

구동일은 내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다들 나가보세요. 30분 뒤에 출발합시다. 그리고··· 최 이사님은 잠깐 남아보시겠어요.”

일행들은 각자 준비했던 자료들을 바쁘게 손을 놀려 챙겼다.

그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내가 말한 대로 최화란과 나만이 자리에 남게 되었다.

“자기야··· 아니지. 이제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한 대표. 왜 그래? 혹시··· 가기 전에 나한테서 좋은 기운이라도 받으려고?”

최화란은 몸을 앞으로 숙이며 가슴 쪽을 일부러 내밀곤 익살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진지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요. 지금 고왕 건설 주식 차명계좌로 계속 사들이고 있죠?”

“··· 응?”

최화란은 예, 아니요. 가 아닌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렸다.

최화란은 마냥 덮어놓고 믿기에는 자기 셈속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제 일을 시작하려는 참인데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쳐내고 가야 한다.

훗날 시세 차익을 노리고 최화란이 뒷구멍으로 주식을 사 모으고 있을 거라는 짐작은 진작부터 하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반응을 가만히 보자니 내 예감이 여지없이 또 적중한 모양새였다.

“우리 작전세력 아닙니다. 그러려고 회사 차린 거 아니에요. 손해 보고 빼라는 소리는 안 할 테니까, 고왕 건설 인수 전까지 다 치우세요.”

단호한 내 말투에 최화란이 슬쩍 반발했다.

“하지만 한 대표도 알다시피 그게 원래 내 일이야. 누구보다도 먼저 좋은 재료를 알았는데 잘 요리해야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댈 생각 없어요. 하지만 적어도 법망에 걸릴 만한 일은 하지 말아야지요. 돈도 공(功)도 이미 많이 들어갔고, 앞으로도 계속 들어갈 거고요. 사소한 불안 요소라도 안고 갈 생각이 없으니까, 알아서 빨리 정리하세요.”

“내 실력 못 믿어서 그래? 걸리긴 누가···”

“최화란 이사님.”

나는 낮은 음성으로 그녀의 이름을 정 없게 불렀다.

“자꾸 그렇게 고집을 부리실 거면, 안타깝지만 이 일에서는 빠지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몇 초간 시선을 주고받은 끝에 최화란은 슬그머니 내 눈을 피했다.

“참나··· 알았어! 알았다고.”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물론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그녀를 내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최화란이 회사에 묻은 100억이라는 돈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앞으로 해줘야 할 중요한 역할이 더 남아있다.

충분히 알아듣게 경고했으니, 어느정도 교통정리는 되었으리라.

나는 목소리를 누그러트리고 최화란을 달랬다.

“제가 약속했잖아요. 돈 많이 벌게 해드리겠다고. 작은 욕심에 큰일을 그르치면 되겠어요.”

최화란은 말없이 내 쪽으로 한걸음 다가와 넥타이를 바르게 고쳐주었다.

“오늘 잘 할 수 있지? 하긴··· 딴 사람은 몰라도 자기한테는 이런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겠다.”

나는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

고왕 건설 본사의 임원 회의실.

윤일중 회장을 필두로 주요 임원들은 우리의 방문보다 앞서 자리에 앉아있었다.

“··· 음?”

윤 회장의 입에서 미묘한 소리가 튀어나온 것은 그가 얼마간 내 얼굴을 뜯어본 뒤의 일이었다.

“자네··· 그때··· 그러고 보니 자네 이름이었구먼. 한영수가.”

“예. 회장님. 이렇게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윤 회장은 잠시 나와 앨런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허허━

그의 미간이 아주 짧은 찰나 동안 흉하게 일그러지는 것 같더니, 곧이어 그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은 호탕한 웃음이 나왔다.

속이 훤하게 들여다보인다.

일전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윤일중 회장은 비유하자면 마치 오락 영화와 같은 사람이었다.

뇌를 비우고 몇 장면쯤 스킵하면서 봐도 그 줄거리가 전부 이해가 되는.

그리고 남는 것은 별로 없는.

한마디로 윤일중 회장은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는 지금 일종의 오해 같은 것을 하고 있으리라.

아주 오래전부터 나와 앨런이 결탁을 하고 어떤 공작 같은 것을 해왔으리라고.

뭐··· 전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나와 앨런을 이어준 것이 다름 아닌 자신임을.

그래도 명색이 거대기업의 수장.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건 간에 윤 회장은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사람 좋아 보이는 가면.

그 가면을 쓴 채로 그는 입을 열었다.

“자네랑 나랑 인연이 몹시 깊은가 봐. 이렇게 또 보게 되다니.”

“예. 진작에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늦었습니다.”

“가만 있어 봐. 이거 자네가 우리 회사에 정말 관심이 많구만? 일전에 말하길 여기에 취업 원서를 넣었다가 떨어졌다고 했지?”

윤 회장의 말에 앨런이 발끈하며 뭐라 입을 열려고 했다.

나는 책상 밑으로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슬쩍 잡았다.

유치한 도발이다.

어떻게든 나를 깔아보겠다는.

뻔히 보이는 수작에 시작부터 흔들릴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여유롭게 웃으며 윤 회장의 말을 맞받아쳤다.

“예. 그래서 그때의 아쉬움을 주주로서 풀어볼까 합니다.”

그때 윤 회장의 귀에 대고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자가 뭐라고 속살거렸다.

그리고 윤일중 회장은 크흠,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입을 닫았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BH 인베스트먼트의 대표이사 한영수라고 합니다. 그리고 외람된 말씀 하나만 드리고 시작할까요? 공적인 자리이니 서로 경어를 쓰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계속 웃었다.

윤 회장과 달리 나는 여유 있는 척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나는 이 자리에 앉아있는 그 누구보다 여유로웠다.

“저도 인사드리겠습니다. 고왕 건설의 이재석 부사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윤 회장 옆자리의 남자는 자신을 이재석 부사장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바짝 마른 체형의 남자였다.

이재석의 인상은 다소 묘하다고 할 수 있었는데 얇은 입술과 매부리코가 유약함과 강퍅해 보이는 이미지가 동시에 풍겼다.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이재석은 말을 이었다.

“BH인베스트먼트의 진의는 무엇입니까.”

“공시에도 보유 목적을 명시했는데요. 확인 안 하셨습니까. 경영 참여입니다.”

하━

누군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의 주인공이자 나에게 이름도 직책도 밝히지 않은 임원이 목소리를 내었다.

“젊은 분이 욕심이 너무 과하신 것 아니요? 아무리 우리가 지금 처지가 힘들기로서니···”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또 어디선가 혼잣말처럼 시부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작 5% 좀 넘는 것 가지고···”

그래.

아직 당신들에게 우리는 ‘고작’으로 보일 테지.

과연 이 자리에서 끝까지 그런 생각을 유지할 수 있을까?

임원들이 한동안 으르렁거리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나를 향한 성토가 한차례 지나간 뒤 이쪽에서도 슬슬 반격을 준비했다.

“참 섭섭한 일입니다. 고왕 건설은 투자자를 이렇게 대접하십니까?”

나는 좌중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고작’ 정도인 우리 회사일지라도 주주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더군요. 예를 들면 외부감사 같은 것들요. 고 변호사님, 이분들이 알 수 있게 저 대신 말씀해주시겠어요?”

“예. 주식회사 등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 제23조에 따르면 회사의 주주는 영업시간 내에 감사보고서를 열람할 수 있고 또···”

고윤아는 내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법령을 줄줄 외웠다.

그와 동시에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고 앉아있던 임원들의 몸이 반듯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섭섭한 마음에 드린 말씀이지 가뜩이나 회사 분위기가 뒤숭숭한데 서로 간에 불편한 일을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고왕 건설에 아주 긍정적인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이제 미끼를 던질 차례다.

나는 알고 있다.

이 미끼는 고왕 건설이 도저히 물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는 것임을.

나의 입에 회의장에 모인 모든 사람의 눈과 귀가 집중되었다.

꿀꺽━

기다림에 지친 누군가의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때쯤, 나는 서서히 입을 열었다.

“우선 3천억 규모의 채권을 구매하겠습니다. 기간과 금리는 제가 회사에 양보하겠습니다. 업계 표준보다 조금 낮은 수준 정도면 만족하겠습니다. 단, 출자한 자금의 사용 목적은 반드시 고왕 건설의 부채 탕감이어야만 합니다. 이 부분은 약관에 반드시 명시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엄격히 감독하겠습니다.“

임원 몇몇의 동공이 크게 열리는 것이 보였다.

“하나 더. 지금 고왕 건설은 채권단에게 시달리느라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 하는 판국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걸 해결해드리겠습니다. 시중 은행사들로부터 대출 연장 승인. 그걸 제가 한번 받아보겠습니다.”

아아━

사방에서 탄성이 들렸다.

임원들의 눈동자는 이제 크게 커지다 못해 희망의 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리도 나를 고깝게 바라보더니, 이제는 크리스마스 날 산타를 만난 어린아이처럼 구는 것이었다.

나와 BH인베스트먼트를 ‘고작’이라고 표현하던 임원조차 두 손을 꼭 모아쥐고 있었다.

그중 제일 걸작이었던 건 윤일중 회장이었다.

아까 고윤아가 법 이야기를 할 때는 사색이 되어 있더니 돈 냄새가 풀풀 풍기는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입은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 털이 난다는 속된 말이 있는데, 아마 지금쯤 윤 회장의 그곳에는 수북하게 털이 나 있지 않을까?

“··· 그런데.”

이재석이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이 어디 있습니까. 분명히 바라는 게 있으시겠지요.”

차분히 잘 정돈된 그의 말투.

이재석은 다른 이들과 달리 차분히 시세를 살피고 있었다.

“당연합니다. 그런 물량을 쏟아부었는데, 저도 가져가는 것이 있어야겠지요.”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낚싯줄을 감기 시작했다.

미끼를 문 월척이 퍼뜩 놀라 도망치지 않도록.

“저는 이 회사안에서 제 입지를 더 다지고 싶습니다. 외부인인 제가 그럴 방법은 지분밖에 없겠지요. 제가 원하는 걸 말씀드리겠습니다. 고왕 그룹의 회장이자, 이 건설사의 최대 주주인 윤일중 회장님이 가지고 있는 지분을 나눠 가지고 싶습니다. 이제 판은 깔린 것 같으니 저와 한번 흥정해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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